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와의 제주도 신혼여행 Day 1
"어차피 멀리 떠나기는 힘들어져 버렸고, 제주도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해. 엄마, 아빠도 신혼여행으로 제주도 갔었잖아, 그치?"
나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언제, 얼마나 더 심각해질지 예측되지 않는 나날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바르셀로나를 갈까, 포르투를 갈까, 마요르카도 가고 싶은데, 아니면 셋 다 갈까..! 라는 고민을 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는데 그 고민이 슬프게 사라져 버린 지 오래. 예측되지 않는 회사 스케줄 때문에 올해 초까지도 항공편이나 숙소를 예약해두지 않은 일을 다행으로 여기게 될 정도였다.
며칠 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도 같이 갈까? 얼마 전 티브이에 제주도가 나오는데 진짜 좋더라. 내가 한번 얘기해보니까 아빠가 같이 가면 다 쏜다는데? 운전은 엄마가 하면 되고. 이 정도면 괜찮은 제안 아니냐?"
"응? 갑작스럽긴 한데. 무엇보다 ㅎ가 괜찮아야지. 한번 물어보긴 할게."
평소 나에게 제안을 잘하지 않는 엄마였기에 엄마가 했던 말을 자꾸만 곱씹었던 것 같다. 언젠가 우린 또 멀리 타국으로 떠날 수 있을 테고, 그럼 제주도 가는 김에 엄마, 아빠 리마인드 신혼여행도 될 겸 같이 가 볼까? ㅎ는 고맙게도 그 제안에 동의했다. 일정은 이랬다. 제주도에서 넷이서 만나 함께 2박 3일. 우리는 남아서 3박을 더 하기로.
그렇게 우리는 제주 공항에서 만났다. 가장 먼저 만나서 한 일은 렌터카를 찾으러 가는 거였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렌터카 회사의 버스를 타고 가 예약을 확인한 뒤, 바로 주차장에서 예약된 차를 몰고 나가면 되는 간편한 시스템이었다. 나와 ㅎ는 술을 좋아해 당분간은 운전할 생각이 없는 뚜벅이. 아빠는 아침이라도 상관없이 술 한잔씩 마시는 것이 즐거운 프로 드링커. 베스트 드라이버이자 우리 중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는 엄마가 운전대를 잡았다.
점심을 먹고서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갔다. 일광욕을 할 수 있게 바다 쪽을 향해 선베드 비슷한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음료와 빵 몇 개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밥 먹고 또 뭘 먹으러 온 거야? 그런 거야? 이게 요즘 여행하는 방식이야?"
아빠는 밥을 먹고 또 뭔가를 먹으러 온다는 것이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이렇게 오니까 좋긴 좋네." 어느새 자리를 잡아 선글라스를 쓰고 누워 햇빛을 쬐는 아빠는 즐거워 보였다.
한참을 누워 여유를 부리다 아빠에게 말했다.
"자, 아빠. 이제 당근주스를 마시러 갈 거야!"
"아니, 뭐여. 또 먹으러 간다고?" (이 모든 말은 전라도식 억양이 가미되어 있다)
"응, 이게 요즘 젊은 세대 여행이래."하고 엄마가 말한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에 다음 목적지를 찍고 달렸다.
사실 바다를 보며 달리기만 해도 좋았다. 여행은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에서 목적을 두지 않았던 풍경을 발견하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생각하니까. 아빠는 이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싫지 않아 보였다.
"요 옆에 수국 길이 있대. 그쪽도 한번 가볼까?"
카카오 맵에서 보이는 '종달리수국길'이라는 길 위에는 아직 수국이 피기 전이었다. 그래도 너무 날씨가 화창해 차에서 내려 좀 더 걷기로 했다. 쭉 길을 따라 내려가자, 탁 트인 들판과 저 멀리 아름다운 절벽이 보였다. '신혼여행이니까 사진을 찍어 줘야지.'라며 어느새 우리가 걷는 걸음보다 저만치 먼저 가서 찰칵, 찰칵 사진을 찍는 아빠.
"너희 성산일출봉 가 봤어?" 엄마가 물었다.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엄마가 던지는 모든 질문은 예언처럼 곧 우리의 일정이 된다)
아주 많이 들어봤지만 너무 유명해서 갈 생각을 하지 않던 곳. 나와 ㅎ는 그 근처에 맛있는 고등어 횟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저녁도 먹을 겸 그쪽을 가기로 결정했다.
도착해보니 식당은 만석인 데다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게다가 영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한없이 기다릴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언제 자리가 날지도 모르고, 고등어회가 맛있으면 또 얼마나 맛있을까. 요 앞에 성산일출봉 둘러보고 근처에서 먹는 게 어때?"
우리는 성산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청명한 하늘, 연두색 들판 위로 점점 낮게 내려앉는 주황빛 일몰. 일몰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왜 이름은 성산일출봉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 시원한 바람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금의 열기. 모든 것이 좋았다. 고등어 횟집의 줄이 길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광경을 만나지 못했겠지.
그리곤 내려와 근처의 식당에서 회와 소주로 저녁을 먹었다. 나와 ㅎ는 여행 중 무엇을 어디서 먹을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엄마와 아빠에겐 어딜 가서 무얼 보는지가 중요한 것 같았다. 서로의 제안을 따라가면서 엄마와 아빠는 카페에 가만 누워 바다를 바라보는 기쁨을 발견했고, 나와 ㅎ는 성산일출봉에 올라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일몰을 만났다. 우리는 다음날 얼마나 알찬 일정을 겪게 될지 모르고 평온하게 잠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