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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진 Sep 10. 2020

자유석이 있는 극장

상균은 열아홉 살 때부터 극장의 영사실에서 일을 했다. 그가 돈을 벌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아래로 셋인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살면서 여러 가지의 직업을 가져온 그이지만, 맨 처음이자 가장 오랫동안 상균의 직업은 영사실 직원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광주극장’에서 아주 오래 일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기도 한다. 언니의 아르바이트 대타로 나오게 된 애순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을 했고.


이런 일도 있었다. 여느 날처럼 영화가 끝나 관객들이 나간 뒤, 상영관의 좌석을 정리하던 상균은 두툼한 지갑 하나를 줍는다. 많은 양의 수표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상균은 지갑 안에 들어있던 명함으로 마침내 주인을 찾게 되고 지갑을 돌려주는 데 성공한다. 주인은 연신 고마워하며 만원 짜리 지폐 몇 장을 상균에게 건넨다. 상균은 한사코 그것을 거절한다. 하지만 주인은 고마움의 표시라며 결국 그의 손에 몇만 원을 쥐어준다. 상균은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상균은 그 돈에다 자기의 돈을 더 보태 만년필 스무 자루를 산다. 그리고 그것을 극장의 전 직원에게 돌린다.


상균이 광주극장에 있는 동안 첫째 딸 진희가 태어났다. 사실 이 사건은 애순과 결혼식을 올리기 전의 일이었다. 진희가 태어나고 삼 년 후엔 둘째 딸 연희가 세상에 나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애순은 연희를 포대기에 싸서 앞으로 멘 뒤, 진희의 손을 잡고 광주극장에 가곤 했다. 어린 진희는 일인용의 자리에 어엿하게 앉아 영화에 곧잘 집중했고, 애순의 품에 안긴 연희는 아무리 !부릉부릉부릉 탕탕! 하는 시끄러운 액션 영화라 할지라도 쌔근쌔근 잘만 잤다.


진희는 매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영화가 좋기도 했지만, 일하고 있는 상균을 만나러 가는 것이 더 좋았다. 상균의 직업은 출퇴근이 들쑥날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심야상영을 마치고 퇴근을 하면 진희는 자고 있었고, 진희가 잠에서 깰 즈음 상균은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때가 많았다. 애순과 진희, 연희는 극장에 도착하면 곧바로 영사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늘 상균이 있었다. 커다란 필름이 영사기 안에서 민첩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영사기가 내는 소음 속에서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영화 시작 시간이 임박하면 상균은 상영관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고, 애순과 진희는 어둠 속으로 입장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예고편을 보고 있으면 상균은 진희가 앉아있는 자리로 와, 종이컵에 담긴 민트맛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었다. 연두색도 초록색도 아닌 색에 한 숟가락 떠 넣으면 입 안이 화-해지는 개운한 아이스크림. 이게 바로 진희가 극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였다. 어둡고 넓은 상영관에서 매번 애순과 진희가 앉은 자리를 상균이 어떻게 찾아내는지, 진희는 늘 그게 궁금했다. 그러다 곧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른 세계 어디로든 넘어갈 수 있는 터널엔 상균이 있었던 셈이다.


어느덧 진희는 애순 없이도 극장에 갈 수 있는 초등학생이 됐다. 친구들의 손을 잡고 극장에 도착해 상균과 인사를 나누고 해리포터가 있는 세계로, 또는 절대반지가 있는 세계로 떠났다. 정작 광주극장에서 상균과 진희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거의 15년이 지나 알게 된 일이다.


진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멀티플렉스 상영관이라는 것이 생긴다. 큰 자본을 업고 네다섯 편의 각기 다른 영화를 동시간에 보여줄 수 있는 여러 상영관을 가진 신식 극장들이었다. 이전에 없던 건물이 떡하니 새로 생기기도 했고, 오래된 단관이 멀티플렉스 형태로 변하기도 했다. 동시에 상균의 일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아날로그 형태의 필름 대신 디지털 파일로 영화를 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써 영사기에 필름을 걸어 영화를 재생하는 상균의 노하우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새롭게 변한 방식에 상균은 적응해보려 한다. 한편 그의 생활패턴은 그대로다. 여전히 어떤 날은 아침에 출근하고 어떤 날은 아침에 퇴근한다. 당시 한참 잘 나가던 OO시네마로의 이직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는 거절하고 원래의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상균에겐 더 많은 월급보다 지금껏 관계를 맺어온 사람과의 의리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의 부탁으로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인 목포의 극장에서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 결국 그 회사의 부도로 상균은 영사실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이후로 상균은 어떤 일이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한다. 당시의 상균에게 중요한 건 네 명의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때부터 진희는 종종 상균의 직업을 모르던 때도 있었다. 


영사실에 앉아있던 시간보다 다른 자리에 앉은 시간이 훨씬 길어져버린 상균. 그는 이제 극장에 거의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진희는 여전히 극장에 간다. 옆자리에 애순이 없고, 등 뒤의 영사실에는 모르는 누군가가 있겠지만 어느 좌석에 앉건 그때를 떠올린다. 한 손엔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영화가 시작되며 챡- 하고 어둠이 가라앉던 순간. 그리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안온함을 느낀다. 민트맛 아이스크림이 없고, 영화에만 집중하고 싶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다.


대학생이 되어 종종 광주에 내려가곤 하는 진희는 그때마다 광주극장에도 간다. 영화를 볼 때도 있고 안 볼 때도 있다. 낡은 복도와 상영관의 붉은 벨벳 좌석, 오래된 화장실 등 대부분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지정 좌석제가 아닌 자유석으로 운영되는 극장이 되었다는 것. 표를 끊고 나면 1층이든 2층이든 원하는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빈자리가 훨씬 많은 극장이 되었지만, 진희는 고심 고심해 앉고 싶은 자리를 선택한다. 아무리 이곳을 많이 온다 할지라도 상균이 앉은 시간만큼을 따라잡을 순 없을 것이다. 오래도록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애순과 진희와 연희를 위해서라면 언제고 자리를 옮겨야 했고 기꺼이 그렇게 한 사람.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그럴 자신이 없다. 그저 가끔씩, 직접 고른 광주극장의 어느 좌석에 앉아 그의 시간들을 아주 조금 가늠해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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