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2026년 2월 11일, 미국 워싱턴 D.C. 하원 법사위원회 청문회장. 방청석에는 제프리 엡스타인의 성 착취 소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간단했다. 진실, 그리고 정의. 하지만 팸 본디 법무장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나 진상 규명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존자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목청을 높였다.
"지금 다우 지수가 5만 포인트가 넘었고, S&P는 7천에 육박하며 나스닥은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바로 미국인들의 퇴직연금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알던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국가의 녹을 먹는 최고 법 집행관이, 가장 처참한 인권 유린의 현장 앞에서 '주가'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었다. "돈이 도덕을 덮을 수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가 미국의 공식 통치 철학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설파하는 장면이었다.
"단지 존재할 권리 외에는 당신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가장 작고 가장 취약한 공동체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보다 더 비열하고, 옹졸하며, 한심한 짓은 없다." 2025년 초 배우 페드로 파스칼이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 트랜스젠더 정책'과 혐오 세력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미국은 늘 세계에서 가장 힘센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온갖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들을 통해 '정의와 구원'을 자처했으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미국 스스로 지어낸 환상임을 안다. 이제 미국은 그 힘으로 약자를 조롱하고 괴롭히며 자국민마저 공격하며, 스스로 만든 환상과 모순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2026년의 미국은 더 이상 '정의와 기회의 땅'이 아니다. 엡스타인 파일 추가 공개가 2주가 다 되어가지만, 유력 인사들의 이름은 '수사 보안'이라는 핑계로 가려졌고, 피해자의 고통은 경제 호황이라는 마약에 취해 잊혔다. 그 와중에 용기를 내어 증언한 생존자들은 보호받기는커녕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도덕적 수치심이라는 사회적 면역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제국, 그것이 오늘날 미국의 민낯이다.
반면, 현재 대한민국은 역사상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코스피 5500선 돌파’라는 전인미답의 경제적 성과가 이를 증명한다.
다우 지수 5만이라는 미국의 표면적 호황과 한국의 주가 상승은 닮은 듯 보이나, 국가 지도자의 ‘공약 이행률’과 실물 경제의 내실을 살펴보면 두 나라의 상황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과거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연속으로 96%대의 압도적인 공약 이행률을 달성했던 이재명 대통령은 국정에서도 그 무서운 실천력을 증명하고 있다.
대선 당시 기득권과 야당으로부터 ‘나라 거덜 내는 포퓰리즘’이라며 맹비난을 받았던 기본소득, 지역화폐 확대, AI 미래 먹거리 육성 및 연금 개혁 정책들은 현재 빈틈없이 실행되며 서민 경제의 버팀목이자 국가 성장의 든든한 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한다면 한다"는 약속을 지키는 리더십 덕분에,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전 세대를 아우르며 유례없이 60% 대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1기(2017~2021년) 당시 공약 이행률은 미국 정치 팩트체크 기관 기준 온전히 지켜진 것이 불과 23~24% 수준이었으며, 절반 이상이 파기되거나 타협에 그쳤다. 2기 집권 1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주식 시장은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이는 대기업과 극부유층의 자산 증식일 뿐이다. 엡스타인 스캔들 같은 도덕적 파산 속에서 일반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과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붕괴하고 있으며, 트럼프의 지지율 역시 40% 이하로 극단적인 양극화와 대중의 피로감 속에 간신히 턱걸이를 유지하거나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결국 한국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리더’를 통해 신뢰와 성장을 동시에 이루어냈지만, 미국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 위에서 소수를 위한 자본의 거품만 키우고 있는 셈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일갈했다.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 민주주의가 낳은 기형적인 '증상'이나 '사고'라고 치부하려 하면 안 된다. 트럼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재앙이 아니다. 그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가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거울이다. 그는 미국 대중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가장 솔직하고도 추악한 욕망이 투표라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 구체화된 '결과물'이다. 엡스타인 스캔들이 터지고, 온갖 범죄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선택했다. 왜인가? 그들의 욕망은 명확했다.
"도덕? 품격? 정의? 다 필요 없다. 내 주식 계좌를 불려주고, 내 세금을 깎아준다면 악마와도 손잡겠다." 과거 자유와 인권의 모범을 자처하던 제국은 이제 모든 것을 이익으로 환산하는 철저한 '거래'의 정글로 전락했다. 연대와 인권,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 따위는 당장 내 퇴직연금 잔고를 불려주는 붉은색 주가 상승표 앞에서 한낱 휴지조각이 되었다.
미국인들은 '위선적인 PC(정치적 올바름) 주의'에 지쳤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 백인 주류 사회가 그동안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려온 권리가 사실은 남들을 배제한 '특권'이었다. 이들은 흑인, 여성, 이민자 등 소수자의 권리가 신장되면 곧장 자신의 파이가 줄어든다는 강박적인 '제로섬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특권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평등이 억압으로 느껴진다"는 말처럼, 그들은 평등을 향한 사회적 요구를 자신의 권리에 대한 침해라고 투덜거린다.
이 불평은 역설적인 자백이다. "내 권리가 빼앗기고 있다"는 그들의 외침은 곧 "내가 그동안 누려온 부당한 특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치는 반(反) PC는 결국 "차별할 수 있었던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뻔뻔한 선언이다. 그들이 종교처럼 열광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슬로건 속 위대한(Great) 시절이란, 사실 타인을 합법적으로 차별하고 지배하며 주류 기득권의 위계질서가 견고하게 작동하던 '야만의 시대'를 뜻할 뿐이다. 그 정도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집단적 탐욕, 타인의 처참한 고통(엡스타인 피해자들)을 밟고 서서라도 나의 기득권만은 악착같이 쥐고 있겠다는 지독한 이기심, 그것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다시 권좌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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