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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단상 24. 풍랑 위를 나는 갈매기처럼

by 여철기 글쓰기


동해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어요.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바다는 거대한 파도들이 무섭게 몰아치고 있었죠.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날, 해변은 텅 비어 있었어요. 평소 여유롭게 산책하던 사람들도,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던 길고양이들도, 바위틈에서 햇볕을 쬐던 게들도 모두 자취를 감춘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거친 날씨 속에서 유독 한가로운 존재들이 있더라고요. 바로 갈매기들이었어요.


거대한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위를,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그 공간을, 갈매기들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게 날고 있었어요.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조그만 몸으로 어떻게 저런 거센 바람을 버티는 건지, 처음엔 걱정스럽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버티는' 게 아니더라고요. 갈매기들은 바람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바람을 타고 있었어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바람을 '이용'하고 있었죠.


날개를 펄럭이는 대신 펼쳐서 균형을 잡고, 거센 바람의 흐름을 이용해 거의 날갯짓 없이 활공하고 있었어요. 바로 양력이에요. 다른 새들이 피해야 할 역풍으로 여기는 그 바람을, 갈매기들은 자신을 더 높이 날아오르게 하는 양력으로 바꾸고 있었던 거죠. 역경이 아니라 추진력으로, 역풍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힘으로 말이에요.


더 놀라운 건, 이런 날씨에 물고기들이 수면 가까이 떠오르거나 파도에 휩쓸려 나온다는 사실을 갈매기들은 알고 있다는 거예요. (이 부분은 생태학적 관찰에 근거한 추론입니다만, 많은 조류학자들이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고한 바 있어요.)


본능일까요, 아니면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일까요.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어요. 위기와 기회는 사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시각의 차이가 아닐까 하고요.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풍랑주의보는 분명한 '위협'이에요. 숨을 곳을 찾고,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죠. 하지만 갈매기들에게 그날은 어쩌면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경쟁자들이 사라진 공간, 평소보다 더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조건,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비행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을 테니까요.


중요한 건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과 관점이더라고요.


요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장면이 많이 보이지 않나요? 경제는 불확실하고, 기술은 너무 빨리 변하고, 일자리 시장은 예측 불가능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고들 하죠.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위축되고, 일단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쪽을 택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요. 풍랑 속에서 몸을 사리는 건 당연한 생존 본능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럴 때, 갈매기처럼 나는 사람들도 있어요.


새로운 기술을 두려워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배우는 사람, 모두가 망한다고 할 때 기회를 발견하는 창업가, 위기의 업종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혁신가들이요. 이들이 특별히 더 용감하거나 무모한 건 아닐 거예요. 다만 같은 바람을 다르게 읽고, 다르게 활용할 줄 아는 거죠.


물론 모든 사람이 갈매기가 될 필요는 없어요. 각자의 생존 방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억할 건 이거예요. 모두가 위기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요.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닐까 싶어요.

AI가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두려워하는 동안, 누군가는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10배로 높이고 있어요. 경기가 어렵다고 지갑을 닫는 동안, 누군가는 가격 대비 가치를 제공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죠. 모두가 안정을 찾아 움츠러드는 동안, 누군가는 변화의 파도를 타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갈매기들이 그날의 풍랑을 견딘 비결은 간단했어요. 바람을 피하려 하지 않고, 바람의 방향을 읽고 그에 맞춰 날개를 펼친 것. 그게 전부였어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변화의 바람을 막으려 하기보다, 그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읽고, 우리의 날개를 어떻게 펼칠지 고민하는 것. 어쩌면 그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르겠어요.


동해의 그 풍랑 위를 나는 갈매기들처럼요.


작은 몸이라도, 바람을 제대로 읽고 날개를 펼칠 줄만 안다면, 우리는 어떤 풍랑 위에서도 날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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