언젠가 본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어두운 건물 안에서 누군가 "공기 속에 더러운 게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한 줄기 햇빛을 들여보냈다. 그 빛 속에서 무수히 많은 먼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방금 전까지 깨끗하다고 믿었던 공기는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입자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우리는 본다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고. 그게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니, 바람을 예로 들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이 느끼고, 나무가 흔들린다. 존재의 증명은 보이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진리라는 것, 또는 어떤 사실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 방법과 원리를 모르는 것뿐이다. 중세 사람들에게 전파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듯이, 고대인에게 원자를 증명할 수단이 없었듯이. 그들이 무지했던 게 아니라, 시대가 아직 거기까지 닿지 못했던 것이다.
재밌는 건, 신학이든 과학이든 결국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신학은 믿음으로, 과학은 실험으로 답을 찾아간다. 방법은 다르지만, 그 뿌리에는 똑같은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궁금하다!!! 알고 싶다!!!
이 단순하고도 원초적인 욕구가 인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불을 발견한 것도, 바퀴를 만든 것도, 달에 간 것도 결국 궁금해서였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바꾸는 발견이 아니어도 된다. 오늘 내가 궁금했던 것 하나를 깨달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발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왜 하늘이 파란지 문득 궁금해졌을 수도 있다.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걷는지 생각해 봤을 수도 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된장찌개의 감칠맛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작은 궁금증들이 모여서 나를 만든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나는 오늘 하루 발전하지 않았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발전은 시작된다. 답을 찾지 못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다.
햇빛 속 먼지처럼, 우리 주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발견할 방법을 아직 모를 뿐이다. 그리고 그 '아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능성이, 삶을 설레게 만든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증명할 수 없는 것도.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고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면, 오늘의 신비는 내일의 상식이 된다. 그렇게 인류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오늘도 궁금해하자.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찾아보고. 답을 얻든 얻지 못하든, 그 과정 자체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 나는 오늘 하루 분명히 발전했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은 알게 됐으니까. 내일은 또 무엇을 알게 될까.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