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된 미래 속에서 공정과 혐오 사이, 고립된 섬이 된 청년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청춘은 젊은이들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Youth is wasted on the young)”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다. 이 말은 통상적으로 젊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소중한 시기를 허비하는 청춘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꼬집는, 기성세대의 지혜가 담긴 냉소적 통찰로 해석된다. 젊음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자산을 가졌음에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가벼운 질책이 이 말의 행간에 녹아 있다. 그러나 2025년 대한민국에서 이 경구는 전혀 다른, 훨씬 더 비극적인 울림을 갖게 되었다.
2025년의 ‘청년’은 더 이상 축복이나 가능성의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치명적인 자만과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도사리는 불안정한 상태다. ‘청춘’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선물이 아니라, 차라리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정 그 자체다. 청년들에게 ‘청춘’은 무한한 기회의 장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실패가 곧 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 같은 경쟁의 연속이다. 이들에게 미래는 개척의 대상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가득 찬 미지의 영역이며, 생존 자체가 지상 과제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노인이 되는 것’, 즉 그저 살아남아 안정된 노년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큰 꿈이 되어버리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진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이나 비관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위험 신호이며,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분노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으로 분출되는 현상의 근원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바로 이 ‘낭비되는 청춘’의 실체, 즉 기회는 박탈당하고 책임만 강요당하는 젊음의 고통이 어떻게 특정 세대 남성들의 정치적 우경화와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지는지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히 청춘의 가치를 논하는 낭만적 담론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 세대가 경험하는 고통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들이 왜 기존의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문법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때로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2030 청년의 절망은 사회가 청년들에게 약속했던 미래가 파산했음을 알리는 부고장과도 같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2030 남성들의 우경화를 단순한 정치적 변덕이나 이념적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는 대신, 그들의 삶의 조건과 내면의 풍경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근원적 동인을 파헤치고,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직면한 위기를 진단하며 대안적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면 어떨까. 그들의 청춘이 더 이상 ‘아까운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이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현상에 대한 어떠한 진단이나 해법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2030 세대는 더 이상 단일한 집단으로 호명될 수 없다. 이 세대 내부의 가장 깊고 선명한 균열은 전통적인 변수였던 지역이나 계급이 아닌, ‘성별’을 따라 형성되고 있다. 이는 지난 몇 년간의 선거 결과와 여론조사 데이터를 통해 명백히 확인되는, 한국 정치 지형의 근본적인 변화다. 2030 세대를 성별로 구분하지 않고 논하는 것은, 마치 영남과 호남을 ‘남부권’으로 뭉뚱그려 선거를 분석하려는 것처럼 무의미한 시도가 되었다.
이러한 젠더-정치 균열이 수면 위로 극명하게 떠오른 결정적 계기는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다. 당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이하 남성의 72.5%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 지지층인 60대 이상 남성의 지지율(70.2%)을 상회하는 수치였으며, ‘이대남(20대 남성)’이 한국 정치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욱 공고화되었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58.7%의 지지를 보낸 반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는 36.3%의 지지를 보냈다. 반면 20대 여성은 정반대의 투표 성향을 보였다. 이재명 후보에게 58.0%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고, 윤석열 후보에게는 33.8%의 지지를 보내는 데 그쳤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정당 호감도 조사 역시 이러한 분열을 뒷받침한다. 20대 남성의 국민의힘 호감도는 5.40(7점 척도)으로 민주당(2.62)을 크게 앞섰지만, 20대 여성의 경우 민주당 호감도가 5.00으로 국민의힘(3.29)보다 월등히 높았다. 30대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나, 남성은 보수정당, 여성은 진보정당을 선호하는 뚜렷한 성별 분화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화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추세로 자리 잡고 있다. 2025년 2월 한국갤럽의 정례조사 데이터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18-29세 남성의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6%, 더불어민주당 14%로 보수정당 우위가 확고했다. 반면, 같은 연령대 여성은 더불어민주당 39%, 국민의힘 14%로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30대 역시 남성은 국민의힘(36%)이 민주당(29%)을 앞섰고, 여성은 민주당(48%)이 국민의힘(23%)을 두 배 가까이 앞서는 양상을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극심한 성별 분화가 40대 이상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0대 이상 세대는 남녀 모두 비슷한 정치 성향을 공유하는 반면, 유독 2030 세대만이 성별에 따라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청춘이 불공정한 시스템에 의해 '낭비'되고 있다고 느끼는 상당수의 2030 남성들이 우경화와 반페미니즘 정치에 경도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그들의 여성 동년배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활발하고 진보적인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사소한 정책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사회 문제의 진단, 원인 규정, 해법 모색에 있어 전혀 다른 서사를 따르는 두 개의 부족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대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 현상은 다음 세 가지 상호 연결된 힘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다. 첫째, 그들의 부모 세대인 586과 X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모순적 유산이다. 이 유산은 높은 성공에 대한 기대치와 축소된 기회의 현실이라는 심리적, 경제적 압박을 동시에 가했다. 둘째, 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이 겪은 상이한 정치적 각성 경험이다. 이는 한쪽에는 피해자 정체성을, 다른 쪽에는 정치적 효능감을 심어주었다. 셋째, 각자의 정체성을 벼리고 강화하는 이념적 용광로 역할을 하는 양극화된 디지털 생태계의 구조다.
2030 남성들이 겪는 박탈감과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 즉 그들의 부모 세대가 구축한 세계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2030 남성들은 586세대의 성취주의적 명령과 X세대의 구조적 불안감이라는 모순된 유산 사이에 낀 채, 심리적·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5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서 권위주의에 맞서 싸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면서 과거 자신들이 비판했던 위계적이고 도그마적인 문화를 답습하는 경향을 보였다.
경제적으로 이 세대는 한국 자산 시장의 ‘황금기’를 누린 최대 수혜자였다. 2000년대 본격적인 경제활동기에 접어든 이들은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힘입어 다른 세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속도로 부를 축적했다. 이는 자녀 세대와의 극심한 자산 격차로 이어졌으며, 특히 부동산 문제는 오늘날 세대 갈등의 가장 큰 뇌관이 되었다.
자신들의 경제적 안정을 확보한 586세대는 막대한 자원을 자녀의 사교육에 쏟아부었다. 이들에게 교육은 계층과 지위를 대물림하는 가장 확실한 투자 수단이었다. 월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사교육비 지출은 ‘좋은 대학이 성공의 보증수표’라는 믿음 아래 이루어졌지만, 이는 자녀 세대인 90년대생들을 극심한 ‘교육 군비 경쟁’으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성공의 척도는 오직 ‘좋은 대학’이라는 간판으로 획일화되었다.
1970년대에 태어난 X세대는 586세대와는 또 다른 경험을 통해 자녀 세대에게 영향을 미쳤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전례 없는 문화적 풍요를 누리던 이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을 맞닥뜨리며 성장 신화의 붕괴를 목격했다. 이 충격적인 경험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파괴하고 ‘계약직’, ‘인턴’과 같은 불안정 노동을 한국 사회에 일상화시켰다. 하룻밤 사이에 중산층이 붕괴하는 것을 본 X세대는 ‘안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고, 이는 많은 젊은이들이 대기업의 도전적인 커리어 대신 공무원과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이 두 세대의 경험은 2030 남성들에게 모순적인 유산으로 남았다. 그들은 586 부모로부터 높은 수준의 성공을 달성해야 한다는 성취 압박을 물려받았지만, 그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고도성장기의 경제적 조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은 X세대 부모로부터 경제적 불안과 실패에 대한 실존적 공포를 흡수했다.
그 결과는 깊은 배신감과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이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상대적으로 쉬운 길을 통해 성공했다고 느끼는 반면, 자신들은 ‘지옥 같은 경쟁’ 속에서 더 적은 보상을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특히 586세대가 과거 기득권을 비판하며 등장했지만, 결국 자신들도 자녀의 입시 비리나 부의 대물림 문제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조국 사태’와 같은 고위층 자녀의 입시 비리 논란은 586 엘리트들이 공정을 외치면서 뒤로는 특권을 세습한다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형성은 부모 세대의 교육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586과 X세대 부모들이 자녀의 성공을 위해 선택한 ‘교육 군비 경쟁’은 단순히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를 넘어, 세상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세계관을 자녀들에게 내면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대학 입시라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전쟁’ 속에서, 자녀의 미래 전체가 이 단 하나의 경쟁 결과에 달려있다고 강조함으로써, 부모들은 삶이란 타인에게서 승리를 빼앗아 와야 하는 냉혹한 투쟁의 연속이라는 가르침을 무의식적으로 주입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2030 남성들이 사회적 약자 배려나 결과의 평등 같은 개념에 저항감을 느끼고, 오직 눈앞의 경쟁 규칙 그 자체의 ‘절차적 공정성’에 집착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할당제와 같은 정책은 경쟁의 규칙을 어기는 ‘반칙’이자, 자신의 파이를 부당하게 빼앗아 가는 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부모의 경제적 지원은 역설적으로 아들들의 분노를 키우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청년 세대에게 결혼과 주택 마련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지원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아들들에게는 전통적인 남성상인 ‘가장’으로서 자립할 수 없다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함을 매일같이 확인시켜주는 낙인처럼 작용한다. 부모 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을 자신은 부모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은, 감사함 이면에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서 성공한 부모 세대에 대한 미묘한 원망을 낳는다. 이는 ‘실패한 세대’라는 자기 인식을 심화시키고, 자신의 생존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인식되는 대상(예: 페미니즘 정책)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키는 심리적 동력이 된다.
2030 남성들이 부모 세대가 남긴 모순적 유산 속에서 박탈감과 분노를 키워가는 동안, 같은 세대 여성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정치 주체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일련의 촉매적 사건들과 독특한 온라인 문화의 결합은, 안전과 차별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을 강력하고 집단적인 정치적 정체성으로 탈바꿈시켰다.
2016년,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는 이유로 일면식 없는 여성을 살해한 사건은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정치적 각성의 분기점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모든 여성이 잠재적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체계적인 여성혐오의 극단적 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사건 현장 인근을 가득 메운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내용의 포스트잇들은, 개별적인 공포가 어떻게 공유된 위협 인식과 집단적 분노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 사건과 이후 한국 사회를 휩쓴 미투(#MeToo) 운동은 젠더 차별, 성희롱, 안전의 문제를 더 이상 추상적인 사회 문제가 아닌,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정치적 현실로 만들었다. 이는 감정적으로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여성들의 정치적 동원력을 폭발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새롭게 형성된 여성들의 정치의식은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조직화되었다. 여성 중심 커뮤니티들은 경험을 공유하고, 정치적 언어를 벼리며, 집단행동을 조직하는 핵심적인 허브 역할을 했다. 이는 새로운 여성주의 단체의 결성과 주요 시위 현장에서의 가시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집회 현장에 ‘페미존(Femi-zone)’을 만들어 안전한 참여 공간을 확보하고, 법률 개정 운동을 주도하는 등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각성의 흐름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 맞선 저항 시위에서 정점에 달했다.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당시 집회 참여자 중 20대 여성(18.9%)과 30대 여성(10.8%)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반면, 20대 남성(3.3%)과 30대 남성(5.3%)의 참여율은 현저히 낮았다. 이는 2030 여성이 더 이상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행동하는 시민운동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한다.
이번 시위에서 나타난 가장 독특한 현상 중 하나는 K팝 응원봉이 새로운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본래 아이돌 팬덤의 소비문화 상징이었던 응원봉은 비폭력적이고 축제 같으며 포용적인 시위 문화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재탄생했다.
알록달록한 응원봉의 물결은 과거의 대립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위 문화에 두려움을 느꼈을 수 있는 여성과 젊은 세대의 참여 장벽을 크게 낮추었다. 응원봉은 ‘즐거운 연대’라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며, 시위 현장을 보다 안전하고 개방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또한, 콘서트장에서 중앙 제어되던 응원봉들이 각기 다른 팬덤의 상징으로 한자리에 모여 빛을 발하는 모습은, 다양한 개인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발적으로 연대하는 강력한 시각적 메타포가 되었다. 이는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함께 한다’는 초월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2030 여성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는 ‘정치적 효능감의 선순환 구조’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서 시작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그리고 최근 12.3 비상계엄 저항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행동이 실질적인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학습했다. 정책을 바꾸고, 대통령을 파면시키고,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등, 투입(시위)이 산출(정치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 학습된 효능감은 ‘우리의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낳고, 다음 행동을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이는 주로 온라인 공간에서의 여론전이나 상징적 승리에 머물렀던 2030 남성들의 정치 경험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여성들은 시위를 현실 변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인식하는 반면, 많은 남성들은 이를 자신들의 핵심 불만과는 무관한 행위로 여기게 되는 인식의 격차가 여기서 발생한다.
2030 남성들의 정치적 우경화는 단순한 이념적 선호의 변화가 아니라, ‘피해자’로서의 집단 정체성이 형성되고 공고화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들의 핵심 서사는 기성세대가 누렸던 가부장적 특권을 향유하기는커녕, 오히려 페미니즘의 부상과 여성 우대 정책으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초기에 ‘역차별’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던 이들의 불만은 점차 ‘남성이 약자’이며 ‘권력이 남성을 차별한다’는 차별한다'는 더욱 근본적인 피해자 정체성으로 진화했다. 이는 과거 남성 중심, 남성 우위 사회에서 여성 우대 정책을 시혜적 관점에서 비판하던 윗세대 남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식의 전환이다. 그들에게 차별은 ‘역(逆)’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접적으로 겪는 ‘정(正)’ 방향의 차별이다.
이러한 피해자 서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이 존재한다.
첫째, 성별 할당제와 적극적 고용개선조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반감이다. 정부의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와 같은 정책은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이라는 그들의 신념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제도로 인식된다. 이러한 ‘공정성’에 대한 집착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성공의 사다리가 붕괴된 사회적 배경과 깊이 연관된다. 과거와 달리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기 어려운 저성장 시대에, 이들에게 ‘공정함’이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가치인 ‘객관적 시험 점수’와 같은 정량적 지표에 따른 순수한 경쟁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할당제와 같은 정책은 단순히 불공정한 것을 넘어, 자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다고 믿었던 사회의 근본 규칙을 훼손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이러한 불만은 로스쿨, 의대, 약대 등 전문직으로 가는 길목에 존재하는 ‘여자대학교’ 문제와 결합하며 증폭된다. 예를 들어 서울 소재 약학대학 총정원 573명 중 320명이 여대에 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성 지원자들에게는 구조적으로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명백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둘째,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하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격렬한 분노다. 미투 운동 이후 강화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나 사회적 담론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개별적 인격체가 아닌 ‘가해자일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낙인찍힌다고 느낀다. 특정 단체가 남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범죄가 일상이 된 공간’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활동이 정부 기관의 표창을 받는 현실은 이들의 소외감을 심화시킨다. 이러한 집단적 모멸감은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어지며, ‘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 급진적 구호에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심리적 기반이 된다.
셋째,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병역 의무는 이들의 박탈감을 집약하는 가장 상징적인 이슈다. 이들은 병역 의무로 인해 학업과 사회 진출이 2년 가까이 지체되는 것을 명백한 손실이자 불공정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과거 세대와 달리 성별에 따른 차별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 국가가 강제하는 성별에 따른 의무의 차이는 납득할 수 없는 불평등이다. 이들은 군 복무가 단순한 육체적 활동에 국한되지 않으며, 행정이나 지원 업무 등 여성이 충분히 분담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노르웨이나 이스라엘과 같은 양성 징병제 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병역 문제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부재한 상황에서, 헌법에 위반한다는 판결이 나온 군 가산점 제도의 폐지와 같은 과거의 경험은 이들의 피해 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 세 가지 기둥은 서로 맞물리며 2030 남성들의 견고한 ‘피해자 정체성’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2030 남성과 여성이 사회의 핵심 문제를 진단하는 근본적인 전제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2030 여성 다수가 여전히 존재하는 구조적 성차별을 사회의 주요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요구하는 반면, 2030 남성 다수는 이미 성평등이 달성되었거나 오히려 남성이 차별받는다고 인식한다. 동일한 ‘성평등 정책’을 두고 한쪽은 ‘차별 시정’으로, 다른 한쪽은 ‘새로운 차별’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갈등은 ‘반작용의 연쇄’를 통해 증폭된다. 남성 측의 ‘역차별’ 주장은 여성 측에게는 ‘존재하는 차별을 지우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지며 더 강한 반발을 낳고, 여성 측의 ‘구조적 차별 해소’ 요구는 남성 측에게 ‘남성을 희생양 삼는 부당한 공격’으로 해석된다.
한쪽의 언어가 다른 쪽의 분노를 자극하는 악순환 속에서, 서로의 경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고 공통의 언어는 소멸한다. 이처럼 문제의 정의 자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합리적 토론이나 타협이 불가능해진다. 모든 논의는 한쪽의 이득이 다른 쪽의 손실로 직결되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며, 이는 정치적 양극화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다.
정치권은 이러한 균열을 해소하기보다는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특정 성별의 분노와 불안을 동원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지난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유력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을 내세워 2030 남성의 표심을 결집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복잡한 젠더 이슈를 단순한 구호로 환원하여 이들의 ‘피해자 서사’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갈등을 손쉽게 표로 연결한 것이다. 언론 또한 ‘이대남 vs 이대녀’, ‘젠더 전쟁’과 같은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현상을 중계하며, 건설적인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2030 남성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벼려지고 확산되는 핵심 공간은 ‘에펨코리아’,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 이른바 ‘남초 커뮤니티’다. 이 공간들은 단순한 정보 교환의 장을 넘어, 특유의 언어와 논리를 통해 하나의 완성된 이데올로기적 생태계를 구축한다. 이곳에서 그들의 집단적 정체성은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 아닌, 내부의 동질적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증폭되는 ‘반향실(echo chamber)’ 속에서 강화된다.
이들 커뮤니티의 담론을 분석하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적의 명확한 구성이다. 페미니즘은 이성적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사상 강요’이자 ‘세뇌 교육’이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폭력’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는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되며, 이들과 연관된 모든 것(여성가족부, 진보 정치인, 특정 시민단체 등)이 공격의 표적이 된다. 이러한 적대적 프레임은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의 비판을 ‘적들의 공격’으로 치부하며 무력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둘째, 독특한 ‘공정성’ 개념의 발명과 유포다. 이들은 구조적 불평등이나 역사적 맥락을 거세한 채, 오직 개인 간의 능력에 따른 경쟁과 그 결과의 절대적 수용을 ‘공정’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이 내세우는 ‘젠더 이퀄리즘(gender equalism)’ 혹은 ‘저울식 공정성’은 남성과 여성에게 모든 면에서 기계적으로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 논리 안에서 여성 할당제나 가산점 제도는 ‘공정’의 원칙을 파괴하는 특혜이자 남성에 대한 차별로 간주된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선진적 주체’라고 자임하며, 페미니즘을 오히려 성 평등을 저해하는 ‘구시대적이고 편향된 사상’으로 낙인찍는다.
셋째, 합리적 행위자로서의 자기 정체화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스스로를 편향된 기성 언론과 교육 시스템의 ‘세뇌’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달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위치시킨다. 이들은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중립 기어 박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실제로는 커뮤니티 내부에서 통용되는 ‘편향된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도덕적, 지적 우월감을 부여하며,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을 비이성적이거나 덜 깨어있는 존재로 폄하하는 논리적 기반이 된다.
남초 커뮤니티가 보여주는 강력한 온라인 응집력은 역설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고립과 파편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 디지털 공간들은 특정 이슈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나 특정 기사나 개인 유튜버의 콘텐츠에 대한 ‘좌표 찍기’(집단적 댓글 달기)와 같은 온라인상의 집단행동을 조직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했을 때, 이들 커뮤니티는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대응 전략을 논의하며 강력한 결집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온라인상의 연대는 현실 세계의 건설적인 사회 운동으로 이어지는 데는 명백한 한계를 보인다. 커뮤니티를 지배하는 냉소주의와 개인주의적 언어는 연대의 가능성을 잠식한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함?(누칼협)”이라는 밈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언어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한 개인의 고통을 온전히 그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환원시킨다. 이러한 담론 환경에서는 개인의 어려움을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구조적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는 ‘연대의 언어’가 자라나기 어렵다. 각자는 고립된 개인으로 남아,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공유할 뿐,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오프라인 연대를 구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포럼의 알고리즘적 특성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보와 의견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확증 편향’을 심화시키고, 자신과 다른 견해를 접할 기회를 차단한다. 이로 인해 커뮤니티 내부의 의견은 점점 더 극단화되고, 외부 세계와의 인식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이 폐쇄적인 정보 생태계 안에서 이용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곧 사회 전체의 여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며, 이는 현실 정치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이어진다. 결국 온라인에서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세대 및 집단과 소통하고 타협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형성하는 통로와 경험이 부재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해 볼 때, 남초 커뮤니티는 단순한 의견 교환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정체성 제조 공장’으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공간은 세상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 명쾌한 진단(‘당신은 억울한 피해자다’), 명확한 가해자(‘모든 문제의 원흉은 페미니즘이다’),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기준(‘기계적 공정만이 정의다’), 그리고 상처를 위로하고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공동체(‘우리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를 한 세트로 제공한다.
이 강력하고 매력적인 이데올로기적 생태계는 그곳에 속한 개인의 세계관과 자아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 생태계를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의견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망 전체를 부정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된다. 이는 이 현상이 외부의 비판이나 합리적 반박에도 불구하고 쉽게 와해되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커뮤니티의 논리를 의심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30 세대의 정치적 분기는 단순히 현실 세계의 경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주로 서식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적 구조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조되고 있다. 남성 중심 커뮤니티와 여성 중심 커뮤니티는 단순히 이용자의 성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처리하는 운영체제 자체가 다르다.
남초 커뮤니티의 핵심 작동 원리는 앞서 말한 “누가 칼 들고 협박함?(누칼협)”이라는 밈으로 압축된다. 이는 단순한 냉소적 유행어를 넘어,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 환경, 비싼 집값 등 모든 종류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선택과 능력 부족의 결과로 환원시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다.
이러한 논리 아래에서 연대는 불가능해진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 공감과 위로 대신 그의 어리석은 선택을 조롱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이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경쟁, 그리고 깊은 냉소주의를 조장하며,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을 막는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디시인사이드나 에펨코리아와 같은 남초 커뮤니티의 구조는 대개 개방적이고 익명성이 높으며, 대립적인 소통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낮은 신뢰의 환경은 진솔한 감정의 공유를 억제하고, 조롱과 혐오가 쉽게 확산되는 토양을 제공한다.
남초 커뮤니티의 ‘누칼협’ 문화와 정반대 지점에는 여초 커뮤니티의 ‘총대 메기’ 문화가 있다. ‘총대’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예: 여성혐오적 광고, 특정 사건의 법적 대응)가 발생했을 때, 자발적으로 총대를 메고 모금, 법률 지원, 집단 항의와 같은 공동 대응을 이끄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는 공동체 내부에 강력한 ‘연결 조직’을 형성한다. 이는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문제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세계관을 사회화시킨다.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신뢰와 호혜성, 그리고 강력한 내부자 정체성이 구축된다. 더쿠, 여성시대와 같은 여초 커뮤니티는 대부분 가입 절차가 까다롭고(주민등록번호 인증, 가입 기간 제한 등) 폐쇄적으로 운영된다. 이러한 높은 진입 장벽은 외부의 분탕이나 스파이 활동을 막아 내부 구성원들이 안심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고 집단행동을 조직할 수 있는 높은 신뢰의 환경을 조성한다. 이 구조적 특성이 ‘총대 문화’가 번성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된다.
이처럼 상반된 온라인 공간의 사회 물리학은 2030 남녀의 정치적 분기를 가속하는 핵심 엔진이다. 한쪽은 구조적 비판을 개인의 실패로 치부하며 개인을 원자화시키는(‘누칼협’) 반면, 다른 한쪽은 집단 정체성을 구축하고 공동 대응을 촉진하는(‘총대’)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디지털 공간의 구조는 그곳에서 논의되는 ‘내용’보다 더 강력하게 양극화를 추동한다. 이는 단순히 의견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논리 자체가 양립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2030 남성들이 온라인에서는 강력한 응집력을 보이지만 오프라인에서는 파편화되는 현상과 2030 여성들이 온라인의 연대를 오프라인의 강력한 동원력으로 전환시키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해준다. 한쪽의 온라인 공간은 현실 세계의 집단행동에 필요한 신뢰와 기술을 잠식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이를 적극적으로 배양하기 때문이다.
한국 2030 남성의 우경화는 결코 한국만의 고립된 현상이 아니다. 이는 미국,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관찰되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다. 젊은 세대 내에서 남성은 보수적, 우경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여성은 진보적 성향을 강화하면서 성별에 따른 정치적 분기가 심화되는 ‘거대한 젠더 분기(The Great Gender Divergence)’가 새로운 시대적 특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현상의 기저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동인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경제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비관이다.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많은 국가에서 청년들은 안정적인 일자리, 주택 마련, 자산 형성 등 전통적인 성공의 사다리가 붕괴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정성과 박탈감은 기성 정치 시스템에 대한 깊은 환멸로 이어지는데, 남성과 여성이 이 환멸을 표출하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둘째, 진보적 젠더 정치에 대한 반작용이다. #미투 운동과 같은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은 전 세계적으로 젊은 여성들의 정치 의식을 고양시키고 진보적 가치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젊은 남성들은 이러한 변화를 자신들의 지위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며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성세대의 남성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를 부당하게 치르고 있으며,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로 비난받고 사회적으로 소외된다고 느낀다.
셋째, 온라인 ‘맨오스피어(manosphere)’의 부상이다. 앤드루 테이트(Andrew Tate)와 같은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은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는 젊은 남성들에게 명쾌하고 매력적인 대안적 서사를 제공한다. 이들은 극단적인 남성성을 찬양하고, 페미니즘을 조롱하며,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지배력을 강조함으로써 젊은 남성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소속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는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담론을 특정 사용자 그룹에 집중적으로 확산시키며, 극우 포퓰리즘이 자라날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이러한 공통된 흐름 속에서 각국의 청년 남성 우경화는 고유한 정치적 형태로 발현된다. 미국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도널드 트럼프와 공화당에 대한 지지로 결집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독일에서는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넷 우익(ネット右翼)’으로 불리는 온라인상의 국수주의자들이 혐한·혐중 정서를 확산시키며 보수 정치세력의 온라인 기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이대남 현상’은 세계적인 청년 우경화라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더욱 증폭된 형태로 나타나는 독자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글로벌 청년 우경화’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한국의 ‘이대남 현상’은 몇 가지 독특하고 강력한 ‘증폭 요인’들로 인해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의 격렬함과 정치적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징병제이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 병역은 직업군인 제도로 전환되었거나, 징병제를 유지하더라도 성 중립적으로 운영되는 추세다. 그러나 한국에서 징병제는 여전히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에게 부과되는 보편적이고 국가가 강제하는 성별 특정적 의무다. 이는 2030 남성들이 느끼는 ‘성별에 따른 불공정’에 대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약 18개월의 복무 기간은 단순히 시간을 ‘허비한다’는 느낌을 넘어, 사회 진출의 출발선에서부터 여성 동기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명백한 경쟁적 불이익으로 인식된다. 이처럼 국가 시스템에 의해 제도화된 성별 불평등 경험은, 다른 사회적 이슈에서도 젠더적 관점으로 문제를 해석하게 만드는 강력한 렌즈 역할을 한다.
두 번째 요인은 극심한 생존 경쟁 문화다. ‘입시 지옥’으로 불리는 대입 경쟁부터 ‘바늘구멍’에 비유되는 취업 경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청년들은 어린 시절부터 무한 경쟁과 서열화에 내몰린다. 이러한 환경은 세상을 ‘누군가의 인권이 강화되면 나의 권리를 빼앗긴다’는 ‘제로섬 게임’의 장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누군가가 이기면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냉혹한 경쟁의 논리가 내면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로섬 사고방식은 젠더 관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여성의 권리 신장을 ‘남성의 파이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소수자 정책을 ‘나의 기회를 박탈하는 불공정한 특혜’로 여기게 만든다. 공감과 연대보다는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미덕이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분노는 자신보다 더 약한 상대를 향하기 쉬운 구조가 형성된다.
세 번째 요인은 압축적 근대화의 모순된 유산이다. 한국 사회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은 생계부양자’라는 전통적 가부장제 규범은 여전히 사회적 기대와 남성 자신의 정체성 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의 확산으로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소득 격차는 심화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2030 남성들은 기성세대로부터 ‘남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역할 모델을 강요받으면서도, 정작 그 역할을 수행할 경제적 기반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취약한 모순적 상황에 놓여있다. 이상과 현실의 거대한 괴리는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낳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성세대가 구축한 시스템의 혜택은 누리지 못하고, 그 시스템이 요구하는 책임과 부담만을 떠안고 있다는 강한 피해 의식을 갖게 되며, 이는 기성세대와 사회 전체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이 세 가지 한국적 특수성은 글로벌 우경화의 공통 동인들과 결합하여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경제적 불안은 제로섬 경쟁 문화와 만나 젠더 갈등을 격화시키고,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징병제라는 구체적 불만과 결합하여 폭발력을 갖는다. 이처럼 복합적으로 얽힌 요인들이 한국의 2030 남성들을 세계적으로도 가장 정치적으로 분노하고, 가장 젠더 갈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집단 중 하나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30 남성들의 집단적 분노와 정치적 우경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분석을 넘어 그들의 심리적 동인을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이들의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도발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가설 중 하나는 바로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심리적 학대 행위를 일컫는다. 이 개념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면, 특정 집단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부당함의 현실을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이 체계적으로 부정하고 왜곡함으로써, 해당 집단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인식을 불신하게 만들고 심리적 혼란과 고립을 겪게 하는 현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2030 남성들은 이러한 사회적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 불안정한 미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실존적 고통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병역 의무, 할당제 등에서 비롯된 불공정하다는 인식 또한 그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성 언론, 정치권, 그리고 사회의 주류 담론은 이들의 고통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종종 ‘특권 계층의 엄살’, ‘여성혐오에 기반한 이기주의’, ‘공정성에 대한 왜곡된 집착’으로 치부하며 평가절하한다. “너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났고, 여전히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너희가 느끼는 박탈감은 정당하지 않다”는 메시지가 사회 곳곳에서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발신된다.
이러한 상황은 2030 남성들에게 극심한 인지 부조화를 유발한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은 이토록 생생한데, 사회는 그 고통이 실재하지 않거나 부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 인식의 체계적인 부정은 주류 사회와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낳는다. 학교, 언론, 정부 등 사회의 모든 공식적인 기관이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의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가스라이팅은 역설적으로 극우 포퓰리즘과 대안 우파 이데올로기가 파고들 수 있는 결정적인 심리적 공백을 만들어낸다.
주류 사회가 그들의 고통을 부정하고 비난할 때, 남초 커뮤니티와 우파 유튜버들은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진다.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 잘못되지 않았어. 너의 고통은 진짜야. 세상이 썩었고, 페미니스트들과 좌파들이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이 메시지는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이들에게 강력한 해방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자신의 주관적 현실을 마침내 인정해주고, 그 고통의 원인을 명확하게 지목해주며, 분노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세력을 만났을 때, 이들은 그 서사에 열광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결국, 2030 남성들의 극단적인 정치 성향은 그들 내면의 비합리성이나 비도덕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현실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가스라이팅 사회’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자, 심리적 생존을 위한 탈출구 모색의 결과물일 수 있다.
이들의 급진화는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고통을 공감해주기를 거부했을 때 나타나는, 예측 가능한 심리적 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현상을 ‘문제적 집단’에 대한 단죄의 시각에서 벗어나, ‘문제를 겪고 있는 집단’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근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필수적인 분석적 단계다. 그들의 분노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분노를 잠재울 어떠한 방법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통합과 공존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은, ‘어떠한 형태의 혐오표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대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 집단을 겨냥한 비난이나 공격을 넘어, 우리 사회 공론장의 건강성과 모든 구성원의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혐오표현은 단순히 불쾌한 말을 넘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켜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하는 사회적 해악이다.
물론 혐오표현 규제는 표현의 자유라는 또 다른 핵심적 가치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접근을 요구한다. 혐오표현 규제가 자칫 사상과 의견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타당하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며, 타인의 권리와 명예,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할 경우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은 국내 헌법과 국제인권규약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핵심은 규제 자체가 아니라, 규제의 목적과 방식이다. 혐오표현 규제는 특정 의견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안전한 공론장을 만들기 위한 목적, 즉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형사처벌 위주의 강경한 사법적 규제 강화만이 아니다. 오히려 형사처벌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을 위한 형성적 규제와 자율 규제에 힘을 쏟아야 한다. 국제앰네스티와 같은 단체들은 혐오표현에 맞서는 ‘대항표현(counter-speech)’과 긍정적 가치를 담은 ‘대안적 내러티브(alternative narrative)’의 확산을 중요한 해법으로 제시한다. 이는 혐오의 논리를 반박하고,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연대의 목소리를 키워 혐오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혐오표현을 처벌하는 법이 아니라, 무엇이 차별이고 무엇이 혐오인지를 명확히 하는 사회적 기준을 제시하고, 플랫폼 사업자들이 혐오 콘텐츠에 대응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 법적 근거의 부재를 이유로 혐오표현 규제에 소극적이었던 온라인 플랫폼들의 자율 규제를 촉진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혐오에 대한 무관용 원칙은 법 조항 몇 개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캠페인, 시민 사회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2030 남성들의 고립과 우경화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유사한 도전에 직면하여 다양한 정책적 실험을 진행해 온 해외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특히 독일과 노르웨이의 탈급진화 및 사회 통합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독일은 극우 및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리고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다층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Live Democracy!’와 같은 연방 프로그램을 통해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고, 실제 프로그램 운영은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비정부기구(NGO)들이 맡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HAYAT’는 극단주의에 빠진 청소년의 가족을 상담하고 지원함으로써, 가족 관계의 회복을 통해 개인의 탈급진화를 돕는 혁신적인 접근으로 주목받는다. ‘폭력예방네트워크(Violence Prevention Network)’는 교도소에 수감된 극단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상담과 교육을 제공하여, 이들이 폭력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사회에 재통합될 수 있도록 돕는다.
독일 사례의 핵심은 급진화를 범죄 문제가 아닌 사회적·심리적 문제로 인식하고, 처벌보다는 상담, 교육, 관계 회복과 같은 소프트한 접근을 통해 개인별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교육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2011년 극우 테러범 아네르스 브레이비크의 끔찍한 학살을 경험한 노르웨이는, 이를 계기로 ‘급진화와 폭력적 극단주의 방지를 위한 국가 행동 계획’을 수립하고 ‘사회 전체적(whole-of-society)’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이 접근의 핵심은 ‘조기 예방’과 ‘다기관 협력’이다. 경찰, 학교, 보건·복지 기관, 지방자치단체 등 사회의 모든 관련 기관이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하여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입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특히, 청소년들이 극단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청소년들이 소속감과 긍정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스포츠, 시민 활동 참여를 지원한다. ‘Youth Civil Activism Network(YouthCAN)’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청년들이 직접 폭력적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의 주체가 되도록 장려하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이들 국제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청년의 고립과 급진화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연결’과 ‘지원’에 있다. 극단주의 이념이 제공하는 왜곡된 소속감과 목적의식을 대체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해주고, 이들이 겪는 심리적 어려움과 현실적 문제에 귀 기울여주는 신뢰 기반의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벌과 배제는 오히려 이들을 더욱 깊은 고립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2030 남성들의 우경화와 사회적 고립, 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처방을 넘어,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첫째, 청년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기존의 청년 정책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경제적 지원에 과도하게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2030 남성들이 겪는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의 부재를 넘어, 극심한 경쟁 압박, 사회적 고립, 심리적 불안정, 관계의 단절 등 다차원적이다. 따라서 청년 정책은 고용, 주거, 복지를 넘어 정신 건강 지원, 사회적 관계망 형성, 문화 및 여가 활동 지원, 삶의 전환기 상담 등 청년의 삶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생애주기 지원 시스템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중요한 공중 보건 및 사회 정책의 의제로 설정하고, 이를 예방하고 지원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실태조사와 맞춤형 개입 프로그램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제로섬 게임식의 '역차별' 논쟁에서 벗어나, 청년 세대 전체가 겪는 불안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젠더에 무관하게 모든 청년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주거 안정화, 제로섬 경쟁을 완화하는 교육 시스템 개혁, 그리고 보편적 사회안전망 확충을 의미한다.
또한, 병역 의무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복무에 대한 정당한 보상, 복무 기간 동안의 경력 개발 기회 제공, 그리고 성 중립적 국방 의무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포함한 진지하고 선의에 기반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2030 남성들의 핵심적인 불만을 정당화시켜줄 뿐이다.
둘째, 분열의 언어를 넘어 연대의 언어를 복원해야 한다. 정치권과 언론은 젠더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2030 남성들의 고통과 박탈감을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소비하며 갈등을 증폭시키는 대신,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정당한 문제의식(공정성, 병역 문제 등)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정치 지도자, 언론, 교육계는 정당한 불만과 유해한 이데올로기를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젊은 남성들이 느끼는 실제 경제적 고통과 불공정함은 진지하게 경청하고 인정하되 , 그것이 여성혐오나 소수자 배제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호하게 비판하고 반박해야 한다.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이 내리는 왜곡된 결론(여성혐오, 극단주의)을 정당화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겪는 구조적 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지하면서 남성들의 모든 우려를 단순한 '백래시'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당신들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해법은 타인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연대에 있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며, 제로섬 게임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연대의 언어’를 만들어가야 한다.
셋째, 건설적인 소통을 위한 새로운 ‘광장’을 구축해야 한다. 현재의 온라인 공간은 알고리즘에 의해 분열되고 혐오와 조롱이 난무하는 ‘닫힌 반향실’이 되어버렸다. 이를 대체하고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이 필요하다. 정부와 시민사회는 극단적인 주장이 아닌 합리적인 토론이 우대받는 공공 온라인 플랫폼을 조성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하여 청년들이 가짜뉴스와 선동에 저항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만나 취미, 봉사, 학습 등 공동의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과 프로그램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독일의 ‘다세대의 집’처럼 성별과 세대를 넘어 다양한 배경의 청년들이 취미, 봉사, 학습 등 공동의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오프라인 커뮤니티 공간과 프로그램을 국가적 차원에서 대폭 확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2030 남성들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한 세대의 절반이 고립되고 분노하는 사회에 밝은 미래는 없다. 청춘이 더 이상 ‘낭비’되거나 ‘고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모든 청년이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가능성을 존중받으며 안전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다. 이는 단순히 한 세대를 구제하는 것을 넘어, 분열된 공동체를 다시 잇고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맺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만이 비로소 우리는 청년이 ‘차라리 노인이 되고 싶다’라는 자조와 냉소 대신, ‘살아보고 싶은 미래’를 꿈꾸는 건강한 청춘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