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남성 카르텔과 붕괴된 정의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그들이 설계한 ‘독성 사회 실험’의 실험체가 되었다

by 조하나



'실수'라는 이름의 테러


2026년의 시작과 함께, 미국 법무부(DOJ)는 전 세계를 향해 믿기 힘든 '쇼'를 생중계했다. 소위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안'에 따라 300만 페이지에 달하는 수사 기록이 공개된 순간, 우리는 정의의 실현이 아닌 참혹한 붕괴를 목격했다.


대중이 그토록 기다렸던 가해자들, 즉 엡스타인의 섬을 드나들며 미성년자를 탐했던 고위층 ‘고객’들의 이름은 ‘수사 기밀’과 ‘변호사 특권’이라는 두꺼운 법적 보호막 뒤에 새카맣게 지워져 있었다. 반면, 그 보호막이 걷힌 자리에는 끔찍하게도 피해자들의 실명과 집 주소, 전화번호, 심지어 미성년자 시절의 나체 사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법무부는 이를 두고 “기술적, 인적 실수”라고 변명했다. 전체 파일의 극히 일부에서 발생한 오류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권력자들의 비밀을 가리는 데는 수백 명의 변호사가 현미경처럼 검열을 거쳤으면서, 힘없는 여성들의 인생이 걸린 정보는 ‘실수’로 흘려버렸다는 사실을. 이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다. 피해자는 발가벗겨 전시하고 가해자는 철저히 보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세계를 지배하는 ‘백인 남성 카르텔’의 본질이자, 그들이 설계한 시스템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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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스타인의 ‘섬’은 어디에나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화장실을 분리하고, 교육을 제한하고,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 격리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짐 크로우 법으로 대표되는 이 야만의 역사는 흑인을 ‘격리해야 할 위험 요소’로 규정했다. 그러나 21세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정반대의 현상이다. 격리되어야 할 흉악한 범죄자 집단, 즉 ‘백인 남성 기득권’은 오히려 사회의 가장 높은 곳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은 개인의 성범죄 일탈이 아니다. 지난 수백 년간 서구 제국주의가 자행해 온 약탈적 구조의 축소판이다. 15세기 이래, 서구 세력은 무력을 앞세워 비서구권을 침략하고 식민화했다. 그들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자원을 약탈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부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만의 법과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시스템 안에서 여성, 특히 유색인종 여성은 인격체가 아닌 ‘자원’이나 ‘소모품’으로 취급되었다.


엡스타인의 법원 기록에 등장하는 증언, “16세가 되자 너무 늙어서 교체해야겠다고 말했다”는 구절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이는 제국주의적 착취의 전형적인 문법으로, 과거 일제 강점기 식민지의 가난한 소녀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 성 노예로 착취하고 병들면 폐기했던 ‘위안부’ 시스템과 그 구조적 궤를 같이한다. 대상을 인간이 아닌 소모 가능한 ‘물질’로 규정하는 이 약탈적 논리는, 튀르키예나 아시아 등지에서 영어를 못하는 소녀들만 골라 ‘수입’하고 소비한 엡스타인의 행태 속에서 현대판 제국주의의 형태로 부활했다.


그들에게 여성과 아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필요할 때 쓰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덮거나 폐기할 수 있는 물건일 뿐이다. 엡스타인 리스트에 오른 그 수많은 유력 인사들이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기저에는, 바로 이 ‘약탈자’로서의 역사적 DNA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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