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23)에 8편의 에피소드로 처음 공개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The Diplomat>이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웨스트 윙>과 <그레이 아나토미> <홈랜드>의 거장 데보라 칸 특유의 현실감 넘치는 스토리텔링과 서사적 긴장감이 넘치는 정치 스릴러 <외교관>은 시리즈 제목처럼 국제 외교 무대를 배경으로 개인과 국가의 이익과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들을 섬세하고 강렬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외교적 줄다리기 속 인물들의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외교적, 혹은 개인의 삶에 관한 의사결정의 무게를 잘 표현한 대본과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일품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주연 배우 케리 러셀 @ 넷플릭스 <외교관> 시즌2 프리미어
냉전의 황혼기, 워싱턴 교외에 사는 러시안 스파이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메리칸즈>의 케리 러셀의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연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칸즈>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늘한 암살도 마다하지 않던 케리 러셀이 <외교관>에서는 독살 대신 책략으로, 변장 대신 수트를 입고 대사관 사무실과 파티장을 전쟁터처럼 누빕니다. 케리 러셀뿐만 아니라 루퍼스 스웰, 로리 키니어, 데이빗 기아시, 엣토 에산도, 알리 안 등 개성 있는 배우들의 훌륭하고 빈틈없는 연기가 긴박하게 펼쳐집니다. 저처럼 미국 정치 스릴러 드라마 중에서도 <웨스트 윙> <홈랜드> <스캔들>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외교관> 역시 매혹적으로 느끼게 될 겁니다.
케이트(케리 러셀)와 할(루퍼스 스웰)은 위태롭고도 매혹적이며 모순적인, 셰익스피어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는 부부입니다. 케이트는 영국 대사로 임명된 후 국제 지도자들의 우아함을 가장한 진흙탕 싸움에서 정치적 여파와 개인적 위기를 헤쳐 나가는데요.
<외교관>은 강렬하고도 감정적으로 충만한 스토리텔링으로 국제 외교의 혼란 속에서 개인의 야망과 배신, 신념,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주제를 탐구합니다.
<외교관> 시즌1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며 러시아의 위협, 미국-영국의 복잡한 외교 관계, 그리고 케이트 부부의 파국 직전의 결혼 생활을 씨실과 날실처럼 교묘하게 엮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갈등과 긴장 수위가 최고조를 이루는 중동 지역에서 오랜 베테랑 대사 경험을 가진 남편 할을 도와 외교 차관 일을 해왔던 케이트가 신임 영국 대사로 부임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케리 러셀이 보여준 다층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시즌1의 큰 매력이었습니다. 또한 국제 관계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선보이는 데보라 칸의 대본 역시 쫄깃합니다. 시즌2를 고대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시즌1 마지막 미완의 서사를 데보라 칸이 어떻게 마무리할지, 그리고 현대 국제정세를 반영한 더 큰 주제와 갈등을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케이트를 비롯한 여러 인물의 개인적 드라마와 세계적 이해관계가 뒤섞인 <외교관> 두 번째 시즌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시즌2는 정치 드라마의 전형성을 뛰어넘어 현대 국제 관계의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무겁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국가 간의 동맹과 세계 패권의 권력 게임, 국제적 긴장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적인 고뇌와 관계의 복잡성을 탐구하며 심리적 고찰과 휴머니즘을 선사하죠. 물론 정치 스릴러답게 계속되는 긴장감도 놓지 않습니다.
외교와 관계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총탄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는 아프가니스탄 현장이 익숙했던 케이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영국 대사가 되어서도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로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망가진 바지 지퍼를 클립으로 처리합니다. 종종 그녀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여성성이 부족한 것이 그녀의 정의롭고 순수한 마음을 상징한다고 암시하죠. 케이트가 영국 대사로 중요한 외교적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남성 중심의 외교 무대는 권위적이고 가식적이고 풍자적입니다. 긴박한 긴장감 속에서 그녀가 상대하는 미국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 영국 총리, 외교부 장관 등 모든 협상의 상대들은 그녀의 첫인상을 바탕으로 그녀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려 들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과 순발력, 강인함과 지성을 무기 삼아 권위와 신뢰를 확립해 갑니다. 그녀의 개인적인 갈등—특히 남편 할 와일러와의 관계—은 감정적 깊이를 더하며, 여성 지도자가 가족과 경력 사이에서 겪는 내적 투쟁을 부각합니다. 케이트는 자신의 전문성뿐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자존감과 의지를 발휘하며 모든 것을 컨트롤하려는 남편 할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벗어나 홀로서기에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립니다.
국가에 민족을 곱하면 그게 바로 외교입니다. 외교는 각국의 이익과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바가 항상 옳다고 믿는 것이죠. 한 나라는 당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당신은 그 나라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질합니다. 한 나라의 수장을 설득하고 협상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외교관>은 말합니다.
세계 평화 수호자의 이중성, 그리고 남성 중심 권력 세계의 허상
미국은 언제나 그렇듯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평화를 지키는 국제경찰의 역할을 강조하며 국제적 문제에 개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누군가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중성을 드러내죠. <외교관>은 바로 이런 미국의 민낯을 냉철하게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세계 패권 경쟁 속에서 대의와 현실 사이의 모순을 탐구하며 국가주의의 그늘을 드러내 보다 복잡한 진실을 제시합니다.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외교관> 시즌2에서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스토리텔링은 노쇠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자존심은 센 미국 대통령(바이든 대통령을 선명하게 상징하는)과 여성혐오주의자에 언론과 정파의 눈치만 보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영국 총리(보리스 총리를 강렬하게 떠올리게 하는)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최측근이자 여성 비서 실장인 빌리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며 영국 총리는 공적 지위가 없는 아내와 여성 원로 책사와의 의논 없이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합니다. <외교관>에 등장하는 여성 책사들은 강력한 남성들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교묘하게 안내합니다. 완전한 바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믿는 만큼 똑똑하지도 않은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는 남성 권력 구조의 쓸쓸한 허상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영부인과 민간인의 국정 농단으로 떠들썩한 한국의 현재 정치 상황에서 감정 이입이 안 될 수가 없더군요.)
더 이상 'Great'하지 않은 'Great Britain'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외교관>은 현대 국제정세를 현실적으로 다루며 영국의 불안정한 상황 또한 아주 사실적으로 그립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더 이상 ‘Great Britain’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공포에 떠는 불안과 혼돈이 웅장하고 거대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적인 성(城)과 대비됩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요구는 더 커지고, 북아일랜드와 웨일스의 상황도 복잡하게 얽혀 있죠. 영국은 이제 더 이상 세계적인 위기를 해결할 만한 힘을 갖추지 못한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해 가장 사랑하는 나라 미국으로부터 잦은 굴욕을 당합니다. <외교관>은 이러한 영국의 무기력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을 통해 한때 스스로에게 ‘Great’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대영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겪는 국가적 불안과 그로 인한 공포, 또 그로 인한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 파장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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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가진 여성에 대한 추상적인 이상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외교관> 시즌2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새로운 인물은 그레이스 펜 부통령으로 등장하는 -그 유명한 <웨스트 윙>의- 앨리슨 제니입니다. 그레이스 펜 부통령은 싹트고 있는 남편의 비리 스캔들로 인해 폐위될 예정으로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걸 주저하는 케이트를 못마땅해합니다. 부통령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일궈온 정치적 열망과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결실인 그 자리를 케이트는 욕심내지 않으니까요.
그레이스 팬은 케이트의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삐져나온 브래지어 끈, 종이 클립으로 대충 고정한 팬츠를 지적하며 여성 정치인이 일을 잘하는 것 외에도 멋진 이미지로 보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줍니다. 그녀의 얼굴은 하루 평균 1만 2천 번 미디어에 실리고, 그녀의 사진은 모든 교실과 전 세계 대사관에 실리기 때문이라고요.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그레이스는 케이트의 적대자가 아니라 롤모델로 소개됩니다. <외교관>이라는 드라마가 케이트를 숭배하는 것처럼, 케이트는 자신이 열망하는 실용적인 리더십을 구현하는 이 경험 많고 관록이 깃든 여성을 숭배합니다.
그레이스와 케이트, 할이 대통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고 그레이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날카로운 대화에서 케이트는 그레이스에게 물러나지 말고 싸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만약 내 남편 할이 당신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만두고 물러날까요?” 옆에 있던 할은 “당연히 내가 자리를 지킴으로써 가져오는 혜택이 스캔들로 인해 잃는 정치적 비용보다 더 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외교관>이 가장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은 그레이스와 케이트가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여성’에 대한 추상적인 이상에 대해 말하죠.
케이트는 그레이스에 대해 긴장하고, 위축되고, 감탄하고, 공감하고, 변호하며, 또 미워합니다. 케이트는 만약 자신이 그레이스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모른다는 걸 인정합니다. <외교관>을 감상하는 사람들 역시 ‘만약 내가 그레이스 팬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할 겁니다. 과연 우리는 그녀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외교와 정치,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으니까요.
가장 미국적인 일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영국 군함이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은 가장 먼저 이슬람 혐오를 이용해 즉각 이란을 비난하고, 이란이 배후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자, 그다음에는 러시아를 비난합니다. 그러고 나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과 가장 친한 친구를 의심합니다. 그렇게 끝까지 파헤쳐 보면, 결국 자신이 결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개입한 것을 알게 됩니다.
데보라 칸은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항상 미국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라고 말이죠. 그녀가 <외교관>을 통해 가장 집중하는 주제입니다.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케이트는 시즌1 마지막, 영국 총리의 책사 마가렛 로일린에게 전화를 겁니다. 이 전화는 자동차 폭탄 테러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대사관 직원 로니는 결국 사망하고 할과 스튜어트의 큰 부상과 PTSD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살아남은 할은 치명적인 자동차 폭탄 테러를 ‘사업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 묘사하고 케이트는 이에 격노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중동 지역의 대사였을 때 내려야 했던 어렵고 잔인한 결정과 선택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인정합니다. 어떤 결정은 의도와 달리 혹독한 대가가 따르는 결과에 직면합니다. 완벽하게 사악하고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외교관> 시즌3 제작 돌입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 넷플릭스 시리즈 <외교관>
데보라 칸은 갱스터입니다. 시즌 1을 강렬한 폭발로 끝냈다면, 시즌2는 헐떡거리는 야수의 거친 숨결로 끝내죠.
위험한 신념을 가진 자가 전지전능한 권력까지 쥐게 된다면?
이제 케이트와 할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의 원수가 되었지만, 한편으론 그녀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부통령 자리는 이제 공석이지만 케이트가 그 자리에 앉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허구의 세계에서도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여성일 수는 없으니까요.
케이트는 영국 대사로 남게 될까요? 할은 공식적인 직책으로 국제 관계에 복귀할 기회를 얻을까요? 영국 외무장관 데니슨은 케이트에 대해 다시 호감을 가지게 될까요? 케이트와 할의 결혼 생활은 더 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