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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나씨 Apr 05. 2023

나는 절대 쿨하거나 둔하지 않았다.

H성인상담4기 트라우마 치료와 기법 수업 중

우리 몸은 당연하게 본인의 감정을 수용하여 반응한다. 여기서의 반응, 내가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반응은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생리적인 반응이 아닌,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이 안온다거나, 소화가 안된다거나 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 당연한 이치를 수업시간에 전문가를 통해 들으니 무진장 새로웠다. 그리고 무언가 글을 써야만 한다는 느낌이 왔다. 과제도 아닌데 말이지.


전쟁통에는 여자들이 스트레스때문에 생리를 잘 안했다는 통계가 있다고, 그리고 본인의 어떤 내담자는 수년간 안한적도 있었다고 했다. 흠... 나도 대학생 시절부터 생리불순이 심할때는 호르몬 주사도 맞아봤다. 지금도 그렇다. 규칙적으로 잘 할때는 하는데 조금 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곧 반응이 온다. 이건 내 자의로 조절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냥 몸이 감정을 받아들여 반응했을 뿐이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더 많다. 진!!!짜!!급한 밀린 업무가 있는 경우, 이건 진!!!짜!! 오늘까지 끝내야된다는 업무라고 나 자신이 명명한 경우(이렇게까지 급하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원래 뭘 미리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진짜 급한거다. 정말 목전까지 왔다는 뜻이다. 갈때까지 갔다는 뜻이다.) 다 하기 전까지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 일이 밀려있는 상태에서 먹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먹는둥 마는둥.. 먹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뱃속이 비어야(?) 머릿속이 잘 돌아간다고 강렬하게 느껴온지 수십년이 지났다.


그리고 뭐 약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나에게 항생제를 기꺼이 투약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방광염도 그렇고... 어릴 때에 비해서 머리숱은 왜 이렇게 줄었으며... 그 외 굳이 적지 않아도 되는 숱한 증거들.... 반복되니 심각한거라고 인지하지 못해왔는데 제3자의 입에서 스트레스에 민감한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는 예시를 듣고나니 운전 잘하고 가는데 갑자기 반대편 차선에서 짱돌이 날아온 기분이었다.


띠용



뭐야... 결국... 나 엄청 예민한 애였네... 특히 이게 비단 최근만의 일이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었던 거였네? 몸이 그렇다고 반응해 왔었음을 나는 왜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가...


그래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더라. 좀 오바해서 표현하면 나는 사회가 만들어낸 피해자라는 것.


어릴적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빨랐던 나는 키도 컸고(지금은 쪼꼬미지만), 대체 뭘 먹고 자랐는지 통뼈를 보유한 큰 골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남다른 체육적 재능을 발휘하여 자의가 아닌 타의로 초중딩시절 육상선수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한창 성장하는 시기에 다른 친구들보다 시즌때에는 1~2시간 먼저 등교하여 운동장을 뛰고 요새 남들은 돈주고 하는 PT스러운 운동들을 했었다(그래서 헬스 및 PT는 절대 안함. 왜 내 돈주고 단체기합을 받음?). 현재의 탄탄한 근육질 몸매-_-는 그때 다져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둘,셋, 하나! 하나,둘, 셋! 둘! -ㅠ- 마지막 번호는 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살을 쪽 뺀다해도 타고난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절대 여리여리한 몸매로 거듭나지 못할 것임을 나는 주욱 인지하고 있었다는 거. 뭐 실제로 그렇게 살을 뺐었던 경험 역시 독하지 못했기에 있지도 않음.


여리여리하지 못한, 평균 혹은 평균과 통통사이의 몸을 보유해왔던 나에게 예민함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왔다. 한창 몸무게 피크를 찍던 20대때 사진속에는 후덕해보이는 아주머니가 계신다. 모르는 사람이 길을 물어볼 때 아줌마라고 불렸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주변에 좀 불평을 했을지 몰라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것. 사회에서 여리여리한 사람은 예민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성격이 좋다라는, 보편적 통념을 학습한 결과라고 해야할까? 화를 내지 못하는,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스라이팅을 당한 셈.


또한 여리여리한 사람들은 약삭빠른 여우로 묘사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둔한 곰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곰이 좋았다. 왠지 여우는 얄미워 못되 보이잖아! 나는 착한편에 서겠어.

안녕? 반가워~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근데... 이것도 현실과 타협한 결과였을거라고 생각하니 슬퍼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솔직히 여우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뭔가 받을 꺼 다 받고 대접받으면서 온갖 실속들을 챙겨가면서 잘 먹고 잘 살것 같은 그런 이미지. 그래서 여우이고 싶었지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판단한데에는 지금 계속 반복한 것 처럼, 실제 성격이나 성향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학습해왔던대로 외모가 90% 이상의 역할을 했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고로 여우과에 속하는 동물이란, 우선 여리여리하게 여성스러워야 하니까..... 그러니 나랑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우같은 가시내'들한테 가끔은 늘 당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포기하고 '곰처럼 둔하다!'며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눈치가 좀 빠른 편이고 잔머리를 또르르 굴리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다. 둔하긴 뭐가 둔해? 그러네.. 나 절대 안 둔하다.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이 뭐가 둔해? 둔한 척 하는 거면 모를까.. 둔한게 아니라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하는 멀티플레이어를 표방하는 까닭에 정신머리가 분산되서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곤 하는 산만한 사람인 것이고, 게을러서 그리고 귀찮아서 꾸미는 것에 신경을 굳이 쓰지 않는 것이며, 시간낭비가 싫어서 속은 터져나갈지라도 사람들이랑 싸우기보다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을 선택할뿐인것을. 이런게 과연 '둔함'과 같은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노. 절대 아니라고 생각함. 본질이 확실히 다르다. 산만하고 게으르고 매사를 귀찮아하고 시간낭비를 싫어하는 사람둔하다고 부르지는 않잖아?



그리고 나는 내가 무진장 쿨한 사람인 줄 알았다. 굳이 주변에 알리지 않아도 모두 그런 줄 알고 있고. 이 '쿨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매력때문인지 "너 참 쿨한데!" 라는그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쿨하다는 평가는 내게 큰 정신적 보상으로 다가와서 본연의 예민함은 어딘가로 숨겨버리고 말았다. 몸이 그렇게 살려달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도!



뭐가 좋다고 ㅊ..웃고있나..


사소한 것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둔함.

사소한 것들은 개의치 않는 쿨함.

둘다 정신건강에 참으로 보약이 되는 테마다. 뭐.. 나도 내가 그런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는 것. 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진장 예민한 사람이었다고!

대체 나를 왜 이렇게 만든 것이냐고?!


사실 나와 엄청 많이 가까운 가족들은 이미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참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사회에서 쓰고 있던 쿨하고 둔한 가면을 굳이 그들 앞에서 까지 쓰고 있을 필요는 없었을테니까 온갖 티를 내며 살았겠지. 그래서 자주 들곤 했던 죄책감이 있다. 근데 이 죄책감의 내면에는 '이렇게 유별나게 예민하게 굴면 안되는데'라는 부분이 있다. 그들에게 분명 미안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의 포인트는 '내가 다른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사 예민하게 생각하다보니 큰 죄를 짓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가 아니라, "실수한 것이 있다면 사과드리며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근데 또 예민하게 굴지도 몰라요. 안타깝지만 이게 제 성격인가봅니다. 그래도 아니까 참 다행이죠?" 가 되어야 한다는 것. '예민함' 자체가 무슨 석고대죄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잘못인 것처럼, 그래서 내게서 삭제해야될 부정적인 요소라고 인식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자꾸 부정적인 요소로만 생각해다보니 직면하지 못하고, 수면위로 꺼내지를 못하고 꾹꾹 누르고만 있는 게 아니겠니.. 그냥 이제 눈치보지말고 꺼내서 보여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자.


예민한건 예민한 것이다. 예민하니까 몸이 반응하고 그만큼 다른사람들에 비해 나 자신이 더 잘 챙기고 위해줘야 하는 것이다. 근데 그러기는 커녕 억압하는 방어기제가 발휘되어 저 아랫속에 꿍꿍 숨겨놓고 가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터트리는 미련한 행동을 반복해 왔다는 것. 요새 느끼고 있지 않나? 어릴적 그리고 젊었을때에 비해 인내심도 더 없어지고 거슬리는 것도 더 많아지고 그래서 감정적인 폭발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는 것. 실은 나이를 거꾸로 드셔서 그런게 아니라 억압되어 있던 예민예민함들이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라는 것.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예민함이 발동되어 넘치고 터지고 있다는 것.



푸왕~~!! 다 태워버리겠다!



암튼. 님들. 아프다고 하면 좀 아픈줄 아슈. 꾀병부리는 것 처럼 보이는 모양인데, 우리처럼 쿨함과 둔함을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사람들에게는 아프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진짜 큰 결심을 하고 한 행동이란 말입니다. 아프다고 걱정받는 것은 여리여리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글구 뭐? 힘들면 살이 빠지는 거라고? 안 그래도 약한 애가 아프다고 하니까 너무 안됐고 너무 안타깝다고? 우리는 모든 질병도 피해가는 인조인간입니까? 감기 그 따위것 그냥 약 좀 먹으면 바로 나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똑같이 대해주세요 제발.


아니 그리고 스트레스 받으면 살이 찌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간만에 봐서 살이 좀 쪄있으면 그런말들도 하더라. "응? 요새 참 편한가봐?? ^____^"..... 확......그 입을 때려주고 싶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편한게 아니라 생리불순을 겪고 있다고 얘기해줘야 당황하며 그런갑다 하실겁니까? 나처럼 힘들면 방광염을 달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요.


그리고 스트레스가 유발시키는, 하지만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알콜성 지방간에 고민하는 사람도, 밀가루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급격하게 치솟는 혈당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기름낀 장기를 꺼내 보여주거나 의료진들을 대동하여 피검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보여 줄수도 없잖아요.. 보는 앞에서 공황장애 증상정도는 보여줘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실까? 기껏 힘들게 보여드리면 '원래 예민한 애가 아니었는데 애가 왜 저렇게 변했지?' 하는 것은 우리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는 것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암튼! 진짜 그런것도 아니면서 쿨한척 둔한척하셨던 여러분,

이제부터는,

학습된 사회의 통념 고정적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그래서 남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잘 보이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쿨한척, 둔해보이는 척은 당장 그만둡시다.

니 몸이.. 아파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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