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나석두(碩頭)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나~ 석두(石頭)라고 부른다. 엄마말로는 이름이 원래 두석이었는데 아버지가 출생신고하면서 잘못 기재한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동사무소담당이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여전히 주장하는데 이름을 원래대로 아직까지 바꾸지 않은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집에선 당연히 두석이라고 불렀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시작된 놀림을 받는 고통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요즘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 누워서 껌 씹는 정도라서, 이름을 바꾼다, 바꾼다 하다가 게을러서인지 오늘날까지 이어져버렸다. 정말 인생이 팍팍 풀린다는데 어찌 바꾸겠는가. 이것이 본심이라서 망설인 것이다.
집안에서야 사촌일가 모두 중간 돌림자 두를 써서 두석이라고 지은 것인데, 원래 뜻은 우두머리가 되라는 의미라고 아무리 친구들한테 말해도 애들은 나를 석두라고 불렀으니 틀린 건 아니었다. 주민등록상 이름이 석두였지만 그때 의미는 석두(石頭) 즉, 돌대가리라는 의미로 부르는 걸 모를 만큼 바보겠는가. 그렇다. 내 이름은 돌대가리다. 그런 나 석두가 아이들의 바람을 거슬러 공부를 잘했으니 이건 부모님이 일부러 튀는 이름을 지은 깊은 뜻이 일부 맞긴 맞은 것이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아버지한테 맞을 걸 각오하고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 왈 내 이름이 원래 두석인데 왜 석두라고 신고했냐고 하니, 아버지 왈 네 이름이 언젠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날이 반드시 온다고 했다. 내가 태어 난 해 동네 아이들 이름이란 이름은 다 유명한 작명소에서 지었다고. 작명소 소장 이름이 진짜 유명한 이었다고. 그래서인지 유명한 소장한테 이름을 받은 이들이 다 커서 정말 유명해졌다고 했다. 소장이 할아버지가 지은 나두석이란 이름을 들고 가니 석두라고 하라고 했었다나. 그래야 남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그에 따른 대가인 유명세를 몇 배로 톡톡히 돌려받을 거라고 했다니. 유명한 소장은 알고 있긴 했다. 내 이름이 얼마나 놀림감이 될는지. 결론을 먼저 말하면 유명한 작명소장 뜻이 맞는 것인지, 이름을 어떻게 짓든 정해진 내 팔자가 맞는 것인지 그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맞을 터였다.
남덕구. 같은 동네 살아서 초등학교부터 우연찮게 계속 같은 학교에 다닌 내 불알친구. 매번 같은 반까지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3년 내리 같은 반이 된 친구.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까? 나 씨와 남 씨 한 끗 차이 때문이 아니어도 우리는 동네에서 항상 짝꿍이었다. 유일하게 그와 나의 차이 하나는 성적. 아니다. 둘이다. 덕구가 나보다 잘 생긴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내가 내세울 건 공부다. 덕구는 정말 공부를 못했다. 아니다.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 대학을 포기한 거야 어쩌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그의 인생이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덕구 네 사형제 모두 대학에 못 가도 사는데 지장이 없었으니 그때까지 산같이 싸놓은 재산 때문이란 건 동네방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영어의 신세를 진건 달리 해석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주어진 대로 살지 않았다고 밖에 달리 설명하기 어려웠다. 팔자대로 말이다. 아니다. 팔자대로 산 것이다.
사정은 이러했다. 대학을 나와도 민주주의를 잘 아는 것도 아니듯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민주주의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그가 어느 날 기초의원 선거에 나갔는데 덜컥 당선이 되었다. 비록 내가 선거관리본부장이란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될까? 되겠지? 그럴 수도! 정도로 받아들였다. 덕구가 기초의원 선거에 나간 것도 그렇고. 이는 그가 속한 민생당이 그를 공천했다는 말인데 그거야 돈으로 해결했기에 가능했을 거란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돈 많은 덕구 집안을 꼬여 돈 뜯어내려는 민생당 전략일 거라고 말들이 많았다. 유혹을 한 자가 나쁜 것인지 유혹에 넘어간 자가 더 나쁜 것인지. 공천대가로 지역구 국회의원한테 얼마나 들이밀었는지, 기초의회 의원 값이 얼만지 내내 궁금해졌다. 어쨌거나 민주주의란 것이 형식적이나마 선거를 빼면 시체지만 돈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서. 그렇다고 덕구가 무슨 민주주의 투사 경력을 팔만한 것도 없었으니. 덕구가 기초의원 선거구인 행복시 행복구 의원선거에 나가 당선이 되다니. 사람들이 덕구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대화의 끝은 항상 돈 얘기였다. 남 구설에 오르는 것도 팔자지만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내가 덕구를 돕게 된 건 우연 같지만 난 이 또한 팔자려니 생각했다. 손해 날 짓이 아니란 걸 머리가 계산을 끝냈으니 말이다. 덕구와 내가 헤어진 건 전술했듯이 덕구는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가계를 계승하겠다는 대망을 품고 고향에 남았던 것이고, 나야 성적이 괜찮기에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을 다닌답시고 올라갔으니. 우린 벌써 10여 년 정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 사이 내가 군대를 갔다 오기도 했지만, 명절 때라도 시골에 오지 않은 건 내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솔직히 실토하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이 되지 않아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려고 올라간 것으로 덕구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덕구가 품은 그 대망이란 것을 직접 듣지도 않았고, 시골 촌구석에서 대망이란 것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때 내가 추측한 건 재산이나 축내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대망이라고 표현한 것 아닐까 하는 정도. 돈이란 버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건 더욱 어려운 법이니 일면 타당한 것도 같았다. 뻥을 뻥뻥 치는 덕구 품성이라면 말이다. 그때 내게 고향은 막걸리 냄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누아 와인향 정도는 되어야 자주 내려 오지라고 생각했었다. 웬 꼴값? 내가 와인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한참 폼 잡고 와인 마시는 것이 유행이어서 번지르르 폼 잡는 우리 내 정서에 살짝 올라탄 건인데 이건 분명 허세지만. 우린 허세의 민족 아니던가. 그러던 어느 날.
- 야, 돌대가리?
- 어……. 엉? 덕구! 웬일이냐? 몇 년 만이지?
이렇게 우린 해후를 했다. 그렇다고 전화로 최성수 노래를 힘껏 불렀을까. 통화한 지 일주일 도 되지 않아 난 덕구 선거캠프 선거관리본부장이 되었다. 이름이 거창해서 대통령 선거라도 치르는 줄 알겠지만. 외화내빈이라고. 내세울게 돈 밖에 없는 덕구가 자기보다 가방끈 긴 나를 마담으로 내세우고, 이건 아마 내가 못생겨서 자기가 좀 더 부각될 거란걸 치밀하게 계산한 바를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바로 덕구의 제안을 덥석 문 것은 아니었다. 재수까지 하면서 지원한 대학이란 대학은 족족 다 떨어져서 먼저 군대를 갔다 온 후 들어간 것이 최근 졸업한 대학이었다. 늦게 들어가니 동기들은 후배들이라 어울리기도 그렇고 해서 난 정말 죽어라고 취업에 매달렸다. 대학에 들어온 후 고시원에서 전념을 다한 값진 시간. 그 덕에 난 서울 양재동에 본사가 있는 건설사에 들어갔다. 회사 사장이 학군단 출신이라서 군필 그것도 보병 출신자를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우연히 최종면접에 올라간 다섯 명 중에 내가 유일하게 현역 출신이었다. 면접에 오른 건 서류전형부터 이름이 담당자들 눈에 확 띄었다나. 이름 덕을 본 것인데, 유명한 소장 말이 맞네 하고 인정해야 할 터였다. 1차 필기시험을 통과한 후 실시된 2차 면접에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번외로 회장 면접이 있다고 했다. 회장 면접? 무슨 유명한 기업도 아니면서. 회장은 나에 대해 이름까지 포함해서 이것저것 캐물어서 너무 심한데 변죽만 올리는 거 아냐, 회사에 붙여 줄 것도 아니면서라고 투덜거렸지만 속으론 혹시나 했었다. 어쩜 취직이 될 것 같은 직감은 면접 후에 회장이 내가 나온 같은 사단 출신이라는 정보를 인사과장이 슬쩍 말한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백척간두 취업이라서 오만가지 연이란 연을 다 떠올려 회장과 연결시키려 했지만 마땅히 더 생각나는 것도 없었고, 돼도 팔자 되지 않아도 팔자려니 했다. 그런데 되었다. 취업이. 그렇게 들어간 회사라서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비록 본사라도 역시나 면접 때 본 회장을 그 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인생 막차 탄 것 같은 회사라서 항상 감사하고 다녔지만 나라고 회사에 불만이 없었겠는가. 그중 딱 하나만 꼽자면 회식이랍시고 회식을 하면 3차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였다.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내겐 이름이 특이해서 주목받는 피곤함보다 더 컸다. 건설사 문화라서 다른 회사도 똑같다는 말들이 돌긴 했었다. 들어간 회사에서도 이름이 한몫했다. 입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본사 로비 경비담당들도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협력업체 사람들이 나를 쉽게 기억하고 친근감을 표시해서 좋았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이름 때문에 놀림감이 되었건만 사회에선 장점이 되다니. 역시나 유명한 소장 말이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회사 대망건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웬일이지? 대망건설사는 1군 건설사도 아니고 2군 건설사 중에서도 순위가 뒤에서 세는 것이 빠른 회사인데 말이다. 요지는 누가 감사원에 투서를 냈다는. 정확히는 대망건설이 최근에 창원지역에서 분양한 아파트에서 평당 공사비를 잔뜩 부풀러 계산해서 분양가를 아주 높여 받았다는 투고가 날라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투고야 그냥 그렇고 그런 투고지만 다음에 올라간 투고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공사비 중에서 철근 값을 부풀려 계산한 것을 넘어 철근을 빼먹고 아파트를 지었다는. 그래서 아파트가 순살 아파트가 되었다는. 더 가관이었던 건 이를 찌른 사람이 내 사수 정 과장이었다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벌써 사표 내고 출근하지 않은지 일주일째였는데 말이다. 퇴사한 정 과장이 처음엔 건설교통부에 찔렀고 건설교통부 공무원들이 대망건설 로비 때문인지 무시를 하니 직접 건설교통부 담당 공무원 실명까지 포함해서 감사원에 찔렀다는. 투서 건이 이제 로비로 해결되지 않는 단계가 된 것이다. 담당 공무원들 선이라면 술자리 몇 번과 봉투에 적당히 넣어 주면 해결될 일을. 호미로 막을 수 있던 일이 커진 것 같았다. 그런데 정 과장은 왜 회사를 그만두고 투서를 냈을까? 혹시 이름 때문인가? 정의감. 정 과장 이름말이다.
그런데 불똥을 왜 불똥이라고 했겠는가? 번지니 불똥인거지. 그것도 내게 말이다. 내가 사수가 한 일을 공모를 하지 않아도 모르지 않았을 거라는. 사건이 알려지면서 회사 감사팀에 엄청 불려 다녔지만. 그렇다고 사수 정 과장이 벌린 일이 무슨 연고로 그리되었는지 여전히 아리송했다. 왜냐하면 정 과장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수가 옴 붙었는지 그때 행복시 행복구 인근에 짓는 행복아파트 개발팀장이 정 과장이고 내가 바로 부사수였으니. 이런 우연히. 이것도 팔자겠지 싶었다. 그래서 덕구 제안을 덥석 문 것이고. 내 입장에선 오비이락이지만 회사 동료들도 돌대가리인 석두가 그럴 리는 없다고 동정하는 것 같긴 한데 일일이 물어볼 수는 없었다. 중요한 건 공사현장에서 실제로 얼마나 철근을 빼먹었는지 다른 아파트 공사현장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지 대대적으로 자체 감사를 벌인 후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내게 잠시 회사를 떠나 있으라 언질을 받은 것이 더 중요할 터. 조용해지면 다시 부르겠다는 회장의 약속을 믿거나 말거나 할 수도 없지만 난 사직을 했었다. 회사가 잠잠해질 때까지만. 담당이 둘 다 그만두었다고 발뺌하려는 속셈이란 걸 모르지 않지만 회장이 나중에 발령을 반드시 낼 테니 조용해질 때까지 쉬라는. 힘이 없으니 하라는 대로 할 밖에. 잘못하면 죄를 온통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이라 정신적 고통이 심해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듬성듬성 빠지는 머리카락을 대책 없이 내려 보던 시점이었다. 그런 시점에 안성맞춤으로 덕구가 연락을 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겠는가? 빼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니라서 고향으로 내려간 것이다.
덕구가 기초의원으로 출마한 행복구는 시 전체가 행덕군에서 행복시로 승격되면서 행덕천을 기준으로 크게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고 강북은 다시 5개의 구로 나눴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구가 행복구로 이름을 지었다고 통화 중에 얼핏 들었던 것 같다. 행덕군이 행복시로 이름을 바꿨으니 구 하나는 행복구로 했다는. 사실은 행덕군이 시로 승격할 기준인 거주인구수가 부족했는데 당시 정권 실세가 시로 승격시키기 위해 옆 지자체 세왕시에서 두 개 면을 강제로 편입시켜 시로 만들었다고 했었던가. 그때 집권한 권력자가 자기 오른팔을 행복시장에 출마시키는 포석이라는 건 몰랐던 내용이었다. 중요한 건 행정개편이 이뤄진 후 치러지는 첫 번째 행복구 의원 선거에 덕구가 나간 것이다. 회사 순살 아파트 관련 감사는 정권을 잡은 민생당에 비자금을 적게 받쳐 본보기로 걸린 것이라는 말들이 돌기는 했지만, 이건 높은 분들 맥락인 거고 나 같은 말단은 그저 무사히 복귀만을 간절히 기다릴 수밖에 없던 때니 놀면 뭐 하나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지방선거라도 선거기에 후보자가 나와서 당선이 되지 않으면 돈과 시간만 쓰고 정치룸펜이 되는 거라서 선거에 지면 덕구가 룸펜이 되더라도 덕구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아 이래나 저래나 해서 출마한 줄 알았다. 평소 허풍이 심해도 덕구가 진짜 완장 차는 것을 좋아하는지는 몰랐었다. 돈은 많고 남는 건 시간인 덕구가 경험 삼아 나왔나 싶기도 했던 것이 전화를 끊고 난 후 든 첫 번째 생각이었다. 덕구가 진짜 선거에 나온 이유가 궁금했지만 덕구한테 네가 정치를 알기는 아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백수 될 처지에 일자리를 제안한 덕구한테 말이다. 더욱이 그때는 구의원이란 자리가 폼 나는 자리가 아니기도 했다. 지방자치가 되면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그때 구의원이란 건 애초 무보수 명예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덕구의 성정과 구의원 선거가 서로 맞지 않게 느껴져 덕구가 당선이 안 돼도 그만이란 생각 때문인지 오히려 고향으로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도 했었다. 막연히 든 생각은 민생당이야 당연히 공천을 빌미로 돈을 챙기려는 거고, 덕구야 차고 넘치는 돈 일부 푼다고 집안 뿌리째 뽑힐 염려는 없다고 해도 굳이 덕구가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희한했던 건 덕구 집안이 어떻게 재산을 축적했는지 관심을 갖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덕구 집안이 인근지역 땅을 그렇게 많이 가졌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정치라는 속성이 당선을 위해서라면 여기저기서 들쑤셔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데 말이다. 이는 아마도 사실을 아는 많은 이들이 세상을 다 뜬 후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덕구 내 할아버지인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인지가 운이 따랐는지 일제강점기부터 도청 토지지적과 담당이었는데, 전쟁이 터진 후 토지주가 행방불명이 되거나 소재가 분명하지 않은 토지들을 파악해서 명의를 도용하거나 헐값에 땅들을 매집하고 자기 명의로 등기를 해놓는 방법으로 땅 부자가 되었다는 건 처음엔 비밀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니 누구도 이를 기억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것도 팔자려니 해야 할 판이었다. 그 후 덕구 집안이 그 지역농협 이사장을 대대로 해 먹었을 정도로 유지로써 영향력이 컸으니 과거는 진짜 과거처럼 되었다. 과거를 묻지 말라는 노래가사도 있으니.
일제 강점기 부역한 역사란 걸 바로잡자는 노력이 언제인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대손손 잘 사는 이들을 배 아파할 사람도 없어졌다는. 어쨌거나 덕구 내 집안 운복인 걸 어찌하리. 털어 먼지 안 나오는 견공들 없듯이 정치권력 치고. 입이 아프다. 아파. 그놈의 역사라는 것이 이긴 자에게 영광을. 시의원도 아니고 기껏 구의원이란 것이 보수도 없고 명예가 있는지 없는지 그저 완장차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서는 것이 정치판이란 거야 관심 없는 이들의 평이지만. 덕구가 정말 완장 차는 걸 좋아한 건지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기초의회를 기반으로 광역의원이 되고 광역의원을 기반으로 국회의원으로 가는 출세의 정석을 덕구가 밟으려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나중에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한 날 덕구가 한 출마의 변은 내가 다시 검토해도 특별할 것이 없는 그럼 그렇지 했었다. 김 빠진 맥주 같은 출마의 변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내가 일부 문장을 손본 건 맞지만 큰 맥락은 그게 그거였다. 행복구를 대한민국 최고의 행복구로 만들겠다는. 그렇다고 완장 한번 차고 싶어 출마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겠지만. 나 출세하려고 출마했소 하면 누가 뽑아줄까? 그럼에도 덕구가 분명 완장을 차고 싶어 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완장을?
결론을 먼저 말하면 여자 때문이었다. 덕구 아버지도 10대에 일찍 장가를 들어 덕구를 낳았듯이 장남인 덕구가 일찍 장가를 들어야 철이 들어 재산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지만 자식이기는 부모 없듯이 덕구 아버지도 덕구를 어쩌지 못했다. 덕구는 결혼 생각이 논꼽만치도 없었으니 말이다. 덕구를 만나지 않은 기간 동안 덕구의 아랫도리 사정은 달리 알 방법이 없었다. 집에 돈이 많은 자식들이 대게 그렇듯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욕구정도는 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이걸 굳이 덕구한테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덕구가 순정파였던 것이다. 여자에 빠진 것이다. 나중에 고향에 내려와 덕구와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 인사하러 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덕구에게 누군가 있다는 건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나만 모르고. 그러다 덕구의 마음을 훔친 여자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최근 오픈한 클럽 피렌체의 실장이었다. 이름은 김소휘. 아니 김소희? 아니 둘 중에 하나. 그녀는 지방 대학을 나와서 이쪽으로 발을 디뎠는데 그것이 그녀의 외모 때문인지 그녀 몸 안에 근질대는 색기 때문인지 내 알바는 아니었다. 어쩌다 클럽에 놀러 갔다가 김소희를 보고 한 번에 빠진 덕구가 적어도 여자를 알 만큼 알았을 덕구가 줄기차게 구애를 해대니 가방끈 짧은 너랑은 급이 맞지 않았고 했다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덕구한테 묻지 않았다. 난 그때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전 여자 친구 신지애 때문에 다시는 여자들을 생각조차 싫었기에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 그런 연유로 덕구는 김소희가 원한 급에 맞추러 기초의원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 하나의 설이긴 한데, 이것이 정설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였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덕구가 구의원으로 당선이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에서 복직명령이 떨어져 난 서울로 돌아간 상태였다. 다행히 시간도 갔고 덕구도 당선이 되고. 기초의원이 돼서 활동하기 시작한 6개월인가 지난 때 덕구가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그걸 안건 엉뚱하게도 회장 비서실에서 알려준 내용이다. 회장 비서실? 분양한 아파트가 행복구 인근에 있었으니 회장실에서 동태를 파악한 것 아닌가 했었다. 아무튼, 덕구가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김소희한테 애정공세를 폈는데, 덕구가 주는 선물 등을 쏙 빼먹고 마음은 주지 않았다는 얘기. 결론적으로 김소희가 덕구를 가지고 논 샘이 되는데, 어느 날 클럽 룸에서 덕구가 김소희를 죽도록 빼는 장면이 그대로 CCTV에 녹화되고 이것으로 클럽에서 경찰에 신고했다는. 결국 검찰로 넘겨진 덕구는 기초의원이 여자를 두들겨 팼다는 내용이 지역방송에 보도되면서 어찌해 볼 수 없는 단계까지 가벼렸고, 나중에 1심에서 실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서야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애초에 김소희는 덕구에게 마음이 없었고 덕구가 항상 열등감으로 생각한 것이 가방끈이란 것을 파악해서 덕구를 거부하는 이유로 네가 유명해지면 이라고 단서를 댄 것인데, 이를 덕구가 진짜 믿고 기초의원이 된 것이라고 했다. 기초의원이 된 덕구가 발이 넓어지면서 경찰에 줄을 대서 김소희의 뒤를 캐보니 그녀와 관계를 맺은 남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고. 이런 사건들도 몇 달 지나면 흐지부지 해지고 말지만. 확실한 건 김소희는 덕구한테 얻어터져 얼굴을 20 바늘 꿰는 수술을 받고 더 이상 클럽에 나오지는 않았다고. 덕구 내 집에선 덕구가 어떻게든 검찰로 넘어가기 전에 합의를 보려고 엄청 돈을 처발라 김소희한테 줬지만 그마저 챙겨 그녀가 어디로 날랐다는 얘기.
여기까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인데, 내 이름 때문인지 유명한 작명소 소장 말이 귀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보궐선거 때문이었다. 덕구가 그렇게 되니 당연히 구의회 의원 자리가 하나 비었으니 굳이 채우지 않아도 되는 구의원 자리를 지금은 민생당으로 소속을 바꾼 행복구 구의장이 보궐 선거를 굳이 하겠다고 했다나. 이것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려고 했는데 덕구에겐 불행이 내겐 행운이 될 것 같은 불똥이 내게 확 달라붙었다. 어느 날 회장이 나를 찾는다고 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기대감으로 부풀어 회장 실 문을 두드린 후 인생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역시나 내 의지고 나발이고 난 다시 팔자에 맡기기로 했다. 더불어 이름 덕을 제대로 보기로 했다. 선거관리본부장으로 무난히 일을 처리한 것이라고 난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 사이에 인지도가 높아져서 그런 건지 회장 문을 나서면서 난 네네 하고 나온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내 팔자 그러려니 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잔챙이들이야 역사에서 희생되지 않고 살아나면 그만이라서, 중요한 건 역시나 내가 밑지는 것이 없는 것 같아 받아들이긴 했지만 뭐 별수가 있나. 회장 말을 정리하면 이랬다. 행덕군이 행복시로 승격된 거야 앞에서 언급한 정권 실세 어쩌고 저쩌고 한 것이고. 행복시와 행복구에 굳이 회사가 군침을 흘린 이유는 대망건설 회장이 정권 실세와 고등학교 동기라던가 어쨌던가. 그 실세가 앞으로 행복시에 묶인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를 분양할 텐데 너희 회사가 입찰에 뛰어들면 인허가를 빠르게 도와줄 테고, 그 대가로 일부 자금을 민생당에 전달하라는 밀약이 오갔을 거라는 건 추측이었다. 누군가 미리 행복시에 짱 박히라는 건데, 마침 구의원 자리가 나니 미리 내려가서 전초부대원 역할을 하라는. 일종의 언더커버가 되라는 것. 구의회에 자리 잡고 주변을 포섭해서 시청 인허가 담당을 포섭하라는. 뭔가 그럴듯한 구상이 위에서 다 짜놓은 것 같았다. 난 피노키오에 나오는 줄에 매달린 인형. 딱 이거였다.
그렇게 회장과 면담 후 복잡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 회장실을 나오다 문득 그때서야 처음으로 회장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그 넓은 회장 책상에 놓인 명패.
백성기(白性基). 백성기? 아……. 백~ 성기?? 그럼 회장도 유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