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에게 볼펜 한 자루 쥐어주자
12.3 내란이 휩쓸고 간 자리는 처참했다. 화려한 취임식은커녕, 인수위조차 꾸리지 못한 채 들어선 '국민주권정부'의 시작은 폐허나 다름없는 대통령실이었다. 볼펜 한 자루, 종이 한 장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그 황량한 집무실에서 이재명 정부는 닻을 올렸다.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그 환호 뒤에는 살얼음판 같은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정권 교체 후 반년이 훌쩍 지났다. 통상적으로 이 시기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행정부의 추진력과 권력이 정점에 달하는 골든타임이다. 구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다져야 할 천금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 그 금쪽같은 시간은 안타깝게 낭비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증발'되고 있다.
170석에 달하는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철저히 고립무원이다.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려 해도 당 지도부는 묵묵부답이거나, 기계적인 절차를 핑계로 하세월을 보낸다. 대통령은 자정이 넘은 시각,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집무실 불을 밝히며 "법안 통과 속도가 너무 느려 정책 추진이 어렵다"라고 답답함을 호소한다.
이 상황은 진영을 넘어 보수 인사가 이미 예견한 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보수 논객 정규재 주필은 작년 이재명 정부 출범 두 달이 지난 시점에 "이재명 정부의 최대 리스크는 야당이 아니라 바로 민주당"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대통령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통합'과 '실용'을 외치며 앞서 나가려 하는데, 정작 여당인 민주당은 그 속도와 방향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 채 뒤에서 대통령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수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이 기막힌 '내부의 엇박자'가, 정작 민주당 지도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결국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한다. 그가 믿을 것은 오직 '국민'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론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민에게 보고하고, 기득권의 저항을 고발한다. 혹자는 "대통령이 체신머리 없이 SNS 정치를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일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기득권 언론의 85%가 뉴딜 정책을 '사회주의'라 공격하고 왜곡하던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의회마저 등을 돌렸을 때, 그는 언론을 건너뛰고 직접 라디오 마이크를 잡았다.
그 유명한 '노변담화'는 단순한 소통이 아니었다. 그는 금융 위기로 은행이 붕괴 직전에 몰렸을 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며 은행 시스템의 원리를 직접 설명하고 국민을 설득했다. 대통령이 '직거래'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자, 요지부동이던 의회와 적대적이던 언론도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이 마비되었을 때 리더가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라 기득권의 포위를 뚫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생존 전술이었다.
지금 이재명 대통령의 소셜미디어는 21세기판 노변담화다. 거대 여당이라는 중간 유통 단계가 썩어 기능을 상실했기에,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처절한 직거래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왜 압도적 의석을 가진 여당은 자당 출신 대통령의 손발을 묶고 있는가. 한국 정치의 뿌리 깊은 '엘리트 카르텔'과 '상징의 정치'에서 우리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주 진영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상징'에 취해 있었다. 문재인, 조국, 유시민으로 대표되는 소위 '86세대 엘리트'들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자본을 독점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판매했다. 그들은 늘 고상했고, 품위 있었으며, 말이 유려했다.
하지만 막스 베버가 그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지적했듯, 정치인에게는 두 가지 윤리가 있다. 하나는 행위의 순수성만을 강조하는 '신념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책임 윤리'다.
불행히도 우리의 구세대 엘리트들은 철저히 '신념 윤리'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의도는 선했다"고 항변한다. 부동산 정책이 실패해 서민이 고통받아도, 검찰 개혁이 좌초되어 검찰 독재를 불러와도 그들은 "우리는 옳았으나, 세상이 따라주지 않았다"며 정신 승리했다. 대통령은 그저 고상한 '상징'으로 존재하면 되고, 궂은일은 참모나 소위 '문고리'들이 처리하는(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이권을 챙기는) 구조. 그것이 그들이 만든 정치 문법이었다.
하지만 이재명은 달랐다. 그는 빽도, 학벌도, 인맥도 없는 변방의 비주류였다. 그에게는 '상징'이 없었기에 오직 '실력'으로 증명해야 했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그는 온갖 수모와 방해 공작을 뚫고 행정으로 결과를 만들어냈다. 베버가 말한 '책임 윤리'의 전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욕을 먹더라도,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결국 시민의 삶을 개선해 내는 것.
수많은 역경과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여전히 조국 같은 인물이 대안으로 거론된다는 것은 시민에 대한 모욕이자 조롱이다. 조국 대표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다음 대통령의 최소 커트라인은 이제 이재명의 '실력'과 '행정력'으로 상향 조정되었다는 뜻이다. 정치력과 행정력, 그리고 무엇보다 강인한 맷집 없이는 난세의 리더가 될 수 없다. 만약 조국 대표가 진정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비례대표의 뒷순번이나 민주당 텃밭이라는 온실에 숨을 것이 아니라, 대구 시장 같은 험지에 나가 깨지고 부딪히며 진정한 정치인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 엘리트들은 이재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그 밑바닥에는 짙은 '자격지심'과 '질투'가 깔려 있다. 평생을 명문대, 유학, 교수, 장관이라는 꽃길만 걸어온 그들에게, 흙수저 출신이 실력 하나로 자신들의 머리 꼭대기에 섰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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