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정의가 하나의 회로에서 흐르는 ‘압축 사회’의 역설
칼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서울 주요 상권에는 어김없이 패딩 점퍼에 몸을 파묻은 사람들의 긴 행렬이 늘어서 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에는 ‘재고 있음’이라는 초록색 알림이, 뇌리에는 ‘두쫀쿠(두바이 초콜릿+쫀득이+쿠키)’라는 기묘한 혼종 디저트가 각인되어 있다. 누군가는 혀를 찬다. "고작 과자 하나에 저런 정성을 쏟다니." 하지만 이 장면을 단순히 ‘요즘 애들의 유난스러운 식탐’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거대한 엔진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의 핵심은 ‘전염의 속도’에 있다. 하나의 기호가 발생한 순간, 그것은 어떠한 논리적 비판이나 취향의 거부감 없이 순식간에 사회 전체로 번져나간다. 마치 특정 온도에서 저항이 사라지고 전류가 폭발적으로 흐르는 물리 현상처럼, 한국 사회는 유행과 정보가 마찰 없이 흐르는 하나의 거대한 전도체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시감을 이미 수없이 반복해 왔다. 겨울이면 전 국민이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색 롱패딩으로 온몸을 감싸 ‘김밥말이’가 되고, 만나는 사람마다 혈액형 대신 MBTI 네 글자로 자신과 상대를 규정한다. 위스키 한 병을 사기 위해 마트 셔터가 올라가기도 전에 질주하던 ‘오픈런’, 그리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아파트를 사들이던 ‘영끌’의 광풍까지. 대상은 패션에서 부동산으로, 디저트에서 재테크로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쓰지만, 그 본질적인 작동 방식은 소름 끼치도록 동일하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전도체 사회’이다. 물리학에서 초전도 현상이란 특정 온도 이하에서 전기 저항이 ‘0’이 되어 전류가 손실 없이 무한히 흐르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 사회가 바로 그렇다. 정보와 유행, 감정과 분노라는 전류가 5천만 명의 인구 사이를 흐를 때, 그 어떤 사회적, 문화적 저항값도 발생하지 않는다. 누군가 스위치를 켜는 순간, 그 신호는 순식간에 임계점을 넘어 사회 전체로 동기화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을 저항 제로의 사회로 만들었는가? 서구 사회가 개인주의와 다양성이라는 ‘저항값’을 통해 유행의 전파 속도를 늦추는 동안, 한국은 어떻게 저항 제로의 사회가 되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특유의 지리적, 기술적, 그리고 심리적 요인이 결합된 독특한 사회 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첫째, 물리적 과밀과 디지털 초연결의 결합이다. 한국은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밀집해 사는 고밀도 사회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망과 스마트폰 보급률이 더해졌다. 사회학자 마뉴엘 카스텔이 말한 ‘네트워크 사회’가 한국에서는 물리적 근접성과 결합하며 폭발적인 시너지를 낸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도 서로의 어깨를 부대끼며 살아가고, 디지털 공간에서도 실시간으로 서로의 밥상을 들여다본다. 이 이중의 연결망은 정보의 전파 속도를 빛의 속도로 가속화시켰다.
둘째,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이 극대화된 구조다. 지라르는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욕망’은 개인의 내밀한 취향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다. 남들이 다 입는 롱패딩을 입지 않았을 때, 남들이 다 아는 유행어를 모를 때 느끼는 공포는 단순한 소외감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공포다. 이 강력한 동조 압력이 사회적 저항을 제거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셋째, ‘압축적 근대성’이 낳은 속도전이다. 장경섭 교수가 지적했듯 한국은 서구가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근대화를 불과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늦으면 죽는다”는 생존 법칙이 사회적 DNA로 각인되었다. 유행에 뒤처지는 것은 곧 정보 도태를 의미했고, 부동산 막차를 놓치는 것은 계층 하락을 의미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새로운 신호가 감지되면 검증하고 숙고하기보다, 일단 대세에 합류하는 ‘동조의 전략’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초전도체적 특성은 비단 소비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서적 반응 체계까지 지배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빠르고, 예민하며, 즉각적인가? 그 기원을 찾으려면 한국의 현대사가 겪어낸 ‘압축된 시간’의 트라우마를 해부해야 한다.
전쟁의 폐허와 군사 독재의 야만 속에서 시스템은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으며, 합리적인 절차를 기다리는 자는 굶어 죽거나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 사회’의 징후는 한국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인 ‘각자도생’으로 나타났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촉’을 발달시켰다.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K-콘텐츠의 흥행 코드인 ‘사이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더 글로리>의 사적 제재나 <모범택시>의 무자비한 응징은 법치주의의 관점에서는 위험천만한 발상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지지부진한 시스템을 우회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우리는 서사가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한다. 갈등은 빠르게 점화되어야 하고, 해결은 단호하고 폭발적이어야 한다. 편의점의 오픈런과 드라마 속의 사적 복수는 본질적으로 같은 욕망을 공유한다. ‘기다림’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지금 당장’ 결과를 손에 쥐어야 한다는 강박. 이것은 한국 사회가 치러낸 압축 성장의 청구서이자 후유증이다.
이러한 ‘즉각적 동기화’와 ‘압축된 행동 양식’이 가장 숭고한 형태로,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이 바로 지난 2024년 12월 3일의 밤이었다. 계엄령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한국 사회는 전 세계 정치학자들의 예상을 뒤엎는 놀라운 탄성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에너지는 단 하룻밤의 기적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는 위기와 불의, 그리고 타인의 선행에 반응하는 독특한 ‘선한 초전도성’이 흐르고 있다.
스마트 몹과 역사적 프로토콜의 소환
에밀 뒤르켐은 공동체의 결속이 강화되는 순간 발생하는 격렬한 에너지를 ‘집합적 열광’이라고 불렀다. 12.3의 밤에 발현된 에너지는 이 개념의 디지털 진화 버전이었다. 고도의 네트워크로 무장한 지성적 군중, 즉 ‘스마트 몹’이 역사적 본능과 결합한 것이다.
그날 밤, 시민들은 합리적 선택 이론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다. “지금 나가는 것이 내 신변에 안전한가?”라는 질문은 생략되었다. 대신 한국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된 ‘항쟁의 데이터베이스’가 즉각 로딩되었다. 4.19의 피, 5.18의 눈물, 6.10의 함성, 그리고 2016년의 촛불까지. 한국인에게는 국가 시스템이 오작동할 때 즉시 광장으로 모여 리셋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역사적 프로토콜’이 내재되어 있다.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파된 국회의 상황은 편의점의 재고 알림보다 더 강력한 전압으로 5천만 명의 신경망을 타격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조건반사’였다. 탱크를 막아서고 담장을 넘는 행위는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대로 두면 공동체가 붕괴된다”는 집단 지성의 직관적 방어기제였다. 편의점 오픈런을 만들어내던 그 ‘저항 없는 전도율’이, 이번에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전환된 것이다.
‘돈쭐’ 문화와 도로 위의 모세: 공감이 흐르는 고속도로
이러한 초전도 현상은 비단 정치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소비 문화인 ‘돈쭐(돈으로 혼쭐을 내다)’ 현상은 이 에너지가 도덕적 연대로 흐르는 흥미로운 사례다.
결식아동에게 공짜로 밥을 준 식당 주인의 사연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순간을 상상해 보자. 이 정보는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사람들은 ‘두쫀쿠’를 사러 갈 때와 똑같은 속도로 그 식당에 주문 폭탄을 투하한다. 심지어 음식을 받지도 않고 결제만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탕진’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이것은 ‘정의로운 소비의 동기화’다. 타인의 선행에 감동받은 대중이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즉각적인 보상 행동으로 옮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감정이 저항 없이 흐르는 초전도체 사회의 긍정적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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