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난’에는 증명을, ‘부’에는 숭배를 요구하는 나라

김민석의 2억과 주진우의 70억.

by 조하나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정치라는 무대 위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연극이 상연되곤 한다. 한쪽 배우에게는 얼룩 한 점 없는 순백의 의상을 요구하며 그의 모든 발걸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만, 다른 쪽 배우에게는 황금으로 치장한 갑옷의 무게를 당연한 권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왜 한쪽의 가난은 의심하고 증명하라 다그치면서, 다른 한쪽의 부(富) 앞에서는 쉽게 침묵하고 복종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사회의 정신에 깊이 새겨진 두 개의 서로 다른 도덕적 잣대와 생존 논리에 관한 이야기다. 이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걸어온 판이한 역사, 그들이 대중과 맺어온 상이한 약속에서 비롯된 구조적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순수성의 정치, 진보가 짊어진 멍에


한국의 진보는 서구처럼 단순한 경제적 이념의 산물이 아니다. 그 정체성은 불의한 군사독재의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횃불을 들었던 도덕적 저항의 역사 그 자체다. 그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자산은 권력도 돈도 아닌, ‘깨끗한 손’과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명분이었다. 진보(進步)란 본디 사회의 발전뿐 아니라 ‘덕(德)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들은 민주화 이후 제도권에 들어올 때 그 도덕적 순수성이라는 무거운 유산을 어깨에 짊어지고 와야 했다.





이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면서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멍에가 되었다. 진보 정치인의 도덕적 실패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라, 그의 존재 이유와 그가 속한 진영의 역사 전체를 뒤흔드는 근본적인 파괴가 된다. 지지자들은 그들에게 유능함 이전에 윤리적 우월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은 이 구조의 정점을 보여준다. 가난을 딛고 기득권에 맞선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가족이 돈을 받았다는 의혹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법적 처벌의 두려움을 넘어 자신이 쌓아 올린 도덕적 세계가 파괴되는 데서 오는 깊은 수치심의 발로였다.


故 노회찬 의원의 선택 또한 다르지 않다. 4천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은 대가성 없는 돈이었다고 항변했지만, 그 작은 액수조차 진보의 ‘순수성’이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공동체 전체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대의에서 오염된 자신을 덜어내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책임을 졌다.





이처럼 진보에게 도덕성은 지켜야 할 가치인 동시에, 상대를 공격하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조국 사태’에서 ‘내로남불’이라는 프레임이 그토록 강력했던 이유는, 공격의 핵심이 부패 그 자체가 아니라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기반으로 세워진 정치 운동에 위선이라는 혐의는 그 어떤 공격보다 치명적이다. 언론은 검찰이 던지는 정보를 받아쓰며 그를 ‘위선자’로 낙인찍었고, 그 보도의 양과 집요함은 보수 진영 인사를 둘러싼 의혹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권력의 정치, 보수가 누리는 특권


반면, 한국 보수주의의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다. 해방 직후, 친일 부역자를 청산하려던 반민특위의 좌절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반공’이라는 절대적 가치 아래, 도덕적 정당성보다는 권력과 안보, 실용이 우선시될 수 있다는 암묵적 합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 정권은 민주주의 대신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을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았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부패나 인권 탄압은 국가 목표를 위한 부수적 비용으로 치부되었다. 보수에게 정치는 도덕적 순결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국정 운영’이라는 실용적 과업이자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투쟁의 장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보수 지도자들에게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스캔들 앞에서 좀처럼 수치심을 드러내거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두환의 "전 재산 29만 원" 발언,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 보복’ 프레임,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가짜뉴스’ 공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략은 일관되게 ‘버티기’와 ‘반격’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며, 적에게 영토를 내주는 패배로 간주된다.





이들에게 스캔들은 도덕 시험이 아니라 정치 전쟁의 한 전투다. 목표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발자를 무력화하고 지지층을 결집시켜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다. 지지자들 역시 이러한 논리를 공유한다. 그들에게 지도자에 대한 도덕적 공격은, 안보와 자유 시장이라는 진영의 핵심 가치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된다. ‘더 나쁜’ 대안인 진보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우리 지도자의 흠결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부정적 당파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제20대 대선은 이 모든 역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윤석열 후보와 배우자 김건희, 장모 최은순 등 그 가족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리했다. 많은 유권자는 그의 도덕성 문제에 ‘그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했거나, 정권 교체라는 더 큰 대의를 우선시했다. 이는 보수 유권자들이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가치 체계 속에서 질서, 힘, 그리고 이념적 승리가 개인의 도덕적 순수성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다른 저울, 다른 운명


결국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생존 논리를 목도한다. 진보는 끊임없이 통치할 ‘도덕적 권리’를 증명해야 하고, 스캔들은 곧 그 정당화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들의 반응은 자기성찰과 사죄, 때로는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이어진다. 반면 보수는 권력을 지키고 상대를 ‘지배’하는 것이 목표이며, 스캔들은 이겨내야 할 전투일 뿐이다. 그들의 반응은 부인과 반격, 그리고 힘의 과시다.






이 비극적인 비대칭성은 우리 민주주의를 서서히 잠식한다. 정치는 정책 대결이 아닌 도덕성 공격의 장으로 변질되고, 대중의 냉소는 깊어진다. 진보는 위축되고 보수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기울어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진보는 깨지기 쉬운 순수성의 멍에를 벗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보수는 권력이라는 특권 뒤에 숨지 않고 스스로 윤리적 책임을 묻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