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순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한테 핸드폰으로 사진 모아 보내기인가, 그거 알려줄 수 있어? 시아버지가 사진 보내달라고 하시더라고. 지난주에 산내리 놀러 가서 아빠가 울릉도 다녀온 사진들 보여주는데, 너희 시어머니가 아빠가 찍은 사진이 너~~~~무 좋대. 시아버지가 그거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면서 보내달라 하시고. 그런데 내가 봐도 너네 아빠가 사진을 곧잘 찍는다?"
(여기서 '산내리'란 내 남편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양가 부모님은 이제 나와 내 남편을 빼고 넷이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덧붙이겠다)
얼마 전 애순과 상균은 울릉도와 독도로 여행을 다녀온 참이었다. 진희는 상균이 여행을 마치고 카톡으로 보냈던 63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동남아 여행 뺨치게 물이 너무 맑다고, 너랑 호랑 연희랑 아런이랑 다 데리고 오고 싶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보낸 사진들. 작년에 상균은 애순과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었다. 진희는 '여행 어땠어?'라고 물었고, 갑자기 '카톡카톡카톡카카카캍카카캌캍캍타타타톡'하고 미친 듯이 핸드폰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음량 버튼을 끄고, 잠시 핸드폰을 가만히 두었다 알림을 확인한 진희. '아빠로부터 사진 239장이 전송되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답장에 웃음이 나왔다. 휴대폰도 고개를 뒤로 빼서 볼 정도로 요즘 눈이 나빠졌던데, 하나하나 사진을 톡톡 눌러 보냈을 상균의 모습이 뒤이어 떠올랐다.
추석이 되어 상균은 진희를 만났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한 장 한 장씩 넘겨서 봐바바."
맑고 깊은 물과 깎아지른 바위들.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동감 있게 나는 갈매기. 독도 땅을 밟고서 쌩긋 웃고 있는 애순의 모습. 물론 직접 가서 보는 기분은 다르겠지만,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그곳의 생기를 가늠해보기엔 충분했다.
"아버님, 이참에 사진 좀 본격적으로 찍어보는 거 어떠세요?"라고 호가 묻자,
"에이, 그런 멋이나 부리는 걸 뭐."하고 상균이 말했다.
한 잔, 두 잔, 연거푸 술을 마시다 그는 중얼거렸다.
"나도 뭔가 취미를 갖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런 게 없네."
진희는 그 말이 왜인지 쓸쓸하게 들렸다. 평생 돈을 벌기 위한 일에만 몰두해 있던 상균. 이제 그에겐 어느 정도의 돈도 있고, 가장 많은 것은 시간이다. 이제 와보니 그는 자신이 좋아하고 열중할 만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과연 그는 지금껏 살아오던 내내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 생각해보니 진희가 상균으로부터 받은 가장 많은 것은 사진이었다. 10cm 정도 두께의 묵직한 앨범 두 개를 가득 채우고도 더 있는 어린 진희의 사진들. 첫째 딸인 진희가 태어난 뒤 상균은 방 안에서, 베란다에서, 시골집에서, 놀이공원에서, 그곳이 어디든 진희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진희는 스스로 잘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까지도 앨범을 통해 촘촘히 바라볼 수 있었다.
상균은 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아했다. 진희가 여섯 살 때 이사한 아파트 베란다에는 온갖 식물들이 가득했다. 상균은 난초를 정성스레 닦고,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놓는가 하면, 철쭉이 꽃을 피웠다는 소식을 알려주었고, 키 작은 소나무에는 장식을 둘러 진희와 연희를 위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오랜 시간과 마음을 내어 그가 베란다를 가꾸는 모습은 지금도 진희의 마음에 깊게 박혀있다.
진희가 무언가를 좋아하기 시작한 계기를 만들어준 것도 상균이었다. 중학교 때 사주었던 아이리버 MP3. 대학교에 입학하자 사주었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소니 사이버샷 디지털카메라. 그로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하고, 그가 일하던 극장에서 아이 때부터 영화를 보다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많은 좋아하는 마음들의 계기를 만들어준 그가, 자신이 좋아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런 것이 없다'라고 말하게 되어버린 것이 슬펐다.
상균에게 취미, 아니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삶의 파도에서 어떤 것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균이 좋아하는 마음을 찾는 일을 도와주고 싶어 졌다. 마침 다음 주면 상균의 생일이고, 그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