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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som Dec 22. 2016

앞장 선 여행

엄마랑 도쿄


(배터리가 29%다. 꺼지기 전에 올릴 수 있을까?)


더이상 자소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 소개하지 않아도 나를 제일 잘 아는 엄마랑 부랴부랴 짐을 쌌다.


엄마는 꿈만 같다, 라는 말을 자주 썼다. 맛없는 메뉴를 맛있게 먹어주었고, 길을 잘못 들어도 탓하지 않았고, 열심히 걷고 열심히 들어줬다.


여튼 12월17일부터 20일까지, 도쿄 세 밤.


1. 나리타 - 우에노 - 그라피 네주 - 오모테산도

첫 끼. 각자 알아서 하나씩 시켰는데 엄마껀 별로였다. 낄낄. 계란 반쪽, 차슈 두 장, 김 한 장을 나눠줬다.

엄마 미안. 구글맵이 이 길에 계단이 있다고 까진 미리 안알려줬어.

알록달록 도쿄. 아직 겨울이 덜 왔구나.

하늘을 걷는 아저씨.

안녕! 우린 숙소에 가는 중이야!

우유가 섞인 주황색. 좡-

일본 사람들은 주차를 정말 잘할 것 같다. 어떻게 이리 좁은 골목을 찾아 들어와, 칸칸이 잘 채워놨을까.  엄마가 귀엽다고 한 장 찍어놔달라고 했다. 나중에 저런 색, 귀여운 차를 타라며. 근데 엄마, 면허 시험이 어려워졌대. 아무래도 난 틀린 것 같아.

숙소에 무사히 도착! 사실 골목을 몇 번이나 잘못 들어서 조금 더 돌아왔다. 그때마다 예쁜 집, 예쁜 대문, 예쁜 화분을 마주칠 수 있어서 위안을 삼았다.

아이고 죽겠다! 이불 속에 들어간 엄마랑. 일정은 반으로 줄이고 한숨 잘까?

이모가 일본스러운 곳에서 엄마 사진을 하나 찍어달라고 하셨다. 여기가 어떨까? 일본어 간판도 있고 일본 아줌마들도 있으니까.

여긴 나무도 예쁘네!

우리의 저녁. 김이 바삭한 김밥은 엄마꺼, 눅눅한 주먹밥은 내꺼. 초밥은 사이좋게 하나씩, 고구마도 사이좋게 한입씩.

딸이랑 외국을 나오다니, 꿈만 같다던 엄마는 금방 현실 취미를 시작했다. 뿅뿅. 수고했어. 잘자.


2. 나카메구로 - 다이칸야마 - 시부야 - 오모테산도

그라피 네주의 조식은 햇살 좋은 팬케익과 통통한 토스트입니다!

여행계획도 벼락치기!

엄마, 오늘 우리가 어딜 갈거냐면. 잠깐 커피 좀 마시고 쉬고 있어봐? 다 생각이 있다니까? 확인하는 거야, 확인.

나만 따라와. 누가 어깨빵 하면 얘기하구.

안녕? 반가워. 사이좋게 지내자.

철길 옆에 있던 onibus coffee. 커피를 마시는 동안 열차가 틈틈이 지나갔다. 여행지라 그런가, 소음처럼 느껴졌던 열차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빠랑 오면 여기에 데려와야지.

구글 맵을 켜고 삐뚤빼뚤 걷기 시작했다. 오빠가 좋아할 옷들이 가득했다. 엄마랑 점원들이 오빠처럼 옷을 입었다고, 그런데 오빠랑 다르게 멋있다고 속닥거렸다. 오빠가 들은 건 아니겠지.

뜻밖의 크리스마스 공연. 혹시나 사진을 못찍게 할까봐 최대한 은혜로운 표정으로 노래를 들었다. 남녀노소라는 글자를 제일 자연스럽게, 따뜻하게 꾸며놓으면 아마 이런 모습일 거다.

아영이랑 왔던 츠타야 서점에 엄마를 데리고 왔다. 흰 공으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해뒀다. 밤이 되면 불이 켜지려나 궁금했다.

문정이가 백번 먹으라던 쯔게멘. 백번은 아니고 한삼십번 정도?

사진을 보다보니 진짜 많이 걸었구나 싶었다. 여긴 뭐더라, 어디더라. 책도 팔고 다이어리도 팔고 접시도 팔고 커피도 팔고. 재밌는 건 안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테이블이 따로 없다. 진열된 책들을 살짝 치워두고 잔을 올려두면 된다.

오잉. 어머니, 저는 단지 길을 잃었을 뿐인데요.

아이, 그만 좀 찍고 가자니까요.


3. 신주쿠 - 다시 나카메구로 - 다시 다이칸야마

오전에는 백화점 구경을 하고, 다시 나카메구로로 넘어왔다. 어제 낮에 왔을 때 엄마가 나무에 전구가 다 감겨있다며, 밤에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 말을 기억했을 뿐이야! 계획이 없었던 게 아니야!

밤의 츠타야. 공에 불이 들어오는 건 아니구나.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는 스타벅스가 꽤 좋았다. 엄마랑 라떼 한잔을 시켜놓고 창가에 나란히 앉는 자리를 골랐다. 오전에 쇼핑했던 걸 둘러보다가 경민이 오빠한테 빨리 선물을 전해주고 싶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가 참으라고 해줄줄 알았는데, 지금 당장 말하자고 한술 더 떴다. 결국 밤에 말해버렸다.


4. 네즈 - 컴백홈

두번째이자 마지막 조식. 아빠랑 오빠랑 다 같이 가서 먹던 봄카페의 호기 샌드위치가 생각났다. 쓰고 보니 "다같이"라는 말이 뭔가 애틋하게 느껴진다. 돈을 많이 많이 벌어야지!

다솜 코스의 마지막, 네즈 신사입니다.

쪼로록.

짐 찾으러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귀여운 시바를 만났다. 인형인줄 알았다가 고개를 돌려서 깜짝 놀랐다. 너네 엄마 퇴근하려면 아직 멀었어! 드가 쉬어!

안녕, 그라피! 좀 춥긴 했는데 또 올 거 같아! 그땐 자전거를 빌려볼게.

신발을 살 생각으로 제일 헌 신발을 신는 큰 그림을 그렸는데, 그대로 신고 갑니다. 총총.

진짜 안녕!


5.


친구랑 온 여행에서는 엄마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엄마랑 오면 아빠, 오빠 생각이 더 나려나 했는데 반대로 친구들 생각이 났다.


처음으로 앞장 선 여행이었다. 첫 런던에서는 한나 언니 뒤를 쫄쫄 따라갔고, 제주도에서는 재민언니를, 부산에서는 미지를, 다시 런던에서는 은하를, 도쿄에서는 아영이를 따라다녔다. 아, 생각해보니 오사카에서는 친구랑 나란히 걸었다. 그렇지, 문정?


길 찾기의 고충을 두 어깨 무겁게 느꼈다. 친구가 아니라 엄마여서 더 그랬다. 헤매면 안돼, 든든해야해, 길 잃은 걸 들키면 안돼.


구글맵을 보고 다니느라 손이 시렸을 땐 겨울 부산을 척척 찾아다닌 미지가 생각났다.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는 엄마를 보면서 "아무데나! 아무거나!"를 외치던 나를 이리저리 옮겨준 은하가 생각났다. 와이파이를 써야하니까 에그가 필요했고, 계속 아이폰을 들여다봐야하니까 휴대용 배터리도 필요했다. 지갑과 파우치만 쏙 들어가는 가방은 여행 내내 캐리어에 들어있었다. 묵직한 백팩을 메면서 도쿄 길잡이 아영이가 생각났다. 그랬구나.


6.

엄마에 대해서 새로운 점 몇 가지.


엄마는 생각보다 겁이 많다. 역에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이 좀 한산했다. 엄만 저녁즈음부터 집에 돌아갈 길을 걱정했다. 한국에선 늦게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내가 무서워하는 길 밑까지 내려와있었는데!


엄마는 생각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맨날 찍지 말라고 해서 마냥 싫은줄 알았다. 특별해보이지 않는 공원 입구에서도 엄만 우리 사진 하나 찍을까? 물었다. 골목길을 다닐 때마다 예쁜 집 대문도 찍고, 수도꼭지를 찍고, 화분을 찍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쉽게 기뻐한다. 별 거 아닌 순간에도 우와,라고 자주 말했다. 내가 잘 데려온 게 맞나 눈치 볼 때마다 엄만 '우와, 좋다' 하고 걱정을 가뿐히 날려줬다. 숙소를 나섰을 때, 햇살이 좋을 때, 숙소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찰칵하는 소리를 내면서 지하철표가 나왔을 때, 잘못 든 길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가로수들을 마주쳤을 때, 츠타야 서점 안 스타벅스에서 세로줄로 된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 엄만 꿈 같다고, 좋다고 말했다.

내 삶의 최종 보쓴데 우리 엄마는, 끝판왕 치곤 레벨을 달성하기가 너무 너무 쉬운 거였다. 그걸 매번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있나보다. 글로 쓰다보면 착한 딸이 되기가 이렇게 쉽다. 내일 아침에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 그때도 이 맘을 까먹지 않아야지, 매일매일.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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