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힙한 K-팝 아이돌이 수천만 원짜리 명품을 휘감고 조명 아래서 춤을 추면 그것은 '자본의 미학'으로 추앙받는다. 반면, 인도네시아의 아이돌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푸른 논밭을 배경으로 춤을 추면 그것은 순식간에 '촌스러운 쌀농사'로 전락한다. 2026년 2월,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명해 낸 이 기괴하고도 폭력적인 미적 기준은 지금 전 세계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밥 한번 먹자"가 가장 따뜻한 안부 인사가 되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밥심'의 나라다. 쌀은 단순한 탄수화물 덩어리가 아니다. 지난 수천 년간 우리네 어머니들의 한과 눈물, 그리고 민족의 생명을 지탱해 온 신성한 주식이자 영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신성한 곡물이 혐오의 무기가 되어 국경을 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1월 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밴드 데이식스의 콘서트 현장이었다. 카메라 반입 등 현장 규정을 두고 현지 팬들과 한국 팬들 사이에서 벌어진 실랑이는 곧 온라인상의 거대한 문화 전쟁으로 번졌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한국 팬들이 동남아시아 팬들을 향해 뱉어낸 말들은 귀를 의심케 한다. "너희는 자체적인 문화가 없어 우리 것에 기생하는 주제에 말이 많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말레이시아 현지 팬들에 인도네시아 팬들이 가세했다. 인도네시아 팬들이 자국의 인도네시아 걸그룹 'No Na(노나)'도 인기가 많다고 하자 한국 네티즌들은 노나의 뮤직비디오를 찾아내 그 배경인 발리의 계단식 논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세련되지 못하게 웬 논두렁에서 춤을 추냐", "역시 쌀농사 문명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 아파트와 빌딩 숲, 아스팔트만을 '문명'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생명을 길러내는 쌀 냄새나는 대지를 '미개함'으로 경멸하게 되었을까. 같은 쌀을 주식으로 삼으면서도 이웃 나라의 논밭을 보며 침을 뱉는 이 기이한 '자기혐오'와 '동족 혐오'의 심리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이에 격분한 동남아시아 국가의 모든 누리꾼들은 지금 스스로를 '#SEAblings(South East Asian Siblings, 동남아시아의 형제자매들)'라 칭하며 한국의 문화적 폭력에 맞서 연대하고 있다. #SouthKoreaRacist(한국인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해시태그는 현재 소셜미디어 X의 트렌드 1위를 기록 중이다.
이것을 단순히 철없는 일부 네티즌들의 일탈쯤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신화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한국 사회의 병리적인 내면이, K-컬처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뚫고 터져 나온 날카로운 비명이다. 우리가 먹는 밥그릇을 우리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꼴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직시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은 아시아의 '트럼프 미국'과 판박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미국 우선주의'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부자이고 강하다. 꼬우면 너희도 부자가 돼라"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우월감, 그리고 가난한 이민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가 깔려 있다. 놀랍게도 지금 한국의 악플러들이 동남아시아 친구들에게 던지는 공격의 논리가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가진 고유한 역사나 문화적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는 오로지 하나, '숫자'다. "너희 나라 1인당 GDP가 얼마냐", "우리나라가 만든 삼성 스마트폰을 쓰면서 감히 한국을 욕하냐."
이 지독한 '돈타령'은 우연이 아니다. 국제적인 여론조사기관의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국 중 '물질적 행복(돈)'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꼽은 비율이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한 나라다. 타인에 대한 신뢰나 관용 대신 통장 잔고를 인생의 성적표로 삼는 사회, 우리는 스스로 '물질만능주의의 괴물'이 되었음을 통계로 증명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러한 현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나의 성공은 오로지 나의 노력 덕분"이라는 '능력주의'의 신화에 빠진 승자들은, 패자들의 가난을 "노력하지 않은 게으름의 대가"라고 조롱하며 자신의 오만함을 정당화한다.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를 향해 "돈도 없는 것들이"라고 비웃을 때, 그 기저에는 "우리는 노력해서 선진국이 되었으니, 너희를 무시할 자격이 있다"는 뒤틀린 도덕적 우월감이 깔려 있다.
홍콩 출신의 미국 학자 레이 초(Rey Chow)는 저서 <개신교적 인종>에서 이를 '강요된 모방'이라는 개념으로 날카롭게 해부했다. 서구 주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서구 유색인종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백인보다 더 철저하고 지독하게 자본주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가치를 존엄성이 아닌 오로지 '경제적 생산성'으로만 증명해야 하는 노예적 상태를 말한다.
한국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폭력적인 서구의 룰을 생존 본능처럼 뼛속까지 내면화했다. "돈이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트라우마는 "돈이 있으면 무시해도 된다"는 폭력성으로 진화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볼 때 "어떤 사람이냐"를 묻지 않고 "얼마나 버느냐"로 줄을 세운다. GDP가 낮은 국가는 우리에게 인간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그저 '무시해도 되는 시장'이나 '하청 공장'으로 낙인찍힌다.
우리가 동남아시아를 향해 "돈도 없는 것들이"라고 조롱할 때, 우리는 스스로가 영혼을 팔아치운 '자본주의의 괴물'임을 전 세계에 자백하고 있는 셈이다. 돈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나라, 타인의 가치를 통장 잔고로만 평가하는 나라. 이것이 '아시아의 트럼프'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 병리적인 혐오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단단히 박혀 있다. 1990년대, 온 가족이 TV 앞에 둘러앉아 보던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얼굴을 검게 칠한 개그맨들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던 '시커먼스'라는 코너가 있었다. 2000년대에는 가수 이정이 지상파 TV 간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어설픈 한국어로 "싸장님 나빠요"를 외치며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을 흉내 냈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낄낄거렸다. 그것이 풍자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조롱이며,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한국 사회 전체가 인종 감수성에 무지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직접 마주한 외국인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홍대 클럽을 찾는 미군들과 방학을 맞아 입국한 오렌지족 재미 교포들이 전부였다. 그곳은 한국 사회의 '이중적 인종 위계'가 가장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었다. 백인 남성들이 한국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하거나 무례하게 굴 때, 한국 남성들은 침묵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며 영어 한마디라도 더 섞어보려 애썼다. 백인은 우리에게 무의식적인 '선망의 대상'이자 '함부로 할 수 없는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 억눌린 남성성과 패배감의 화살은 가끔씩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동남아시아 남성이 한국 여성과 어울리거나 클럽에 들어오려 하면 한국 남성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조롱하고, 때로는 침을 뱉었다. 강자에게 당한 모멸감을 약자에게 되돌려주는 비겁한 폭력이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엥과 신희 한은 저서 <인종적 우울>에서 이 기이한 심리 상태를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백인 주류 사회에 편입되고 싶지만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는 아시아인은 '애도'되지 못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즉, "나는 백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넘어서야 하는데, 한국인은 그 '백인성'이라는 욕망의 대상을 놓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우울' 상태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점은 이 해결되지 않은 우울과 열등감이 단순히 내면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가 손상된 이들은 자신의 '아시아적 특성(피부색, 신체적 특징, 비서구적 문화)'을 혐오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혐오는 자신보다 약해 보이거나, 자신과 닮았지만 열등하다고 믿고 싶은 대상에게 '투사'되어 끔찍한 공격성으로 폭발한다. 한국인이 동남아시아인의 피부색과 쌀농사 문화를 비하하는 것은, 실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아시아성'을 향해 침을 뱉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이것은 정확히 우리 속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의 사회학적 실사판이다. 여기서 '종로'는 우리가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 서구 백인 사회다. 우리는 할리우드나 유럽의 명품 매장에서, 혹은 국제 회의장에서 은근한 차별과 무시(뺨)를 당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대한 힘 앞에서는 분노조차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다. 대신 그 억눌린 분노를 싸들고 만만한 '한강', 즉 우리보다 경제력이 약한 동남아시아나 이주 노동자들에게 가져와 잔혹하게 쏟아낸다(화풀이). 이것은 강자에게 당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짓밟음으로써 "나도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비겁한 보상 심리다.
이 비겁함은 단순한 인성 문제가 아니다. 브라질의 사회학자 루이 마우루 마리니가 제창한 '하위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이다. 마리니에 따르면, 중심부(미국/유럽)에 경제적·군사적으로 종속된 중간 강국(한국)은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장을 지속하고 중심부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주변부(동남아/아프리카)를 향해 '팽창적이고 약탈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즉, 진짜 제국(서구)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은 그들에게 부를 이전해줘야 하는 '구조적 손실'을 입는다. 그리고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약소국들에게 빨대를 꽂는다. 한국 기업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해 저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고, K-컬처라는 상품을 밀어내며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단순한 진출이 아니다. 중심부(서구)를 위해 지역의 질서를 관리하고 착취를 대행하는 '중간 관리자의 제국주의'다. 한국이 서구에는 '인정'을 구걸하면서도, 동남아시아에는 "우리 덕분에 발전했다"고 거만하게 구는 것은 이 이중적인 착취 구조의 필연적 결과다.
우리는 정확히 '식민지 마름'의 자리에 섰다. 서구(백인)라는 거대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기 위해, 같은 아시아인(소작농)을 더 가혹하게 쥐어짠다. 우리는 K-컬처와 경제 성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서구의 시선으로 이웃을 재단한다. "우리는 너희처럼 게으르지 않아", "우리는 명예 백인이야"라고 외치며, 백인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동시에 형제들의 등짝을 후려치는 것이다. 식민지 마름의 그 비루한 생존 본능이, 100년이 지난 지금 '선진국 시민'이라는 착각 속에 되살아난 것이다.
2014년, 배낭을 메고 찾았던 방콕의 카오산 로드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울려 퍼지고 백인 청년들이 말춤을 추고 있었다. 생경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때까지도 서구인들에게 한국은 '웃긴 춤을 추는 아시아의 변방'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춤을 추고 난 뒤 내게 여전히 물었다. "North or South? 김정은은 정말 미쳤어?" 우리는 그저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문화를 제발 좀 알아달라고 인정 투쟁을 벌이는 절박한 '언더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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