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른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아직 없던 '시어머니'를 둘러싼 온갖 일화가 들려오곤 했는데, 그 이야기는 대부분 거리감이 있거나, 불편하거나, 좋지 않은 관계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혼을 하고 내게 정말 '시어머니'라는 관계가 생겼을 때엔 그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한편 나를 낳아준 엄마는 '엄마'라고 부른다. 사실 시어머니와 친엄마 둘 다 엄마라 부르고 싶지만, 대화를 하며 쉽게 구별하기 위해(?) 시어머니는 '어머니',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첫 만남부터 나의 어머니가 좋았다.
그때 나는 지금의 반려자와 동거 중이었다. 같이 산지도 1년이 더 지났을 즈음, 동거인의 부모님께 처음으로 인사할 겸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처음 보자마자 어머니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웃어주셨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환대받는 기분이 드는 웃음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동거인과 나는 뜨끈한 식당 바닥에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키조개와 소고기를 열심히 구워 내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처음이라 불편할 수밖에 없던 자리였지만, 나는 그 어색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썩 좋았다. 그리고 오바스럽게도 첫 만남에 불과했지만, 앞으로도 이 분들을 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기까지 했다.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뒤로, 어머니는 내게 종종 카톡을 보내왔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카톡 메시지의 길이에 먼저 놀라고, 읽다가는 오늘의 내게 전하는 이야기의 소재와 어휘의 무궁무진함에 깜짝 놀랐다. 어느 날은 어머니 아버지가 살고 있는 산내리에 모란이 피었다는 소식이었고, 길을 걷다 발견한 가을 풍경이기도 했고, 밭에서 캔 호박과 고구마 이야기도 있었다. 바쁘고 정신없는 업무 중에도 나는 어머니가 보낸 카톡과 몇 장의 사진을 보며 어느 풍경으로 훌쩍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다 짬이 날 때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답장을 보냈다.
작년 초, 휴대폰을 바꾼 날이었다. 요즘은 사용하던 기기에서 연락처와 사진, 애플리케이션 등을 그대로 새 휴대폰에 가져오는 동기화가 가능해서 정말 편했다. 거의 예전 그대로 같은 새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카카오톡'에 들어갔다. 알림 창에 떠오른 버튼을 하나 눌러버린 순간... 세상에나 그전의 모든 메시지가 날아가 버렸다. 카카오톡만은 새것이 되어 버린 거다.
'안 돼, 어머니 카톡!!!'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머니와 주고받던 카톡들이었다. 다급히 확인하고 말 것도 없이 카톡창은 야속하게 비어있었다. 헌 휴대폰을 급히 켰다. 다행히 그 전의 메시지들이 남아있었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이전부터의 카톡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둘 사이의 창에는 서로를 위한 편지가 한 통씩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카톡창이라는 말보다 편지함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카톡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가끔은 하고 싶은 말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한다. 나는 요즘 재미있게 읽는 책 사이에 엽서를 끼워 어머니께 보낸다. 종종 집으로 도착하는 반찬 사이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쓴 엽서나 작은 포스트잇이 함께 오기도 한다.
엊그제도 갖가지 반찬 사이에 엽서 하나가 함께 왔다.
(손글씨를 그대로 보는 것보다는 덜하지만 현장감을 위해 원문 그대로 옮겨본다)
사랑 가꿈이
복댕이 진희♡곰돌군!
새벽을 깨운 오늘,
어제와 다른 또 다른 느낌의 하루를 열고 있단다.
이것저것 보낼 것을 정리하다 보니 설렘 가득!
동치미는 약간 짜니까 생수 플러스하세요.
그리구 고추 짱아찌는 옆동네 경종이 아제가 유기농으로 키운 튼실한 고추란다.
고추에 구멍을 뚫어 각종 야채(표고, 대파, 양파, 사과, 간장 등)를 끓여 만들었어.
고추를 어슷 썰어서 참기름과 통깨를 뿌려 먹으면 밥도둑으로 변신!ㅎㅎ
깻잎 짱아찌는 냄비 바닥에 멸치, 표고, 마늘, 양파, 다시마를 깐 후 깻잎을 올려서
참기를 듬뿍 친 후 30정도 다갈 다갈 달인 거란다. 맛나게 묵고!
일신더블하는 일상이 되길 바래.
- 마미가
집으로 퇴근해 엽서를 읽고 있자니 군침이 돌았다.
뜨끈한 밥을 한 가득 푸고,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들을 접시에 담았다.
고추 장아찌에 참기름을 두르고 통깨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콤 새콤한 고추 장아찌는 정말 밥 한술을 더 뜨게 만드는 밥도둑이었고, 아삭하고 시원한 동치미는 언제라도 밥을 새롭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상쾌했다. 깻잎 장아찌를 입에 넣으면 곧 구수하고 짭조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오늘 저녁 반찬들은 맛이 엄청 재밌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어머니의 구체적인 말들은 언제나 내 하루를 살맛 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