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성(2024). 빛이 이끄는 곳으로. 북로망스
요즘 뇌가 고장 난 것 같다. 원래 시원찮았지만 부쩍 심해진 것 같다. 특히, 뇌 부위 중에 감성을 담당하는 전도체가 이상하다. 뭔가 보고 아름답다고 해놓고 그 아름다움이 뭔지 잘 모르겠다. 아름답다는 건 뭘 말하는 걸까? 특이한 소설 같아서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더니,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 이 소설은 '아름다운' 거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내가 내게 말하는 거지만. 알듯 말 듯 한 아름다움이란 단어. 차라리 예쁘다고 하면 쉽게 전달되는데, 이 단어는 말해놓고 다시 생각해도 쉽지 않았다.
백희성이 누군지. 건축가라는 단어가 모자라서 건축 디자이너라고 하네. 무슨 차이? 그러니 뇌가 좀 이상한 거다. 그런 그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대게, 건축가 하면 방송에 나와 인지도를 높이고 유튜브에서도 활동하는 사람들 몇몇 정도. 아니면 건축 관련 에세이를 써서 깊은 건축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들은 있었던 것 같은데 건축가가 쓴 소설이라니. 얄팍한 지식이라서 이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럴 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름답다'는 말 같아서 굳이 아름다움이 뭘 말하는지 생각해 봤다.
소설에서 핵심은 빛이다. 다음은 아마 기억. 중세에 지어진 수도원 공간, 어둡다만으로 표현하지 못해 온통 컴컴한 공간에 작은 구멍으로 햇빛이 든다면 그때 빛은 어쩜 구원을 떠올릴 정도로 강렬할 텐데, 여기선 그 빛이 기억과 연결된다. 빛이 기억과 연결되는 공간은 시테섬 고택과 루체른 왈츠 요양병원. 시테섬은 피터 왈처의 집이고 요양병원은 피터 아버지 프랑스와 왈처가 허물어진 중세 수도원을 병원으로 개조한 장본인. 시테섬 고택도 프랑스와가 복원한 것이니. 그는 자주 뤼미에르의 꿈에도 나타나 계시를 한다.
건축가는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뭐,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을까마는. 여기선 집을 남을 위해 짓는 걸 강조하는 건데, 이것 때문에 피터 왈처의 시험에 든다. 계기는 뤼미에르가 자기 집을 갖고 싶었기 때문. 그것도 아주 싼값에? 그런데 그 비싸다는 시테섬 고택이 매물로 나온다. 단,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이런 형식이 전체 소설을 지배한다. 우선, 피터의 질문에 답을 그가 원하는 형태로 했기에 통과. 집을 구입하면 그 집을 수리해서 살 것이고, 일시에 때려 부수고 새로 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추억은 간직될 터. 여기에 피터와의 직접 면접을 해야 한다는 조건도 받아들였다.
피터는 루체른에 있는 부자들만 머물 것 같은 요양원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그가 남긴 문제는 왜 4월 15일인가와 왜 당신이어야 하는가? 이런 집주인이 있을까 싶지만 이게 없으면 이 소설은 길을 분명히 잃는다. 날짜 4월 15일의 의미를 찾는데 왜 당신이 찾아야 하는지. 후자는 주인공이 건축가이기에. 아주 쉬운 답이지만 읽다 보면 건축가 이전에 건물에 누군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살아 쉼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걸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 누군가 집이라는 공간엔 사람이 산다는. 그들의 이야기가 집이란 공간에 머문다는 것을.
며칠 요양병원에 머물면서 피터의 질문과 피터 아버지 프랑스와 그리고 아나톨 가르니아의 일기를 가지고 파리로 돌아오는 뤼미에르는 그곳 요양원에서 겪은 4월 15일, 오직 일 년에 한 번 겪은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가 그곳에서 떠날 때 받은 피터의 편지는 시테섬 집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것. 웬 횡재? 그럼에도, 뤼미에르는 그 집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집에 숨어있던 주인들의 삶과 기억을 찾아준다. 그 집에 살던 피터 아버지와 가르니아란 장님 여성과 관련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아, 이럴 때 아름다운은 무슨 뜻이지?
소설에서 4월 15일은 1921년으로 아버지 프랑스와와 아나톨의 읽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아버지 읽기는 시간 순으로, 아나톨의 이야기는 역순으로. 이건 아나톨이 행복하던 시기를 기억하기 위해 거꾸로 쓴 일기를 읽으면서 뤼미에르는 점점 더 시테섬 집을 완전히 복원해서 과거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찾아내 이를 집주인에게 전달해 준다. 그제야 피터는 아버지 프랑스와가 남긴 수수께끼를 이해하고 아버지와 아나톨과의 관계를 제대로 받아들이는데, 결국은 루체른 요양병원 보다 시테섬 피터의 집이 그것도 다락방 비밀의 벽이 모든 걸 말해준다.
아버지 프랑스와는 고아로 자라 자기 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법을 몰랐는데, 그 아들 피터도 실제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이 소설은 아름다운 소설임에는 확실하지만, 우리들 각자 살아가는 공간 그 안에 숨 쉬며 살아온 사람들의 추억이 아름다운 건지. 그걸 기억하자고 작가가 쓴 책 내용이 아름다운 건지. 작가는 8년이란 시간을 프랑스에서 머무는 동안 가가호호 집들을 방문해 그곳에 산 사람들을 메모라는 형태로 기억했다고. 그것이 소설을 엮은 토대가 되고. 이를 알고 싶다면 소설 각 장들 이루는 가지각색의 대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다 다르다. 다 다른 우리네 인생처럼.
소설에서 벌어진 4월 15일 오직 1년에 한 번 일어난다는 사건은 소설을 읽으면서 진짜 눈을 감고 상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빛이 이끄는 곳, 빛이 어디에 머무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