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판 바로 옆집에서 살며 경험한 '어의없음'
"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은 ~ 나 꿈을 위한 여행." 이 노래 가사의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다면, 90년대생 밀레니얼세대가 맞다. 그렇다. 나와 그대 모두, 사서 고생할 나이 열혈 청춘 20대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자발적 고생은 정당한가? 본격적으로 내가 서울에서 두 번째 거쳐간 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요즘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은 유튜버지만, 2~3년 전,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은 건물주였다. 살벌한 서울에 살고 있는 청년 중 한 사람으로서 초등학생의 '눈'은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건물주가 아닌 사람은 서럽다. 그리고 슬프다. 건물주가 아닌 부모를 둔 아이들은 건물주가 되겠다고 외친다.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은 건물주.
"우리 아빠는 건물주가 됐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전 궁금해서, "아빠 왜 건물주가 되고 싶어?"라고 물었죠.
아빠는 "아들아 건물주가 되렴. 월세 내는 것이 너무 벅차구나"
"그래서 전,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아빠 같은 사람들이 월세를 내면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요! 그러면,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유명한 유튜버가 될 수 있어요!."
난 집을 선택할 때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는 편이다. 고려하지 않는 이유, 글쎄... 내가 원하는 희망사항을 포함하고 있는 집은 없다. 집에 대한 희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하다. 그래서, 정말 지키고 싶은 필수 조건을 고민한 후, 그 조건에 해당되는 집이 있다면 무조건 계약한다. 당시 내가 지키고 싶었던 조건은 첫 번째도 남향이고, 두 번째도 남향이었다. 북향의 첫 집에서 8개월 정도 살았던 터라, 햇빛이 너무 그리웠다. 햇빛 만큼은 사수해야 했다. 서울의 두 번째 집의 문을 연 첫날. 그냥 좋았다. 채광이 많은 집이라서, 단지 그뿐이었다. 1980년 ~ 90년대 산업발전의 황금기를 맞은 성수동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신혼부부를 위해 만든 주택이라는 것, 그것 따위의 역사는 안 중에도 없었다. 남향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후 나는 참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두 번째 집의 집주인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손해 보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전형적인 2명의 "청소년 자녀"를 둔 가장으로 기억한다. 집주인은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자녀 교육비와 장차 노후자금을 충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형적인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재개발 소식을 듣고, 부랴 부랴 은행 대출을 받아, 내가 살게 된 빌라를 구입한 '전형적인 한국의 중년'이었다.
계단 조차, 청소하는 이 한 명, 없는 집이었고, 집주인조차 집을 돌보지 않는 빌라였다. 평균 급여의 25% ~ 40%를 주거비용으로 지출하면서도, 어찌 된 영문인지 서울은 돼먹은 집이 많았다. 맘 잡고 계단을 쓸어 내려가던 주말. 계단의 묵은 먼지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아뿔싸! 그곳에서 10개월 정도 살았을까? 추위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던 12월. 집 바로 옆에서 공사가 시작됐다. 재개발의 일환이었다. 지하 2층 ~ 지상 11층의 건물을 짓는데, A4 용지 크기의 벽보로 앙증맞게 안내하고 민원이 불길 같이 일어나자 부랴 부랴 공사 책임자가 집 집마다 [비타 500]을 돌리며, 공사로 불편을 줘서 죄송하다.라는 말을 했다. 전지 크기로 대자보를 붙여뒀다면, 1% 정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건물이 휘청거리고, 괭음의 소음이 동네를 애워싸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비타 500'이라니, 문명화된 도시 서울에서 이게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나는 서울을 잘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사대문 안의 대학에 가야했고, 서울에 취업해야 했던, 그래야 한다고, 맹신했던 나에게 A4용지 벽보는 서울에 대한 크나 큰 상실감을 남겼다. 애썰... dammit seoul...
첫 번째 전구가 켜졌을 때
사람은 누구나 '인내'에 대한 임계치가 있다. 소음에 매우 예민했던 나는 점 점 미쳐가고 있었다. 10% 정도 정신줄을 놓았을 때, 인내심의 전구에 불이 하나 켜졌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침착하게 관할 지자체의 담당 주무관에게 전화하여 대단위 공사인데, 이에 대한 후속조치 또는 안전검사 등의 절차가 있는가? 에 대해 문의했다. 돌아오는 대답.
"그런 건 없다." 본 주거민을 1%도 고려하지 않은 대단위의 재개발을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하는 관할 지자체의 성스로운 행보를 보고, 내가 두 발로 서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짧은 통찰 하나를 얻었다.
세월호와 같은 대 참사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두 번째 전구가 켜졌을 때
대단위의 공사판이 연이어 펼쳐지는 나날 속에서 집주인 아저씨는 공사 피해를 구청과 건물을 지어 올리기 시작한 집주인에게 알리기 위해, 동네 어르신들과 군청 문지방이 달도록 열심히 다니셨다. 빌라에 살지도 않았던 집주인 아저씨는 왜 군청에 간 걸까? 그즈음, 동네에는 여러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보상금"으로 기억한다. "보상금"은 누가 받는 거였을까? 집주인이었을까? 세입자였을까?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였을까?
진동과 극심한 소음으로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어르신들이 속출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저녁마다 모여. 동네 구멍가게에서 마른안주와 맥주를 마시며 이런 대화를 하셨다.
"세입자들 어차피 다 나갈 사람들이고 늘그막에 구청 쫓아다니며, 생떼 쓰는 게 보통이 아닌데... 젊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 그러다 보면 이 대화는 다시 흐르고 흘러. 저출산이라는 화두에 도착했다.
요즘 애 키우는 거 힘들다고 안 낳아. 문제야 문제!
나와 비슷한 또래들은 가정을 만들기보다, 자아실현의 삶을 선택했다. 30대 중반에 미루어 왔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 시작한 언니, 오빠들은 서울 근교 신도시에 둥지를 만들며 살아간다.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언니 오빠들을 만나면 사정은 또 달라진다. 아이가 주는 행복도 좋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내 통장은 마이너스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있는 언니들의 고민은 오빠들과 다른 차원을 달리며 무럭 무럭 자라난다. 자녀가 있는 언니들은 "집 대출금은 값아야하는데... 돈은 벌어야 하는데... 경력단절 될 것 같아.. 애들 봐줄 이모님도 구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자발적 자아실현의 삶을 선택하게 만든 걸까?
주민들의 항의로 공사가 1달가량 지였됐고, 건물을 지어 올리다 지연 조치를 당한 집주인은 다시 구청에 항의했다. "지연으로 손실이 몇 억이라고!, 책임지라고!!" "내 땅에 내가 건물 짓겠다는데, 네가 뭔데!!!"
세 번째 전구가 켜졌을 때
공사 진동으로 건물이 심하게 휘청거리는 날이면, 군청 담당 주무관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나의 문의 전화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그리고, 다른 부서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제 관활이 아닙니다. 저희 부서의 책임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도돌이표] 다들 기억하는가? 극심한 공사 진동에 대한 나의 문의 전화는 A부서에서 B부서로, B부서에서 A부서로 그렇게 도돌이, 도돌이를 그렸다. 그들의 답변은 똑같았다. 공사장 입간판에 적혀 있는 관계 부서를 확인해서 전화를 해도 상황은 똑같았다. 표면적으로는 해당 부서의 관활이지만 120% 담당자는 없었다. 담당자가 없으니, 사고가 난다고 해도 책임질 필요 또한 없다. 참 깔끔한 업무처리라고 생각한다.
저한테 문의하지 마세요. 제 담당 아니에요.
지자체 관계 부서의 프로페셔널한 책임회피에 인내심의 마지막 전구가 켜졌다. 그 순간 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곳에서 더 이상 못살겠다.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이걸 집이라고, 세입자를 받으셨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 이후 나는 각구의 노력으로 세입자를 찾으러 다녔다. 새로운 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3월로 기억하는데, 내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집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적은 출력물을 들고, 집 주변 부동산 문을 두드렸다. 부동산을 아주 쥐잡뜻이 눈에 불을 켜고 드나들었다. 부동산 중개인을 직접 만난 눈도장을 찍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 알았다. 부동산이 한 집 건너 한 집에 있다는 것을. 그 해 4월 각구의 노력으로 그곳을 탈출했다. 두 번째 집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집에 대한 가치 하나를 마음속에 품었다. 다음 세대를 쥐어짜 내는 투자는 하지 말자.
아 참 네번째 전구가 켜지기도 했다.
다급하고 절실한 마음에 집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적은 출력물을 들고 부동산에 직접 방문하여, 집을 내 놓았는데, 몇 몇 부동산이 내 전화번호를 그들의 홍보 DM으로 사용한 것 같았다. 수십개의 부동산에 다녀온 이 후 내 휴대폰에는 한 동안, 정체불명의 홍보성 문자가 드문 드문 도착했다.
무료 법률 상담도 받아 본 적이 있는데, 답답한 마음에 상담을 청했던 나에게 법률 상담 변호사의 인상은 안하무인 격으로 말했다.
그냥 계약 끝날때 까지, 좀 참고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