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적 허무주의에 건배를
이 말은 10년 가까이 한국을 떠나 해외를 떠돌며 내가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뼈아프게 뱉어낸 농담이자 비명이었다.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서구 문명에 대한 사대주의라 비웃을지 모르겠다. 혹은 남성의 권력을 탐하는 여성의 질투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태국의 외딴섬 꼬따오, 그들이 ‘파라다이스’라 부르는 이곳의 심해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그런 납작한 욕망이 아니었다. 내가 갈망한 것은 그들의 부나 외모가 아니라,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고 있는 ‘설명할 필요 없는 삶’이라는 절대 반지였다.
지구상에서 ‘백인 남성’이라는 존재는 일종의 ‘디폴트’ 값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어딜 가나 그 사회의 표준이며,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과장되게 웃을 필요도, “나는 너희의 일자리를 뺏으러 온 게 아니야”라고 온몸으로 웅변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호텔의 영원한 투숙객인 반면, 나와 같은 유색인종 여성은 그 호텔의 구석진 곳에 놓인, 성능 좋지만 말대꾸는 하면 안 되는 ‘키오스크’ 취급을 받는다. 이것이 내가 파라다이스의 에메랄드빛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짠내 나는 진실이었다.
내가 다이빙 강사 생활을 하던 태국의 외딴 작은 섬에서 나는 수많은 ‘데드 멕시칸’을 보았다. 물론 진짜 시체가 아니다. 스쿠버 다이빙 입문 코스에서 뒤로 입수하는 자세를 두고, 서구권 강사들이 낄낄거리며 부르는 은어다. 다이버가 뒤로 떨어지며 입수할 때 누군가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죽은 멕시칸처럼 떨어진다”며 웃어재끼는 그들의 농담 속에서, 국경을 넘다 죽어간 수많은 이민자의 피 냄새는 완벽하게 표백된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의 역사는 그저 지루한 교육 시간의 양념 같은 유희일 뿐이다. 나는 내 교육생들에게 절대 그 용어를 쓰지 않는다. 그것은 다이빙 스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 즉 ‘물속에서도 짐승이 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순적이다.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18달러짜리 타코를 씹으며 “나는 다양성을 존중해”라고 말하는 문화적 허영심을 즐기지만, 정작 그 타코를 만든 멕시칸의 거친 손이나 정치적 목소리는 혐오한다. 그들은 문화를 소비하고 싶을 뿐, 그 문화의 주인인 ‘사람’과 이웃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해버린 세상. 그들은 껍데기만 취하고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리고 그 쓰레기통 안에는 언제나 ‘나’와 같은 이방인들이 들어 있다.
팬데믹이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 나는 멕시코에 갇혔다. 하늘길이 막힌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뼈저린 ‘안전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태국에서 알게 된 애틀랜타 출신의 미국 백인 친구는 멕시코 여행을 많이 해봤다며 내가 머무는 숙소를 물었다. 내가 답하자, 그는 “오, 좋은 데 구했네(Oh, fancy~)”라며 비아냥거렸다. 자신이 지냈던 싼 숙소를 놔두고 왜 돈 지랄을 하냐는 투였다. 그 순간, 내 안의 뇌관이 터졌다.
그에게 ‘싼 숙소’는 힙한 로컬 체험이자 절약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싼 숙소는 마약을 하는 이웃에 노출되고, 비가 오면 방까지 물이 차오르며, 길을 걸으면 “치나! 치나!(China!)”라는 위협적인 고함이 날아드는 공포의 현장이었다. 이미 싼 숙소에서 지내봤던 나는 그 모든 것을 이미 경험했다.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
“나에게 ‘팬시’하다는 건 사치가 아니라 ‘안전’이라는 뜻이야. 잠들 때 누군가 나를 강간하거나 죽이러 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권리라고. 네가 매일 밤 공기처럼 누리는 그 당연한 권리를, 나는 비싼 돈을 주고 사야만 한다고!”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무지함은 악의가 아니라, ‘상상력의 부재’에서 온다. 평생 단 한 번도 사냥감이 되어본 적 없는 포식자는 초식동물이 느끼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공포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얼마 후, 애틀랜타에서 백인 남성이 마사지 숍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해 여덟 명을 죽였다. 그중 여섯이 아시아 여성이었다. 미국 경찰은 그가 “성 중독에 시달리다 운수 나쁜 날을 보냈을 뿐”이라고 발표했다. 하, 운수 나쁜 날이라니. 만약 범인이 무슬림이나 흑인이었다면 즉시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었을 것이다. 백인 남성은 살인을 저질러도 ‘개인의 서사’를 부여받고 이해받을 기회를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의 정점이다.
그들은 동양인 여성을 ‘순종적인 서비스 제공자’ 아니면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라는 두 가지 프레임으로만 소비한다. 그러다 그 대상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거나(혹은 유혹한다고 착각하거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느끼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은 명백한 ‘젠더 기반 인종 혐오 범죄’였지만, 세상은 그를 불쌍한 정신병 환자로 둔갑시켰다.
나는 멕시코의 숙소 문을 걸어 잠그며 생각했다. 백인들이 흑인 음악(힙합)을 즐기고 K-푸드에 열광하면서도, 정작 흑인의 목숨(BLM)이나 아시안의 안전에는 침묵하는 이 거대한 위선을. 그들은 우리의 ‘노동’과 ‘문화’라는 과즙만 빨아먹고, 껍질은 뱉어버리길 원한다. 우리는 그들의 편리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투명한 유령, 혹은 말 없는 키오스크여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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