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스타일, 공허한 서사|넷플릭스 영화 <푼돈 도박꾼의 노래>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이름은 이제 하나의 보증수표가 되었습니다. 저는 2018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의 드라마 <패트릭 멜로즈>를 보고 베르거 감독의 팬이 되었는데요. 이 작품 이후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콘클라베>를 통해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동시에 받아온 그는, 현대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거장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죠.
그런 그가 넷플릭스와 손잡고 신작 <푼돈 도박꾼의 노래(Ballad of a Small Player)>를 내놓았을 때, 제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특히 촬영감독 제임스 프렌드, 편집감독 닉 에머슨, 작곡가 폴커 베르텔만 등 그의 전작들을 빛냈던 ‘베르거 사단’이 다시 뭉쳤다는 소식은 이 영화가 또 하나의 미학적 성취가 될 것임을 예고했죠.
영화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매혹적인 표면을 자랑합니다. 마카오의 네온 불빛이 번들거리는 카지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네오 누아르는, 한 남자의 영혼이 잠식당하는 과정을 현란하고 감각적인 스타일로 그려냅니다. 영화는 관객을 최면에 걸린 듯 몽환적이면서도 공허한 마카오의 세계로, 열병에 걸린 꿈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이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성취의 이면에는, 영화의 근본적인 결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영혼 없는 각본입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아들 로완 조페가 쓴 각본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탱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카드의 집과도 같죠.
<푼돈 도박꾼의 노래>는 눈과 귀를 사로잡는 모든 요소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서투르고 성기며 미성숙한 서사, 그리고 동양 문화를 피상적으로 소비하는 관광객의 시선으로 인해 결국 공허한 스타일의 전시로 전락하고 맙니다.
<푼돈 도박꾼의 노래>의 미학적 완성도에 있어선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에드바르트 베르거와 그의 팀은 마카오라는 도시를 단순한 배경이 아닌, 주인공 ‘도일 경(Lord Doyle)’의 내면을 비추는 거대한 심리적 공간으로 재창조했습니다.
제임스 프렌드의 카메라는 눈부신 백색 형광등과 생생한 네온 불빛 아래 마카오를 퇴폐적이고 이질적인 환상의 땅으로 담아냅니다. 유려하게 미끄러지는 트래킹 숏(영화 촬영에서 카메라가 녹화 중인 피사체를 따라 뒤로, 앞으로 또는 이동하는 장면)과 불안정하게 기울어진 앵글은 도박의 메카가 품고 있는 현기증 나는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포착합니다. 이러한 시각적 언어는 90년대 홍콩 영화의 무드를 떠올리게 하며, 관객을 향수 어린 감각의 세계로 이끕니다.
폴커 베르텔만의 음악과 정교한 사운드 디자인은 이러한 분위기를 증폭시킵니다. 베르거 감독은 카드가 섞이는 소리, 가빠지는 심장 박동, 침 삼키는 소리, 그리고 특히 행운의 가죽장갑이 조여지는 미세한 소리에 집중함으로써 관객이 도일의 불안과 희열을 직접 체험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영화는 마치 ‘열병에 걸린 한여름 밤의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질감을 갖게 됩니다.
의상 디자이너 리지 크리스틀의 작업 역시 영화의 혼란스러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도일이 입는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벨벳 재킷과 노란 가죽장갑은 ‘가난한 자가 상상하는 부자의 모습’을 정확히 구현해 내죠. 크리스틀은 도일이 고수하는 전통적인 상류층 유럽 스타일과 전통적인 중국식 실루엣을 혼합해 서양인인 그가 동양이라는 무대 위에서 필사적으로 ‘도일 경’이라는 훔친 역할을 연기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미학적 성취는 지적인 함정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현란한 스타일은 마카오와 그 문화를 한 서양인 주인공의 실존적 위기를 위한 이국적인 무대 장치로 전락시킵니다. 깊은 영적 뿌리를 가진 ‘걸신 축제(Hungry Ghost Festival)’는 영화 속에서 초자연적이고 불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모티프로만 기능할 뿐, 진정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걸신 축제’는 단순히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으스스한 기간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 사상이 융합되어 조상의 넋을 기리고,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자들과의 유대를 확인하는 공동체적 의례입니다. 종이돈을 태워 내세의 부를 기원하고, 음식을 차려 배고픈 영혼을 달래는 행위에는 가족애와 구원이라는 정서가 담겨 있죠.
또한 영화가 핵심 소재로 차용하는 ‘아귀(餓鬼)’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진다는 불교의 ‘아귀도(餓鬼道)’라는 심오한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중독을 넘어, 인간 내면의 욕망과 그로 인한 실존적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입니다.
영화가 이러한 깊이를 탐구하는 대신, 이 축제를 기이하고 낯선 ‘볼거리’로, 아귀를 ‘악마’와 같은 시각적 효과로만 소비하며 동양적 철학과 정서를 피상적인 ‘스타일’로만 활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주인공이 스스로를 칭하는 ‘과일로(gweilo, 귀신같은 이방인)’의 시선을 강화할 뿐입니다.
관객은 영화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통해 도일과 마찬가지로 이 문화의 참여자가 아닌, 외부 관찰자의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 이처럼 영화의 가장 큰 예술적 성취는 역설적으로 가장 큰 철학적 실패의 증거가 됩니다.
영화의 모든 결점은 결국 하나의 근원, 로완 조페의 각본으로 수렴됩니다. 영화는 로렌스 오스본의 2014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각색 과정에서 원작이 품고 있던 심리적 깊이와 철학적 고뇌를 대부분 상실했습니다. 이 영화가 왜 공허하게 느껴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는 원작 소설 속 ‘도일’과 영화 속 ‘도일’이 얼마나 다른 인물인지 비교해 보고 싶었습니다.
소설 속 도일은 훨씬 더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나이 든 과부의 재산을 횡령한 ‘부정한 이득의 죄책감’에 시달리죠. 그에게 도박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의 증거인 돈을 없애기 위한 처절한 자기 형벌’의 과정입니다. 소설에서 그는 “은밀하게 패배를 선호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도박꾼이 아니다”라고 독백할 정도로 ‘승리가 아닌 패배 그 자체’를 탐닉합니다. 그의 도박은 승리를 향한 갈망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려는 도스토옙스키적 욕망에 가깝습니다.
반면, 영화의 각본은 이 핵심적인 동기를 거세합니다. 그리고 도일을 훨씬 평면적인 인물로 축소시켰죠. 영화 속 도일은 산더미 같은 빚과 밀린 호텔 숙박비를 갚고 사기꾼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 ‘대박’을 노리는 ‘전형적인 도박 중독자’에 가깝습니다. ‘자기 파괴의 욕망’이라는 실존적 고뇌는 ‘재정적 파멸의 공포’라는 현실적 문제로 밋밋하게 대체됩니다. 이러한 단순화는 영화에서 감정적 무게를 앗아가 버리죠. 또한, 이야기를 얕고 공허하게 만듭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는 도일의 핵심 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 소설에서 ‘다오밍’은 도일의 자기 파괴 경로를 방해하며 원치 않는 연승을 가져오는, 유령 같은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구원의 길과 재정적 회복을 제공하는 ‘수호천사’이자 ‘연인’처럼 그려집니다.
결국 각본의 실패는 영화의 다른 모든 결함, 즉 연기의 아쉬움과 의미 전달을 위해 초자연적 반전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됩니다. 원작의 풍부한 내적 갈등이 사라진 자리에, 영화는 외부의 자극과 사건들로 서사를 채워 넣을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 결과, 인물의 심리는 얕아지고, 이야기는 방향을 잃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만약 ‘도일 경’을 연기한 배우가 콜린 퍼렐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콜린 퍼렐은 의심할 여지없이 뛰어난 배우입니다. 그는 혼자서 영화 전체를 짊어지고 가며, 스크린을 장악하는 힘도 가지고 있죠. 특히 동정심을 유발하는 ‘어리석고 유약한 남자’, ‘취약하고 겁에 질린 남자’를 연기할 때 콜린 퍼렐 특유의 소년 같은 매력이 분명 있습니다.
문제는 배우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캐릭터에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의 각본은 도일이라는 인물이 ‘무엇(절박한 도박꾼)인가’는 제시하지만, ‘왜(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파괴 욕망)’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퍼렐은 연기의 ‘기술’과는 관계없이 얕게 쓰인 캐릭터의 표면을 연기해야 하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가 아무리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절망적으로 소리쳐도, 그 감정의 근원이 되는 깊은 심리적 동기가 부재하기에 연기는 공허한 제스처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제가 느끼는 연기의 아쉬움은 배우의 실패가 아니라, 배우의 잠재력과 각본의 한계 사이의 안타까운 간극 때문입니다. 다른 배우가 이 역할을 맡았더라도 비슷한 한계에 직면했을지 모르죠.
이는 조연 배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오밍’ 역의 팔라 첸(진법랍)은 영화의 정서적 애틋함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지만, 그녀의 캐릭터는 원작의 불가사의한 힘을 잃고 도일의 구원을 위한 ‘수호천사’라는 수동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에 머물고 맙니다. 도일을 쫓는 추적자 ‘신시아 블라이트’ 역의 틸다 스윈튼은 특유의 무미건조한 위트로 짧은 등장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녀 역시 서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플롯 장치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죠.
결국 배우들은 원작 소설에 존재했던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이 있는 인물을 연기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연기 ‘기술’은 그 자체로 훌륭하지만, 각본이 살려내지 못한 원작 캐릭터의 유령처럼 겉돌고, 또 떠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의 서사가 내내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반전과 함께 하나의 강력한 주제가 나타납니다. 영화 속에선 도일이 내내 함께 했던 다오밍이 사실은 그를 만난 첫날 세상을 떠난 걸로 밝혀지죠. 하지만 저는 도일 경 역시 다오밍이 죽은 날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이미 죽었고, 영화의 대부분은 그가 지옥에서 겪는 영원한 형벌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힌트는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영화는 ‘지옥’의 본질에 대한 우화를 미리 들려줍니다. 동료 사기꾼이 도일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죠. 한 도박꾼이 죽어 눈을 떠보니 호화로운 카지노입니다. 그는 모든 게임에서 연전연승합니다. 처음에는 천국이라 생각했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승리에 질린 그는 옆 사람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옥에 갈 줄 알았는데.” 그러자 옆 사람이 대답합니다. “여기가 바로 그 다른 곳(지옥)이야”라고 말이죠.
도일의 죽음을 암시하는 순간은 영화 속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가장 유력한 시점은 영화 초반, 그가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의 등이 보이고, 화면은 즉시 전환되며, ‘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혹은 식당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연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닐까요?
또한, 그의 경험은 불교의 ‘아귀도’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탐욕에 이끌려 음식과 돈을 탐하지만,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의 기적적인 연승 행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며, 그가 갇힌 연옥, 그 자체입니다.
도일이 이미 죽었다는 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오밍이 이미 죽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카지노 보안팀은 CCTV에서 도일의 어깨에 “유령이 붙어있다”고 말하며 그를 쫓아냅니다. 그리고 도일은 나중에 그녀가 걸신 축제 첫날밤에 이미 익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결정적으로,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해석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다오밍은 ‘유령’이라고 믿으며 그녀는 도일의 삶을 통과하며 그를 인도하고 있다”고 말이죠. ‘인도하는 빛’이라는 뜻의 ‘다오밍’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듯 도일에게 그녀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도박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그 이후 또 다른 도박의 유혹을 ‘거절’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마침내 중독의 ‘순환’을 끊어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상금을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광기가 아닌 영적 해방의 의식을 치르죠.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공물’이자, ‘유령들을 달래는 제의’입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지상에서의 감옥이자 영적인 연옥을 정의했던 물질적 부를 벗어던지고, 다오밍에게 그녀가 생전에 필요했던 것, 즉 빚으로부터의 평화를 사후에나마 선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전은 영화의 구조적 불균형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 속에 죄책감, 지옥, 구원과 같은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다오밍의 죽음에 대한 설명과 초자연적 반전이라는 외부적 장치를 통해 부랴부랴 주제를 주입하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서사적 취약성과 모호함은 도일이 영화 내내 반복하던 “저녁 먹고 춤이나 추자”라는 대사와 영화의 마지막 타이틀이 끝난 뒤 등장하는 쿠키 영상을 통해 절정에 달합니다.
영화 속에서 이 대사는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이자 ‘아귀’처럼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쿠키 영상에서 이 갈망을 가장 공허하고 냉소적인 방식으로 성취시킵니다. 도일은 마침내 춤을 추지만, 그 상대는 구원의 인도자였던 다오밍이 아니라, 그의 과거이자 ‘죄’를 상징하는 추적자 신시아입니다.
이는 영화가 초반에 펼쳐낸 ‘영원한 승리의 지옥’이 말 그대로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도일은 ‘춤’이라는 승리를 얻었지만, 그것은 구원과는 무관한 ‘텅 빈 승리’ 일뿐입니다. 현실의 무대와 완전히 분리된 채 초현실적인 춤을 추는 두 명의 ‘과일로’의 모습은 이 지옥의 공허함을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쿠키 영상이 도일의 새로운 시작과 앞으로의 삶의 축하를 의미하는 희망적인 결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도일이 죽지 않고 중독이라는 ‘상징적 지옥’에서 벗어나 구원받았다는 해석을 뒷받침하죠.
결국 이 쿠키 영상은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동시에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영화의 연출은 문자 그대로의 ‘연옥’이라는 비극을 암시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상징적인 ‘구원’이라는 희극을 말합니다. 이 둘의 충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끝내 서사적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푼돈 도박꾼의 노래>는 공개 이후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극명하게 엇갈리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영화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는 60%대의 평점을, 메타크리틱에서는 50점대의 점수를 기록하며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작품이 되었죠. 이러한 평가는 영화의 강점과 약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콜린 퍼렐의 연기에 대해서는 이견 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대담하고 매력적”이며 “커리어의 정점”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가 “영화의 고르지 못한 무게를 강렬함과 취약함으로 지탱한다”는 분석이 대부분입니다.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스타일리시하고 환각적인 연출과 기술적 성취” 역시 호평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판이 시작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영화가 “화려한 매력에 걸맞은 감정적 깊이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공허하고 천박하다”는 혹평까지 내렸죠. 감독이 스타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서사의 감정적 핵심을 놓쳤고, 틸다 스윈튼과 같은 유능한 배우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베르거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되며 더욱 두드러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콘클라베>의 성공 이후, <푼돈 도박꾼의 노래>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다소 과감한 시도이자 이질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일부 관객들은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의 <온리 갓 포기브스>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컬트 영화에 비유하며,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스카 시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입니다.
결론적으로 <푼돈 도박꾼의 노래>는 엄청난 기술적 기교가 속이 텅 빈 서사로 인해 좌절되는 영화입니다. 베르거 감독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는 거장의 솜씨를 보여주지만, 의미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하며, 스타일을 실체로 착각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영화는 스스로 ‘과일로(Gweilo)’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영화 자체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은유입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설정한 배경 속에서 ‘유령 같은 이방인’처럼 겉돕니다. 외부에서 동양 문화를 관찰하고 미학적으로 탐닉할 뿐,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거주하지 못하죠. 이는 서양인의 시선으로 동양적 무드를 피상적으로 다루었다는 비판으로 다시 한번 이어집니다.
영화는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영국인의 미련 가득한 향수’를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몰락한 영국 귀족 행세를 하는 남자가 신비롭고 위험한 동양의 도시에서 구원을 찾는다는 설정은, 저에겐 일종의 탈식민주의적 판타지로 읽혔습니다.
여기서 탈식민주의적 판타지란, 과거 식민 제국(영국)이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현재에도, 그 구성원(도일)이 여전히 동양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으로 군림하며 자신의 실존적 구원을 이룬다는 서사를 의미합니다. 즉, 마카오라는 공간은 주체적인 현실로 그려지기보다 서양인 주인공의 영적 성장을 위한 이국적인 배경으로만 소비되는 것이죠.
영화의 배경은 단순히 마카오가 아니라, 마카오에 대한 서구의 낭만화된 환상 그 자체입니다. 이 영화는 철저히 서양인들이 가진 동양, 특히 90년대 홍콩 영화에 대한 판타지를 좇습니다. 네온사인과 비에 젖은 거리, 고독한 주인공과 비운의 동양 여성과의 운명적 만남이라는 익숙한 클리셰를 화려하게 전시하지만, 그 내면을 채우는 인물의 고뇌나 관계의 밀도는 너무도 얕습니다. 결국 <푼돈 도박꾼의 노래>는 내밀하고 밀도 있게 그 안을 채우지 못한 채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쌓아 올린 화려한 모래성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