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 2
잠시 몇 시인지 보려고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린 후 마저 카톡을 눌렀다. 그랬더니 제일 위에 잊었던 인물 이름이 떴다. 지우지 않았네. 처음 든 생각이었다. 언제부터 인지 무음이 편해서 좋았다. 내가 필요할 때만 접속할 수 있는 사이버 세상. 메시지가 온 줄 몰랐다. 계속 보니 오른쪽 빨간 원 안에 5라고 되어있다. 다섯 번 보냈다는 말이다. 무심코는 아니고 뭔지 궁금해서 눌렀다. 웬일일까?
“잘 지내지? 나 박창호다.”
잘 지내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난감했다. 난 잘 지내고 있을까? 답을 찾기가 마땅하지 않은 탓이다. 난 정말 잘 지낸 것인지? 이건 창호가 내가 정말 잘 지냈기를 바라서 묻는 질문이 아님을 알면서도 난 한참을 멍하니 생각했다. 잘 지낸다는 의미는 뭘까? 사람들은 의례 만나면 잘 지냈지 내지는 잘 지내지라고 묻는다. 이건 그만큼 서로 자주 보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전자는 그나마 자주 만난 사이에나 통용될 것 같은 말이다. 보지 못한 동안이라도 뭔가 서로 좀 알았던 사이라는 의미 같다. 보다 친밀한 것도 같고. 창호가 한 말은 후자였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한 수사.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난 한참을 왜 머뭇거린 걸까? 잘 지냈지라고 물어보지 않아서였을 것도 같다. 친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우린 친한 적이 있었나? 정말 기대하지 않은 질문. 우린 그런 사이였나 보다. 다음 두 번째에 문장은.
“오래간만이다”
이건 맞는 말이다. 잘 지내지 라는 메신저 카톡 첫 칸에 있던 문장들은 내게 와 닫지 않았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 상대가 무탈한지 아는 방법은 무소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남이 나한테 전하지 않는 자기 소식뿐만 아니라 내가 남한테 전하지 않는 내 소식도 전하지 않는. 그럴 경우 친구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만 서로 연락하지 않아도 무탈하면 잘 지내는 것이란 생각을 해왔다. 이때 상대가 진짜 무탈하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이건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에게 탈이 생기면 어떤 형태로든 전달이 될 테니까.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더불어 무탈함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때로 보약이다. 시간은 서로를 굳건하고 단단한 거리감을 만든다. 시간은 관계를 공고하게도 하지만 관계를 의미 없게도 만든다. 어릴 때 친구하면 다 통하는 만능열쇠였다. 그때는 얼마나 시간을 같이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친구라는 관계가 유지되었던 같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만남이 점차 줄어들게 되니 오래간만이라는 말이 일상이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걸 받아들이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 오래간만이라는 말은 생각하고 말고 가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이건 맞는 말이니까. 그런데, 오래간만인데 왜 연락을 했을까? 오래간만이라서? 보고 싶어서라면 좀 이상하다. 보고 싶은데 오랜만에 연락을 하다니. 그럼 친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오키나와 선배 집에 있다. 여기서 10일 정도 머물다 들어간다.”
오키나와? 그게 어디 있더라? 이것이 궁금했지 그가 그곳에 왜 머무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대강 알만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 때문인지 공부를 잘한 덕에 국립대에 들어간 그는 고등학교 동창 중 누구보다 잘 나갈 것 같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믿었기보다 그땐 그랬었다. 성적에 따라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야 말로 계층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니까. 간판은 그때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고등학교 같은 반에서 2년을 같이 보냈어도 그와 나는 노는 물이 달랐다. 그는 상당히 키가 컸는데, 우연찮게도 같은 반에서 키가 작은 애들이 상대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고 반대로 키 큰 애들이 상대적으로 공부를 잘해 마치 키가 성적이 좋은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작은 아이들을 반에서 홍해 가르듯 서로를 갈라놓은 키 같았다. 키가 작은 것도 억울한데 키가 큰 애들이 성적이 더 좋다니. 뭔가 불공평했다. 어쩔 수 없는. 작은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 탓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부모가 알고 낳았겠는가? 그것이 유전자 때문이라면 부모 중 어느 쪽이라도 그 부모를 낳은 그들 부모까지 업보가 이어질 수 있다. 암튼.
졸업하면서 그와 연락이 끊긴 건 내가 인서울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방대학을 나온 것과 군대를 방위로 마친 후 취업한 직장도 수원에 있는 중소기업이었기 때문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주 있었던 동창회 등을 통해서 그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과의 끈을 연연하지 않았던 것은 키도 크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공부 잘하는 부류 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른 인생을 살아갈 텐데, 굳이 만나면서 서로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그 ‘관계’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필요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아도 좋은 방법임을 하나 둘 나이 들면서 터득했으니 난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아침 일찍 서둘러 출근하지 않고 바로 지방에 있는 국립병원에 달려간 날이었다. 회사에는 나보다 일찍 승진해서 팀장으로 있는 후배한테 문자로 통보를 해둔 상태였다. 시스템에서 휴가 처리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생각보다 잘 버티시는 어머니를 뵙고 내일 출근을 위해 늦게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온 날. 차가 터미널에 도착해서 내리던 중 그를 만난 것이다. 몇 년 만이었을까? 오늘 회사를 그만두었다면서 휴대폰 번호는 바뀌지 않을 거야라며 불쑥 건네준 명함. 거긴 들어보지 못한 회사이름이 적혀있었다. 주소가 평택이었나?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그가 허를 찔렀다. 시간 있냐? 머리는 없다고 말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입에서 나온 말은
“응.”
이 말을 내뱉자마자 머릿속에선 웽웽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너 실수한 거야라고 들렸다. 그렇게 창호와 나는 터미널 안 커피숍으로 향했고, 말이 길어져 서로 배가 고프다며 같은 건물 순댓국집으로 갔었다. 그 나나나 밥은 먹어야 했다. 그러다 다시 지하 소줏집으로 옮겨 대화를 나눈 것까지만 기억했다. 소위 말하는 필름이 끊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고등학생이던 딸 정미가 콩나물국을 끓여 놓았다는 메모를 식탁에서 볼 수 있었다. 필히 정미는 새벽에 학교에 가면서도 아버지를 챙긴 것 같은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철이 들었을까? 사춘기부터 정미는 자기 아버지인 나한테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건 내 잘못도 있었겠지만, 아내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후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렇다고 너 달라졌네!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을 정미가 할까 싶었다. 아내와의 갈등이 지속되고, 집에서 싸움이 늘어날 때도 정미는 결코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냥 추측하건대 정미는 정분이 나서 아버지와 맨날 싸우는 자기 엄마에 대한 애정을 일찍이 포기했을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 지금은 법원의 권고에 따라 서로 조정을 하는 시기이다. 이 기간이 필요한 건, 서로 헤어질 테니 마음의 준비를 잘하라는 의미로 진작 받아들였다. 회사에서는 승진이 더디다 보니 이제는 몇 기수 아래 후배들한테도 치받치는 형국이라 회사를 다니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저 감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회사나 집이나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터질 것 같은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면서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먹으면서 이것저것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어제 기억을 대충 정리하면 좋은 학벌로 쉽게 대기업에 취직한 그의 직장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엔 취직이 잘되긴 했지만, 취업이 되어 다닌 대기업에서도 그렇고 옮긴 다른 대기업들에서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직장 상사와 불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람들과의 관계가 직장생활을 해나가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오로지 성적순으로 순위가 결정되는 학교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나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 풀린 것은 아내라고 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 결혼의 본질 때문인지, 아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사립 약대를 나온 재원이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아 목동종합병원 앞에 작게 차린 약국이 대박이 나서 지금은 밑에 약사를 5명이나 거느린 약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건 창호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다. 어쩌다 흘려들었던 얘기였다. 이러니 굳이 남의 소식을 애써서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식은 돌고 돌기 마련. 이렇게라도 들리지 않는 소식은 정말 무용한 소식인 것이다.
오늘은 자기가 다 사겠다고 한 처지라서 대화 중에 창호 편에 섰던 것 같은데, 평상시 직선적인 말투와 남을 덜 배려하는 행동은 여전했다. 이렇게 난 그를 기억했다. 그가 한 때 공부를 잘했다는 오만이 그가 직장 생활을 어렵게 느끼는 원인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의 얘기였다. 그가 나한테 자기 단점들을 덜렁 얘기하다니. 술 때문인지 개과천선한 것인지.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짜식 외로웠다보다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이런 면이 있었나? 그만큼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것이 많았다. 결국, 능력이 뛰어나도 그를 반길 회사는 없었을 것이고, 출신지역과 학교로 줄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처져있는 기업에서 그에 대한 평판이 그를 계속 밀어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와 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를 찾는다면 그가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었다니. 그 말 한마디. 그것이 갖는 무게감을 누군들 모를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만둘 수 있구나. 회사를. 창호는.
그렇게 그와 나는 헤어졌었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의례적인 대화를 남긴 채.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그렇게 그날 이후 내 시야와 기억 속에서 잊었던 그를 다시 만난 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쉬려고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사를 찾았던 때였다. 미리 계약금을 지불하고 같이 떠나는 일행들과 종로에 있는 여행사에 사전 미팅을 하러 갔는데, 우연히 그를 그 건물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것이다. 알고 보니 나랑 만난 후 직장을 새롭게 구한 곳이 같은 건물에 있는 다른 여행사였고, 그는 그 여행사에서 투어가이드로 일하고 있었다. 성격도 좋고 수완도 좋다는 약사 아내 덕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자기 적성에 가장 맞는 직업을 찾은 것이라는 말도 누가 했던 것 같다. 막연하게나마 그가 여행을 좋아했다는 기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저 막연하게 창호는 그랬지 라는 생각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창호가 자기한테 적절한 직업을 찾았다고 순간 생각했다.
사전 미팅이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자는 창호의 제안을 약속이 있다면서 뿌리친 것은 술 먹다 보면 나오게 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그에게 얘기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때 난 회사에서 젊은 여직원한테 집적거리다가 그 여직원이 고충처리위원회에 나를 신고 했기 때문에 대기발령을 받은 상태였다. 몇 년 전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던 그 이후 난 아내와 결국 이혼을 했다. 법원에서의 조정기간을 거쳐도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과 그 배경에는 나의 무능력도 한몫을 했을 거라는 치욕감 때문에 한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안될 건 안 되고 될 것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젊은 여직원한테 설레발을 떨다 당한 것이다. 평상시에 농담도 잘 받아주던 여직원이 내가 뱉은 모든 말들을 기록해서 그걸 고충처리위원회에 제출했다. 난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었다. 그렇고 그런 말들이 위원회에 올라가면 치명적인 독처럼 작용을 한다. 승진이야 능력이 부족해서 후배들한테 밀렸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로 남들 구설수에 오르게 되면 회사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특히나 여성들이 더 많은 직장이었고, 그때 정권이 여자 대통령으로 바뀌면서 여성의 인권이니 뭐니 한참 강조되던 시기였다. 고충처리위원회 담당이었던 후배가 나중에 전한 말로는 선배가 시범케이스에 걸린 것 같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새로 온 이사장이 여자였던 것도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다행인 건 딸 정미가 나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유일하게 내 인생을 그나마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 존재. 내 딸 정미가 같은 여자인 자기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 건지 내가 불쌍해서 그런 것인지 나와 함께 사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 곁에 남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 정미도 이제 어엿하게 인서울 회계학과를 나온 덕인지 쉽게 중소규모의 회사에 취업을 해서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다. 다행이다. 그러니 그때 딱 한번 믿지 않던 신에게 감사를 했었다. 딸 정미가 아빠와 엄마와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잘 이겨내고 회사를 다니면서 매달 얼마만이라도 용돈을 주던 상태라서 난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 돈이란 거야 어차피 정미가 시집갈 때 다 돌려줄 것이지만. 정미를 위해 매달 얼마간 적금을 넣고 있다는 건 정미한테 말하지 않았었다. 정미와 워낙 대화가 없는 사이이다 보니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로서의 자존심. 유일한 피붙이 딸과 이런 서먹한 관계가 이럴 때 좋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때는 신을 찾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창호와 스치듯 지나친 시간이 어름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한참 지난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조자 없었던 시점에 창호한테 문자가 온 것이다. 그냥 그와는 시절인연처럼 서로 각자 가던 길인데, 그가 갑자기 시간을 유턴시킨 것이다. 그렇게 한 번에 다 써서 보내도 되었을 문자를 다섯 번이나 나눠서 보낸 내용들이 잠시 과거로 나를 원하지 않게 소환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창호가 선배 집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났다. 웬 오키나와? 선배 집? 궁금해졌다. 워낙 일본어를 잘하고 지일파 같은 분위기의 선배는 당연히 일본에서 석사를 마친 재원이니 그러려니 했다. 일본을 도보로 오토바이로 전국을 일주를 한 선배니 당연했다고 말이다. 나도 언어 능력이 달려서 그렇지 외국어를 잘했으면 진작 외국에 나가서 살았으면 했지만, 제도권 교육에서 항상 밀리고 밀리는 성적이었으니. 생각해 보니 그 선배는 언젠가 동창 민호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총련 계열 장학금을 받은 것이 정보당국의 레이더망에 걸려 몇 년 동안 수사를 받다 겨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것을. 그 때문에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하나 남은 딸과는 관계를 끊었다는 얘기를 후일담으로 들었었다. 당시가 민주화 시대였는데 마침 정권에 탄압을 받던 대통령이 당선된 시대에도 공작에 걸리면 아작 난다는 것을 말해준 것도 민호였다. 그 선배와 같은 대학 동창으로 같은 대학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한 후 늦게 대기업 법률담당으로 취업한 민호 말이다. 그런데, 창호가 그 선배 집에? 같은 대학을 나와서 알게 된 것일까?
“선배도 나랑 같이 서울 가는데 그때 민호랑 같이 밥이나 먹자.”
네 번째 문장을 보니, 딱히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밥이나 먹자고 했기 때문이다. 이건 창호 스스로 우리가 반드시 만나지 않아도 됨을 스스로 들어낸 것 같았다. 특별히 만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으니 그와 꼭 같이 밥을 먹어야 할까 생각을 하던 차에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대학교 동창이던 삼식이가 전화로 한 말이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 점차 사라지는 것들이 많듯이 친구도 그렇다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거라는.
“싫으면 말고.”
카톡에 다섯 번째로 남긴 말이다. 창호는 이 말을 하고 싶어 연락을 한 것일까? 너한테 굳이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연락을 했다는 자존심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일까? 갑자기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창호가 굳이 내게 연락한 이유가 뭘까? 누구라도 어떻게라도 자기 사정을 말해서 스트레스라도 풀려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일까? 자기 아내는 더 이상 자기편이 되어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가 오랜만에 남긴 메시지의 의미를 알면서, 알 것 같으면서도 만나서 얘기해 봤자 내 인생도 달라지지 않을 걸 알 것 같아, 굳이 이런 만남이 필요할까 생각하다 보니 벌써 해가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