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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Oct 17. 2024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부쳐

펜은 칼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이기며 연약함은 곧 강함을 이긴다.


 2024년 10월 10일(왠지 연도와 날짜를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싶다),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그리고 아시아 여상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수상 이유를 들었다. 앤더스 올슨 위원회 위원장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라고 전했고, 그의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을 치켜세우며 그를 “현대 산문의 혁신가”라고 칭했다.      


 나는 내 미천한 상상력을 반성한다. 내 생에 ‘남성, 백인, 서구 문학’으로 대표되는 노벨문학상을 한국인 작가가, 그것도 한국인 여성 작가가 받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한국 문학계에서조차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그럼에도 묵묵히, 고통을 걸으며 썼고, 드디어 주어진 보상에도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21세기 들어 대한민국에서 ‘작가’는 업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주목을 받은 적이 있나 싶다.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등장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2024년,
시대 기류의 가장 정반대 편에 선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을
원서로 읽을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2014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 다음 날인 5월 19일, 한강은 그 잔인한 국가 폭력과 시민 학살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출간했다. 같은 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한강은 세월호 시국 선언에 이름을 올렸고, 박근혜 정부는 그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2008년 당시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세월호 참사 후 박근혜 정부에서 부활한 것이다. 거의 1만 명에 육박하는 리스트엔 박찬욱, 봉준호, 황동혁 감독부터 배우 송강호, 정우성, 방송인 김제동, 가수 신해철, 윤도현, 안치환 등이 있었고, 한동안 그들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당시 잡지사 기자였던 나는 이 블랙리스트를 뼛속까지 체감했다. 

     

 한강의 책은 그동안 철저하게 배제되고 치열하게 가려졌다. 그의 작품에 대한 지원은 모두 배제됐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정권의 압박과 요구를 거부하고 선의에 사비를 들여서까지 한강의 소설들을 양질의 퀄리티로 번역해 해외에 선보인 유일한 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사라졌나? 그렇지 않다. 불과 작년에만 해도 경기도 교육청 보수 교육감 임태희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등 우수도서로 평가받은 도서들에 ‘청소년 유해 도서’라는 낙인을 찍고 폐기 처분했다. 무식한데 신념만 있는 자들이 더 용감하다. 책을 아예 읽지 않는 사람보다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인촌은 한강이 축전을 거부하자 공개 축하 글을 올리며 그동안 문체부가 한강의 수상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생색을 냈고,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최초로 대통령실 도서 구매 목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제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책 안 읽는 대통령’ 윤석열은 현재 챗GPT로 썼다는 의심을 받는(AI 생성 컨텐츠 감지기에 돌려보기 챗GPT를 이용했을 확률이 80%가 넘었다는 언론 기사가 나왔다), 맞춤법도 높임법도 엉망인 축전을 페이스북에 끄적였다. (나는 김건희의 국정 개입과 공천 개입보다 그의 카톡 대화가 공개될 때마다 봐야 하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맞춤법과 띄어쓰기, 오타로 더 분노한다.) 


(아래글을 보면 현재 한 국가를 움직이는 대통령실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강의 수상에 숟가락 손잡이 끝 작은 모서리도 올리면 안 된다. 이번 정부 들어 문화예술 관련 예산은 모조리 삭감되었고, 그리 깎아 남은 눈먼 돈은 대통령 내외 호화 해외여행과 관저의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을 비롯해 정부 인사에 배치한 제 식구 배를 불리는 데 쓰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연루된 유인촌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업 실무를 맡았던 용호성을 문체부 1 차관으로 임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윤석열이 했는지 김건희가 했는지도 모르겠고, 윤석열이 했어도 자기가 뭘 하는 건지 알고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내가
스스로 ‘우리나라’를 부정하고 싶었던 처음은
멀쩡한 민주주의 시대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직접 목격한 국가 폭력,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였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빌어먹을 문명의 발전을 원망했다. 친구들과 ‘가만히 있으라’라는 문장이 적힌 배지를 잔뜩 만들어 나간 침묵시위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어른들의 모습을 세포 하나하나에 새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력함과 절망의 파도에 함께 휩쓸렸고, 나는 도저히 한국에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도망쳤다. 그렇게 트라우마가 된 바다에 뛰어드는 다이버가 되어 머나먼 외딴섬에 박혀 살던 2016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2007년 출간된 <채식주의자>가 거의 10년 만인 2015년, 데보라 스미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후 맨부커상 수상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조금 힘이 났고, 위로를 받았다.

    

 이듬해 3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선고가 내려졌다. 독재정권과 군부정권의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가 왜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질문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으며 BTS와 블랙핑크가 K-팝의 ‘K’를 떼어 버렸다. 그때부터였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외국인들이 ‘김정은’ 농담 대신 한국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것저것 내게 묻기 시작한 것이. 내가 한국인이라, 동양인이라 싫다며 다른 백인 강사로 바꿔 달라는 일부 백인 학생들이 사라진 것이. 




그리고 <오징어게임>의 전 세계적인 흥행으로
황동혁 감독이 에미상 무대에 오른 2022년 9월,
그로부터 한 달 후 내 남은 생의 모든 핼러윈 파티를 없애버린
또 하나의 국가 폭력,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다.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한국 길거리에서 실제로 일어난 ‘오징어게임’이네” 하고 말하며 히죽거리는 외국인 친구에 뺨을 한 대 갈기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애증의 조국, 대한민국과 어떻게든 결판을 지어야 했다. 

               

 “한국은 현실이 영화와 드라마를 능가하는 나라야.” 나는 가까운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2024년, 인구 5천만이 넘는 한 국가가 또다시 어설픈 사기꾼들에 놀아나고 있는데 여전히 국정 지지율이 20%가 넘는다. 20%를 지키는 이들은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표를 던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지라고, 결국 자기 스스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때 이 정권은 끝장을 보게 될 거라고, 한 철학자가 말했다. 


 괜찮다. 때마침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이 개봉했고 많은 이들은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은 선조의 모습을 통해 이 정권의 몰락을 상상한다. 정치를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고 창자가 뒤집히는 고통을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광대극을 즐기며 풀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백성들이나 지금의 서민들이나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이게 바로 문화의 힘이다.      












한강의 수상 소식에
당연히 예상했던 소음이 들려왔다.

광주와 제주를 비롯한 대한민국 역사의 수많은 고통의 기억이
이제 우리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에 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애처로운 발악 같은 것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 단체들이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철회하라는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소설가(라고 부를 수조차 있을까 싶은) 김규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알려진 뒤 페이스북에 “노벨상 가치 추락, 문학 위선 증명, 역사 왜곡 정당화”라는 문장을 적었다. 그의 문장이 얼마나 초라하고 초췌한지 글 쓰는 사람들이 보고 배워야 할 ‘이런 문장은 피하세요’ 리스트에 넣고 싶을 정도다.      


 그는 “(노벨상) 수상 작가가 써 갈긴 ‘역사적 트라우마 직시’를 담았다는 소설들은 죄다 역사 왜곡”이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언급했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는 오쉿팔이 꽃 같은 중학생 소년과 순수한 광주 시민을 우리나라 군대가 잔혹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고, <작별하지 않는다> 또한 제주 4·3 사건이 순수한 시민을 우리나라 경찰이 학살했다는 썰을 풀어낸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이미 그는 ‘오쉿팔이’ ‘썰’이라는 단어 선택으로 소설가로서의 품격과 인격을 스스로 포기했다.

      

 또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했다’는 한림원의 심사평을 거론하며 “한림원이 저런 식의 심사평을 내놓고 찬사 했다는 건, 한국의 역사를 뭣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저 출판사 로비에 놀아났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렇게 또 수많은 ‘깨시민’ 독자들은 자랑스러워하고, 거짓 역사는 진짜로 박제 돼버리겠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라며 축제를 벌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만 부끄럽다. 그리고 슬프다”라면서 “그래도 10억 상금은 참 많이 부럽다”라고 남겼다.     


 끝내 그는 선을 넘는다. “(중국 작가 후보와 한강)둘을 비교하고도 그녀를 선택한 거라면 한림원 심사위원들 모두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혹은 명단 늘어놓고 선풍기 돌렸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아님 여자라서?”라는 문장은 나를 기어코 절망케 했다. 


 


피는 잔칫집에서 흘리라고 했다.
누구도 김규나에게 축배를 함께 들자고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어느 잔칫집에 피를 뿌리는지 정도는 제대로 인지했다면
더 분발해야 했다.

한강의 문장과 싸우려 했다면
좀 더 날카롭고 논리적인 문장을 가져왔어야 했다.

적어도 김규나가 진정 스스로 ‘소설가’라 규정한다면,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왜 한강의 작품이 ‘역사 왜곡’인지
문학인답게 깊고 넓은 통찰로 사유하며 비판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한림원이 순전히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수상자를 선정한 거라면,
정부가 문화 예산을 다 깎아버리고 노벨문학상이 뭐 하는지도 잘 모르는
무능한 한국의 손을 왜 들어줬는지,
한림원이 중국 작가 대신
한국 작가를 선정해 얻게 되는
정치적, 물질적 이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했다.

한강이 여성이라 <채식주의자> 같은 작품이 나온 건데
“여성이라 수상한 게 아니냐?”라고 묻는
이 여성 작가의 어리석음은 그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가차 없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소음이라 전혀 시끄럽거나 거슬리진 않는다. 그저 작가로서의 밑천도 인간성도 논리도 없는, 자격지심과 심술과 억지로 가득한 배설에 가까운 글을 그저 귀엽고 추악한 푸념이라 웃고 지나가기엔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밑바닥이고 민낯인 것 같아 찜찜하고 불쾌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말 멋진 보수를 보는 게 원이다. 그래도 “상금 10억은 부럽다”라는 그의 문장으로 볼 때 적어도 작가의 덕목 중 하나인 ‘정직함’은 갖춘 것 같다. 


 그래도 완전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자칭 보수 지지자들이 그의 옛 소설을 구매해서 베스트셀러라도 만들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래도 힘에 부치는 듯하다. 그는 조선일보 임원진들이 사주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칭찬을 잔뜩 받고는 집으로 돌아가 이런 글을 쓴 자신을 끝없이 정당화하고 자위할 것이다. 자신의 글이 파장을 일으킨 후 제대로 작가답게 썼다는 후속 글을 보니 또 다른 작가의 덕목 중 하나인 ‘열린 마음’이나 ‘유연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 제2의 전여옥은 감당하기 힘든데. 


 하지만 그가 블로그에 끄적거려 놓았다는 아랫글을 보니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괴로움에 연민을 느낀다. 김규나는 결국 이렇게 한강이 말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트라우마, 보편성을 스스로 증명한다. 그저 그가 하루빨리 마음의 평안을 찾고 마침내 자신만의 소설을 쓰게 되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와 갈등은 ‘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제의 만행부터
이승만과 제주 4.3 사건,
전두환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박근혜와 세월호 참사,
윤석열과 이태원 참사,
이 모든 갈등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에서 기인한다. 




 일제의 만행을 반 세기가 훌쩍 넘어 한 세기에 가깝도록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안의 문제를 해결할까 싶기도 하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엔 시스템적인 여성 차별이 없다”라고 선언해 버린 천방지축 대통령 윤석열로 인해 더 이상 이 나라엔 여성, 노인,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노동자 등에 대한 그 어떤 차별과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무결의 유토피아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정치인과 기업인은 자신의 이익에 줄을 대기 바쁘고 지식인과 침묵하며 대학생은 취업 준비에 바쁘다.       


 하지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김규나 같은 논리를 펼치는 ‘뉴라이트’ 신봉자들이다. 아무리 독일이 세계 2차 대전의 전범 국가로서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사과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나치의 만행을 두둔하고 정당화하는 네오나치가 소수지만 존재한다. 끝까지 전범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극우도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가해 전범 국가다. 


 도대체 왜,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에서 가해국인 일본의 잘못이 아니라는, 우리는 일본에 피해를 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냐는 말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나서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같은 맥락으로 도대체 왜 김규나는 그에 대한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역사 왜곡”이라고 하느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①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②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를 빌어 김규나의 표현의 자유를 나의 그것만큼이나 존중한다.   


 한강의 수상 소식으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일 때 또다시 드라마틱한 대한민국의 단편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뉴진스 하니가 ‘직장 갑질, 직장 내 괴롭힘 피해’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선 것이다. ‘K-팝’의 나라,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아이돌 시스템의 민낯을 세계인들이 알게 된다면 아마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자리에 앉아 ‘갑질 피해자’ 하니와 함께
국감장에서 밝게 웃으며 셀카를 찍은 정인섭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사장은
올해에만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사업장의 ‘갑 중의 갑’이었다. 



 요즘 매일 같이 뉴스의 처음과 끝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 민간인 김건희가 장식하다 보니 과연 K-드라마 강국의 현실답다 싶고, 이래서 한국이 드라마를 잘 만드나 싶다.      


 하이브의 방시혁도 뉴진스와 민희진과의 갈등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라고 일관하고 있다. 그 역시 무명 시절의 서러움과 갑질 피해를 호소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군에서 구타당하던 졸병이 병장이 되어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이자까지 쳐서 그대로 갚아주는 괴물처럼 군다. 하니는 “이대로 없던 일이 될까 봐” 용기를 내 국감에 출석했다고 말했다. 그 거대한 덩치를 숨겨버린 방시혁보다 낫다. 하니의 작은 날갯짓은 결국 어떻게든 나비효과로 이어질 것이다.        

          








 한강의 작고 오랜 날갯짓은 마침내 한국 사회의 균열을 일으키는 걸 넘어 세계문학의 벽을 허물었고, 역시 그는 그답게 가장 먼저 몸을 숙이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썼다.



그는 “전쟁이 치열해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
스웨덴 한림원에서 상을 준 것은 즐기라는 게 아니라 더 냉철해지라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전히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약자의 편에 섰다.

그가 온 세상에 보여준 작가로서의,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진중함이 가득 담긴 문장이다.

      





 한강의 수상은 광주에 비로소 영원한 빛을 밝혔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의 모델이 된 고(故) 문재학(1980년 당시 16세, 최연소 시민군)군의 어머니, 이제 팔순을 훌쩍 넘은 노모는 “집에 오지 못한 아들이 소설이 되어 돌아왔다”“평생 내가 못 해 낸 일을 소설가 한 분이 좋은 글로 세계에 알렸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덕에 제주 4.3의 유네스코 등재에 더욱 힘이 실렸고, 여전히 가부장제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공감하고 연대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문학은 한국문학을 더 주목하고, 한강의 작품뿐 아니라 다른 한국 작가들도 세계 독자들에게 더 널리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한국인의 피와 뼈에 각인된 정치적‧사회적 억압과 역사적 트라우마, 인간의 연약함을 부끄러움과 수치심 없이 드러내고, 역사를 직시하고 태도로 고통 속에 두 발을 딛고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한강은 한국인에게 뜨거운 한풀이를 선사했다. 

     


 한강의 글은 앞으로 더 선명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그의 글을 읽게 될 것이고,
광주와 제주의 아픔은
대한민국을 ‘바로 보지 않음’과 ‘인정하지 않음’,
즉 ‘왜곡’과 ‘부정’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로 이끄는 머릿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소녀들은 또다시 노벨문학상을 꿈꾸며 날개짓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쓰다’의 가치와 ‘쓰는 사람’에 대한
가치와 존중의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AI가 정밀 타격한 미사일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인간의 결정권까지 넘보고 있는 지금, 넷플릭스엔 영화가 넘쳐나 몇 시간을 스크롤만 하다 막상 영화 한 편 볼 시간을 다 날려버리기도 하는, 서점 한구석에 앉아 몇 시간이고 읽던 책 한 권의 간절함이 새삼스러워진, 신비로운 영웅이 사라진 작금의 난세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너무나 값지고 소중하다.




상상해 보라.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헌법이 모조리 현실이 되고
모두 저마다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정부의 간섭과 검열로부터 자유롭되
풍족한 지원을 받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앞으로 세계 무대를 얼마나 더 훨훨 날게 될까.

그러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의대와 법대에 가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노래하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까.

그런 사회는, 그런 국가는,
그런 세상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까.



 위정자들이여, 문화의 힘을 얕보지 마라. 

언제나 펜은 칼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이기며 연약함은 곧 강함을 이긴다.    

  

 한글을 사랑하자. 

한국은 식민지 시대를 겪고도 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지킨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글을 쓰자.

 쓰는 만큼 좋은 인간이 된다. 가끔 아닌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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