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었다......
생선회는 날로 먹는다. 생선회를 구워 먹을까? 아니, 생선회를 어떻게 먹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회라고 먹지 않던가. 날 것으로. 그런데, 산을 날로 먹다니. 우리나라(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리산(1915m)을 날로 먹었다?
원래는 성삼재에서 시작해서 중산리로 내려오는 계획이었다. 소위 성중 종주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치닫는 선배들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계획이란 단어가 '계획'아니던가. 계획이 계획대로 다 되면 계획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 산행을 제안한 선배가 하나 놓친 게 있었다. 겨울에 성삼재까지 버스와 택시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알아보니 3월까지 혹한기로 인해 도로를 통제한다고 공지했었다(2월 1일부터 민원이 많아 탄력 통제로 바뀌었다. 그걸 떠나는 날 알았다). 그러니 계획이 바뀔 수밖에. 체력이 되고 산행에 익숙한 전문가라면 과감하게 화대 종주를 했겠지. 화엄사부터 말이다. 체력이 다들 초보인지라 계획을 취소할 순 없었고 차선으로 선택한 마천에서 음정까지 택시 타고 가기로 했다. 버스 말고. 벽소령과 장터목 대피소를 예약했기 때문인데, 이게 날로 먹게 된 시발이었다.
마천에서 내린 건 우리 일행뿐이었다. 다들 백무동으로 갔을 것이다. 서울에서 떠난 버스에 많아 보이는 등산객들이었으니. 추측건대 장터목에서 하루 자고 천왕봉에 오른 후 월요일 출근을 위해 하산했을 거라는.
어라, 날씨가 따듯했다. 우리 온다고 지리산이 반가워서? 마천에서 점심 먹고 택시 타고 음정까지 휑 달렸다. 겨울을 대비했는데 이런 기대는 중산리로 내려올 때까지 접게 만들었다. 기대니까. 이럴 수가? 날씨가 좋다니. 이 말인즉 눈보라 치고 강한 겨울바람이 없었다는 의미일 뿐 춥지 않다는 게 아니었지만. 계절은 봄으로 접어든 듯했다. 그래서 음정 국립공원 입구부터 벽소령 대피소까지는 동네 뒷산보다 덜하지 않았다. 룰루랄라!
이게 등산일까? 하다 보니 벽소령 대피소. 최근 보수해서 지리산 호텔로 불리는 곳. 계절 끝자락 그 끝은 추웠지만 대피소 난방은 최고였다. 아니 도대체 난방을 어떻게 하길래? 동네 찜질방 수준? 이곳을 다른 대피소와 비교 말라던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 말을 이해했지만, 그 와중에 누구는 냉골을 경험하기도 했으니. 그게 나였다. 내 자리만 새벽에 난방이 꺼졌다. 아직도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풀어봤자지만. 추운 새벽 오줌 싸러 가는 번거로움만 빼면 첫날은 좋았다.
그럼 둘째 날은?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걸어가면서 다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유는 대피소에서 가장 늦게 출발했기 때문인데. 그곳에서 걸으면서 세상을 다 품은 것 같았다. 이게 중요하다. 느낀 기분은 분명 그랬다. 6km 정도의 거리에 따사로운 봄 같은 날씨까지. 이게 겨울 산행? 가는 내내 누구도 허락하지 않고 우리만 허락된 길이라니. 착각도 이 정도면 심각하련만, 가면서 들를 수밖에 없는 덕평봉, 선비생, 칠선봉, 영신봉까지. 이러니 지리산을 날로 먹은 것이다.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그 구간이 첫날 걷던 임도 길 같은 느낌은 아닐지라도, 비바람도 눈보라도 없는 이 길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풍광이라니. 이래서 지리산이지 느낌이 가시지도 않은 채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세석평전이라니? 예전에 이곳에 와서 느낀 그 감흥이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 별로 평전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그래도 평전이었다. 1500m 정도 높이에 이런 완만한 경사라니. 물이 풍부한 그보다 봄에 왔으면 하는 기대감에 다시 오고 싶은데 산불방지 기간과 겹칠 것 같다. 여기도 통제하려나?
허기를 채우고 장터목으로 가던 길 중 처음 만나는 영신봉. 여기부터다. 지리산의 하이라이트. 그곳에서 보이는 장관들이라니. 저 멀리 제석봉과 천왕봉도 지척이다. 이건 뻥이지만,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반대로 시선을 돌려 바라본 반야봉과 노고단까지. 산행 중 많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능선 길. 이걸 맛보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눈 덮인 지리산이 아니라 봄기운 감도는 지리산까지 하늘이 도와준다고 믿었다. 믿는 건 좋으니까.
그렇게 장터목으로 향했다. 벽소령에서 세석보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구간이 더 예쁘지만, 역시나 오가는 등산객이 없다는 게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했다. 잘 왔다. 또 와야지 하는 생각. 그러면서 잠시 촛대봉에 오르는 만용도 부려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선경이라 불리는 구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연하선경 말이다. 이건 지리산 어느 봉우리건 올라와야만 누리는 특권인데, 남들도 다 누리지만, 역시 좋은 건 좋은 거다. 그렇게 아쉬움에 취하다 장터목 대피소를 만났다.
장터목 대피소가 날 반길 리 없건만 반갑다고 해야 한다. 여기서 잘 거니까. 벽소령만 할까만은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일요일이니까. 다들 내려갔겠지? 예전에 1호실 2층 다락같은 곳에서 자다 추위 때문에 벌벌 떨던 기억이 새롭지만, 이날은 괜찮았다. 그럭저럭. 그렇게 그곳에서 두 끼를 해결하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어슴푸레 보이는 능선과 탁 트인 전망이라니. 이것 보러 왔는데 말이다.
일출 시간이 7시 30분쯤이라서 여유롭게 걷다가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순간 들었다. 세상이 밝았다. 제석봉을 지나 통천문을 향하면서 더 강해졌는데, 어두운 새벽 길이 아니었다. 랜턴이 없어도 걸을 정도처럼 느낀 그건 계절이 바뀐다는 다른 신호였다. 해가 길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오르는 길 내내 왼편으로 달이 반갑다고 웃는 것 같았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와 달이라. 어제가 보름이라 달이 아직도 둥글었다. 원래 달이 둥글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른 천왕봉. 천왕봉이라? 우리나라 천왕봉이 몇 개더라? 칼바람까지는 아니라도 제법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일출 방향으로 몸을 낮추고 기다린 일출. 일출 예상시간이 넘어가는데 해는 불쑥 나타나지 않는다. 구름 색깔이 바뀌는 것으로 봐서 해는 벌써 바다에서 도약을 했는데, 구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뜨긴 뜬 해. 잠시 기도도 했다. 이런저런 남들도 했었을 기도. 역시나, 정상에서 보는 일출도 좋은 건 좋은 거다. 그래서 좋았다. 이 건만 아니라도 지리산이 좋지만 일출도 좋았다. 구름에 가려 바로 차오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일출은 일출이었다.
여기까지다. 내려가야 하니까. 목표는 중산리. 벌써 무릎이 아파진다. 무릎 보호대를 했는데도 경사가 아찔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째인가. 하산길. 이쪽은 짧지만 힘들고, 이 말인즉 올라올 때 이 길로 천왕봉 오르면 다른 등산로보다 두 배 더 힘들다는 길. 여기에 교통도 그리 편하지 않다. 대중교통 연결이 쉽지 않다. 어떻게든 함양원지터미널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집에 돌아올 수 있으니, 그래도 원지까지 갔고 집에 왔다. 그럼, 집에 못 가는 사람 있던가?
이럴 때 쓸 수 있는 단어도 행복일 것 같다. 행복이 별거인가 보다 며칠 내가 나임을 잊을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이라고 믿고 있다. 산행이라 힘들었다는 점도 잠시 잊은 것이다. 현실의 나를 말이다. 준비 기간부터 잠시나마 잊기 시작해서 산행을 시작하면서는 평소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돼서 행복한 것이다.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사 먹은 잔치국수부터 오줌이 마려워 잠도 들지 못하고 긴장한 나를 마주 봐야 했던, 그렇게 시작된 짧은 등산이 나를 몰입하게 한 것이다.
시간이 어떻게 간지 모르게 만들다니. 사족인데, 벽소령에서 장터목까지 무려 8시간 걸쳐 세월아 네월아 하고 걸은 산행이라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너무 천천히 걸어서? 빨리 가서 뭐 하게? 날씨 좋고 덜 추웠고 그렇게 내려다본 세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