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ING 101 Ep05
나는 어려서부터 파이널판타지, 드래곤퀘스트 같은 JRPG 게임을 좋아했다. 새롭게 도착하는 마을에서는 항상 새로운 무기와 방어구를 팔고 있었는데 값비싸고 성능이 좋은 것과 그거보단 조금 싸지만 성능도 조금 떨어지는 장비들을 함께 파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돈도 충분하지 않아서 조금 싸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장비보다는 성능이 좋은 것을 먼저 사고 그 장비들을 사용해서 몬스터를 물리치고 돈을 모아서 비싸고 좀 더 좋은 장비들을 구입하곤 했었다. 그렇게 그 마을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고 나면 다음 마을로 이동, 또 같은 플레이를 반복했다.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결국 난 최강의 무기와 방어구를 갖게 되었고 라스트 보스를 쓰러트리고 엔딩. 그 게임을 클리어 할 때 까지 내가 무기와 방어구, 악세서리에 사용한 돈은 모두 얼마였을까?
음악을 만드는 게임에 뛰어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적절히 투자하여 장비를 업그레이드 해야한다. 게임처럼 그냥 필드에 나가면 무한정 널려있는 몬스터를 사냥해서 돈을 모을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을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위시리스트의 세컨 티어에 있는 장비를 여러 개 구매하기 보다는 그 돈을 모아 한 번에 퍼스트 티어의 좋은 장비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돈을 두 번 쓰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적게 가지더라도 좋은 것을 구매하는 것이 결국 돈을 아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돈을 투자하는 순서를 Ep01 에서 말한 우선 순위대로 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나도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치면서 장비를 업그레이드 해왔다. 프리앰프 에피소드에서 말했던 API 512c를 가지게 되기 전에 512c를 한 채널 살 수 있는 돈으로 API의 세컨 브랜드의 2채널 스테레오 프리앰프를 구매했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장비라는 글을 읽었고 돈을 세이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구매한 그 프리앰프는 결국 512c보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사운드 역시 그랬다. 시간이 지나 그 소리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 결국 API 512c를 구매했고 지금까지도 잘 사용하고 있다. 만약 그 때 바로 API를 구매했었다면 나는 세컨티어 장비를 산 돈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장비를 살 때면 이 케이스를 항상 떠올리고 결정을 내렸던 것 같다.
요즘은 여러 회사에서 클래식 아웃보드 장비들을 복각한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1176, LA2A, 1073, 그리고 여러 마이크들까지 라인업이 상당히 다양하다. 물론 그 장비들도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주는 장비들이 맞지만 그 복각 장비들이 오리지널과 정확히 같은 소리를 내줄거라고 생각하고 구매해서는 안된다. 여러가지 복각 장비들을 오리지널과 비교해서 테스트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오리지널의 성향을 모방했을 뿐 전혀 다른 악기라고 봐도 무방한 차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복각 장비 그 자체의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지만 복각 장비가 오리지널과 '같은 사운드'를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돈을 좀 더 모아서 오리지널을 구입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플러그인을 구입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플러그인들도 기존에 있는 아날로그 장비들을 복각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아날로그 장비를 복각해서 만든 플러그인들도 기존 장비의 성향을 어느 정도 재현해냈을 뿐이지 정확히 같은 소리는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날로그 장비와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플러그인을 구입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아날로그 장비와 동일한 사운드가 아니라고 해서 실망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흔히 유투브에서 볼 수 있는 아날로그 장비와 그 장비의 복각 플러그인을 동일한 셋팅값에 맞춰놓고 비교하는 영상은 흥미로운 테스트이긴하나 그 소리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플러그인이 하드웨어에 비해서 못쓸만한 퀄리티는 아니기 때문이다. 플러그인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야하는, 하드웨어와 비슷한 성향의 다른 장비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플러그인도 이전 에피소드에서 말했던 것처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드웨어에 비해 오히려 더 편리하면서 아날로그 장비에 뒤지지 않는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오는 장비들은 퀄리티가 상향 평준화 되어가고 있다. 하드웨어도 플러그인도. 그 장비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걸 다루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인 것 같다. 장비 업그레이드를 위해 너무 많은 고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장비를 사기위해 음악을 만드는게 아니라 좋은 음악을 만들기위해 장비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