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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들의 포옹

이재명과 룰라, 그들이 그리는 새로운 세계의 서사.

by 조하나


세상은 때로 놀라운 ‘동시성(synchronicity)’으로 우리를 전율케 한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시작된 두 개의 이야기가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된 것처럼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 우연에 담긴 필연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2025년 6월, 캐나다의 G7 정상회의장에서 마주한 두 사람, 대한민국의 이재명 대통령과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의 포옹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도자들의 만남이 아니었다. 빈곤과 노동의 상처를 몸에 새긴 채 역경의 강을 건너온 두 명의 ‘아웃사이더’가 기득권의 심장부에서 나눈, 말 없는 대화였다.




17501986851750198685_yjj2001_origin.jpg 2025 G7 정상회의에 초대된 대한민국 이재명 대통령과 브라질 룰라 대통령





몇 년 전, 브라질의 정치적 격변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를 보며 느꼈던 깊은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기억한다. 거대한 기득권, 즉 정치, 사법, 언론이 얽힌 ‘카르텔’에 맞서 싸우다 추락하고 부활하는 룰라의 모습에서, 나는 지구 반대편 한국의 정치인, 이재명을 떠올렸다.






사회의 아웃사이더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로


한 사람의 정치는 그의 삶이라는 대지 위에 피어나는 꽃과 같다. 이재명과 룰라, 두 사람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몸에 새겨진 상처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재명의 정치적 원점은 경상북도 깊은 산골, 화전민 마을의 가난과 경기도 공장의 소음 속에 있다. 학교 대신 공장을 택해야 했던 소년공은 프레스기에 팔이 끼이는 산업재해를 겪었고, 그 뒤틀린 팔은 한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자 동시에 훈장이 되었다. 그 상처는 단순히 개인의 불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압축 성장의 신화 아래 신음하던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증언하는 ‘정치적 텍스트’ 그 자체다. 그의 지지자들이 그 상처에서 배신하지 않을 진정성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 룰라의 삶도 놀랍도록 평행선을 그린다. 브라질 북동부의 굶주림을 피해 상파울루 공장 지대로 흘러든 소년 룰라 역시, 공장 사고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비극은 가난과 열악한 의료 시스템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한꺼번에 잃은 사건이었다. 이 깊은 상실감은 사적인 슬픔을 넘어, 한 국가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되었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침묵을 온몸으로 겪은 그는, 그들의 목소리가 되기로 결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lula.png 소년공 시절,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은 룰라


maxresdefault.jpg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상대가 '군 면제'로 공격하자 소년공 시절 입은 장애를 직접 보여줘야 했던 이재명




두 사람의 몸에 남은 상처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왜 정치를 해야만 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자격 증명서가 되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세상을 함께 구원하는 존재다. 그들은 안전한 특권의 성채에서 고고하게 세상을 논하는 엘리트들과는 태생부터 다른 리더십의 원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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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공 출신 이재명(좌)과 노동당 지도자 출신 룰라(우)






공동의 적, ‘카르텔’이라는 괴물


두 지도자의 여정은 그들이 맞서 싸워온 적의 모습마저 닮아있다. 브라질에서 통용되는 ‘카르텔’이라는 개념은 놀랍게도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룰라의 노동자당 정부가 ‘보우사 파밀리아’와 같은 혁신적인 빈곤 퇴치 정책으로 수많은 브라질 국민을 가난에서 구했을 때, 기득권 카르텔은 위협을 느꼈다. 재계 엘리트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류 언론,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된 사법/검찰 기관은 연합하여 룰라를 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고, 결국 감옥에 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는 ‘사법 전쟁’이라는, 법을 무기로 정적을 제거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추악한 위협이다.


이재명이 걸어온 길 또한 끊임없는 ‘사법 리스크’와의 투쟁이었다. 성남시장 시절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를 향한 수사와 언론의 공세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회피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이를 ‘카르텔의 실체를 국민에게 알리는 소통의 기회’로 전환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각각의 수사는 그가 맞서 싸우는 거대한 적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교육의 장이 되었고, 지지자들은 그의 싸움을 곧 자신의 싸움으로 여기며 더욱 강력한 연대를 구축했다.


이처럼 브라질과 한국, 전혀 다른 두 나라에서 기득권의 ‘면역 반응’이 놀랍도록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부와 권력의 근본적인 재분배를 시도하는 ‘아웃사이더’ 지도자가 등장할 때,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하고 저항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따라서 G7에서 만난 이재명과 룰라는, 통역 없이도 서로의 상처와 투쟁의 문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동지’였던 것이다.





두 개의 강은 하나의 바다로 흐른다


물론 두 지도자의 길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룰라의 힘이 노동조합과 노동자당이라는 조직화된 대중 기반에서 나온다면, 이재명의 힘은 그의 독특한 개인적 서사와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 능력에 더 크게 의존한다. 룰라의 ‘보우사 파밀리아’가 절대 빈곤층을 겨냥한 선별적 복지 정책의 성공 모델이라면, 이재명의 ‘기본소득’ 구상은 사회 전체의 불안정에 대응하는 보편적 복지의 비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서사는 결국 ‘더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이라는 하나의 바다를 향해 흐른다. 흙수저 소년공에서 시작해, 법이라는 무기로 약자를 옹호하고, 기득권의 총공세 속에서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그들의 궤적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추락과 부활이라는 서사를 완성한 룰라의 귀환처럼, 이재명의 여정 역시 수많은 시련을 통해 더욱 단단해졌다.


그들의 포옹은 G7이라는 전통적인 선진국 클럽의 무대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와 ‘글로벌 중추 국가’의 새로운 역할론을 선언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더 이상 도움을 구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낡은 세계 질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로서 그들은 그곳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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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G7 정상회의에 초대된 대한민국 이재명 대통령과 브라질 룰라 대통령





희망은 언제나 변방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삶이 때로 버겁고, 세상의 부조리에 좌절할 때가 있다.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재명과 룰라, 지구 반대편에서 온 두 개의 거울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희망은 언제나 가장 어둡고 낮은 곳,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진흙 속에서도 기어이 꽃은 피어난다는 것을.


G7 회의장에서 나눈 그들의 포옹은, 이제 리더십의 정의가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선언이다.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은 화려한 학벌이나 가문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치열한 투쟁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들의 만남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상처가 낙인이 되는 사회인가, 아니면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를 보듬고 치유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동력이 되는 사회인가. 두 지도자의 서사는 이미 그 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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