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올랐다. 갈까 말까 생각하니, 가게 되었다. 그러니, 오르게 되었다. 얼핏 들으면, 히말라야 어느 산봉우리 오르나 싶다. 내겐 비슷한 마음이었다. 날씨 때문이었다. 북극이 뻥 뚫렸나 보다. 냉기가 남하하더니 날씨가 춥다. 이날도 영하 -13도였다. 그럼, 체감온도는? 산에서?
능선에서 마주칠 칼바람이 두려웠지만, 바람이 경계를 제대로 서지 못했다. 며칠, 추위에 바람까지 인간을 힘들게 해서 미안했는지 바람이 없다. 자기 역할을 못하고 졸고 있던 게 분명한 바람. 여간 다행히 아니다. 밤골에서 보이는 경치가 별로라기에 사기막 계곡으로 발을 옮겼다. 시작은 사기막골. 산이란 게 산마다 다 다르지만, 이런 산이 정말 좋다. 여기서 '이런'이란?
얼마 오르지 않아 밑이 내려다보인다. 이건 계절 때문만은 아니다. 떨궈 낼 잎사귀 없는 겨울이 아니라도 이쪽 코스는 바로 시야를 허락하는 산이다. 이러니, 답답하지 않지. 친구 말이 맞다. 밤골로 가면 볼 게 없다고. 여기에 아이젠만 있다면 천하무적이다! 과장이다. 천하무적이라니. 바람도 없었는데, 동장군이 매서웠지만 기분이 상쾌하다. 거짓말 같다. 발이 시렸다. 추운 날씨긴 했다.
여긴 가을 단풍 명소라던데, 겨울에는 어떨는지 모르고 그냥 왔다. 원래는 덕유산 가려고 했다. 눈꽃. 이게 주인공이니 영접하려 1박 2일 준비했었다. 그런데 폭설. 가려던 토요일, 이날 정상 부근에 50cm 눈이 왔다. 입산금지. 전면 통제다. 아, 눈 보러 가니 아주 좋았는데 너무 많이 왔다. 그렇다고 케이블카 타고 슝 올라 눈만 보고 슝 내려올 수는 없는 일. 케이블카는 운영했겠지?
사기막 계곡으로 오르다 보면 마치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많이 띈다. 군 건물이다. 여기에 예비군 훈련장도 있다고 하니. 여기저기 이런 건물이 많이 보인다. 수도 서울을 지키고자 누군가 애쓰는 것 같다. 이런 걸 설명하는 누군가가 시끄럽다. 옥에 티다. 옆에서 막 떠들어대는데, 시끄러워서 대강 들었다. 같이 간 친구가 워낙 기초대사량이 많은 체력 짱인데, 이걸 다 입으로 푸나 보다. 에너지가 철철 넘친다. 귀가 혹사당하는 것 같아 산에 내려와서 충고하긴 했다. 목소리 줄이라고. 산이 시끄럽다고, 짜증 낸 것 못 들었냐고.
지하철 구파발역에서 내려 34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 안에 산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여러 명 보인다. 역시나,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는 사람들이라니. 역시 산사나이 들이다. 아니, 여성도 있었는데. 국립공원 입구 사무실에 누가 있긴 있다. 누군 일하고, 누군 산에 가고. 버스에서 봤던 사람들은 다 밤골에서 내렸는데, 못 보던 여러 명이 이미 도착해서 산행 준비를 하고, 우리도 화장실에서 몸무게 줄이고 대비를 했다.
이곳도 역시나 무난하던 코스이나 갑자기 업힐이다. 몇 분을 걸었을까? 손은 정말 추웠고 모자에 마스크에 장갑에 거추장스러운 게 많다. 평소에도 손이 차 얇은 장갑 하나 더 가져왔는데 이래도 속수무책이다. 여기서 착각한 게, 장갑을 끼면 따듯할 거란 생각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 장갑에 보온 히터가 들어있을리가. 그냥 내 체온으로 버티는 건데, 이런 생각은 숨은 벽 능선 끝에서 백운대 정상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격한 업힐에서 다시 느꼈다. 거긴 더 추웠다. 손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정말 추웠다. 손가락이 말이다.
사실, 숨은 벽 능선을 다 오를 수 없다. 보통 마당바위라 칭하는 곳부터 고래 등 바위까지는 날 선 바위들을 걷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여긴 암벽 산악인들이 오를 수 있다. 사람이 많은 휴일에는 국립공단 직원이 지킨다고 하던데, 여기까지도 숨은 벽 능선을 다 느껴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거의 직각으로 잠시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밤골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북한산 백운대로 올라가거나. 그 갈림길에서 다시 내려온 것보다 더 높고 긴 업힐을 시도해야 하는데, 하체가 튼튼하지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래서 거길 넘어서면.
별세계였다. 다른 세계일 리가. 내려온 것보다 3배 정도 치고 올라가서 작은 돌 틈을 지난다. 그럼, 그날은 별세계였다. 해가 일 년 내내 미치지 않는 냉골인 숨은 벽 반대편. 해가 쨍쨍하다. 추운 날씨. 바람이 없는데, 해까지 비추면 다른 계절 같다. 그러니, 백운대(836m) 가는 길이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이번 등산의 목표가 백운대가 아니건만, 결국 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집에 가기도 하고.
삼각산 중에서 백운대를 빼고 북한산을 논할 수 있을까? 태극기가 휘날리는 그 장엄(?) 함을 겪어봐야 할까? 마음은 조금도 심쿵 거리지 않았다. 친구가 찍은 사진을 보니 백운대 정상에 오르긴 올랐다. 이 맛이다. 등산 맛이. 정상에서 더 올라갈 곳이 없는 곳을 오르는 맛 말이다. 이게 다른 세계란 과장 아닌 과장은 장갑 낀 손에서 소식을 전해준다. 온기가 돈다. 올라오며 언 손을 녹인다고 후후거리면서 올라왔었는데 말이다. 내 손도 따듯했다.
햇볕이 많으니 사람들이 백운대 정상 주변 바위 여기저기 앉아있다. 쉬는 거지만, 바람이 이렇게 졸고 있다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것은 산에서도 알 수 있었다. 산타 복장으로 산에 오른 남녀가 눈에 띈다. 춥지 않나? 어디서 작정하고 왔나 보다. 산타 복장이라니. 갑자기 그들의 축복과 바람으로 바람이 잠자는 것 같다. 신의 은총이라니? 할렐루야!
백운대가 명당이긴 명당이다. 대게 산 정상이 다 그렇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아서 좋다. 여전히 서울 시내 상공을 가르는 검은 오염 띠가 둘러쌓고 있지만, 그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예봉산, 운길산, 검단산, 남산, 관악산, 수락산, 불암산, 오봉, 도봉산이 들어온다. 시야에. 뿌듯했다. 담엔 대동문까지 걸어볼까?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이게, 산행의 숙명이다. 올라왔으니,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하는. 이게 등산의 숙명이지만, 이런 심각함보다는 머리는 이미 발걸음이 가볍다고 신호를 보낸다. 당연히 내려가는 길이니 가벼울 수밖에. 그래도 좋다. 오늘, 처음 와본 숨은 벽도 넘어보고, 백운대 정상은 계획에 없었는데, 오르다 보니 오르게 되었다. 온통 회색 건물로 들어선 서울이지만 산에서 내려다보니, 하나도 하나도 부러울 게 없다. 남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