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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Dec 19. 2024

안부를 물어준 빛나는 소설!

백수린(2023). 눈부신 안부. 문학동네.

눈이 부시면 제일 먼저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까? 어떻게든 눈으로 들어오는 빛, 그 양을 줄이려고 말이다. 그런데 소설이 눈부시면 눈이 커지지 않아도, 뇌는 용량을 최대한 확장할 것 같다. 문장들 사이 행간들 사이 오롯이 숨어있는 어떤 빛을 찾기 위해. 거기엔 거짓말도 포함되어 있지만. 거짓말! 거짓말이 일상인 사람들도 있는데, 딱 한 번만 거짓말을 했을까, 살면서 결정적으로 거짓말을 했기에 친구들과 관계를 거의 끊은 주인공이 있다. 이름은 해미. 

해미는 원래 둘째 딸이 그런 듯이 밝고 명랑해야 하거늘 죽은 언니 때문에 장녀로 살아간다. 이때 장녀란 삶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를 말하고. 언니는 어느 날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건 아빠와 엄마 사이 간격을 훌쩍 벌어지게 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별거가 엄마와 해미와 동생 해나를 아주 먼 독일 G시로 이끌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낯선 생활도 그곳 친구들과 잘 지낸다는 거짓말이 숨어있다. 이건 한국에서 떠날 때도 떠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 거짓말의 연장선 상이지만. 

거짓말이 그렇듯이 언젠가 드러나기에 이걸 알아챈 건 진짜 이모 행자 이모다. 그녀는 파독 간호조무사가 되어 독일에 정착하면서 그곳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들과 공동체 구성원처럼 살면서 타지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소설 서사가 결정적으로 바뀌는 대목이다. 그들의 생활력과 아픔에 공감하면서 해미도 감춰둔 마음을 하나씩 열어가며,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와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와의 관계를 그곳 생활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독일에서 빛나게 살아갈 때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해미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건 어렵게 열었던 마음을 다시 닫히게 만든다. 굳게.

그동안 레나와 한수와 함께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로 똘똘 뭉쳤는데,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온다는 의미는 해미가 다시 한국에서 적응을 해야 한다는 의미. 이건 또 다른 시작이었다. 짧은 독일에서의 생활을 언니가 알면 미안할 정도로 행복하게 살다 다시 적응을 해야 하는 해미. 여전히 선자 이모 첫사랑을 찾는 숙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스스로 헤나와 한수와의 관계를 멀리한다. 이들이 굳이 1973년 시작된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주려는 건 선자 이모가 시한부 인생을 살았기 때문. 누군가 죽기 전 들어주고 싶은 소원이기에. 단지, 아는 단어라곤 K.H.라는 이니셜. 

타인과 맺는 관계를 두려워하고 남을 받아들이지 못한 해미에겐 그녀를 좋아하는 우재로 인해 누군가 맺는 소중한 관계를 생각한다. 이건 선자 이모의 사랑을  다시 찾아 나서게 만들고. 그것도 20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건 죽은 선자 이모에게 보낸 편지가 거짓말이었기 때문. 죽을 자에게 보낸 거짓말이라니. 해미만 알고 있을. 선자 이모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K.H. 를 찾아 그로 하여금 죽어가는 선자 이모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게 만든 결정적인 편지를 대신 써서 보냈던 것. 독일 친구 한수와 레나는 이를 몰랐었고, 선자 이모 아들 한수는 해미에게 무한히 고마워할수록 해미는 그것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했던 것. 

그런 해미는 지난날 언니를 잃은 상처와 죽어가는 선자 이모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세상에 나선다. 방법은 그 K.H. 를 다시 찾는 것. 그렇게 찾아낸 K.H. 는 그녀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그 누군가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그건, 그곳엔 누군가 아니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빛나는 안부가 있었다. 세상과의 만남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낯선 이국땅에서 디아스포라에 시달리면서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렸을 이 땅의 언니들을 위해, 나중에 어떻게든 가까워지고 싶은 우재를 위한 눈부신 안부. 궁극엔 소설을 읽는 당신을 위한. 그렇게 소설은 눈부셨다.

거짓말이 눈부실 수 없음에도, 거짓말을 눈부시게 만든 건 죽은 선자 이모가 오래전에 써둔 '편지'였다. K.H. 에게 쓴 편지. 이 말은 해미가 K.H. 를 찾아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 편지는 어쩌면 선자 이모가 해미에게 쓴 편지이기도 했기에. 해미가 선자 이모 첫사랑을 찾아내서 그로 하여금 써서 보냈다는 편지가 허구임을 선자 이모는 알고 있었던 것. 선자 이모는 그렇게 보고 싶던 첫사랑과 자기 삶과 인생과 여기에 해미의 거짓말까지 다 받아들이고 죽었던 것......

주변에 혹여 외국에 사는 누군가가 있다면 속히 '잘 살고 있지요?' 나도 '잘 살고 있어요!'라고 편지를 쓰고 싶게 만든 소설. 당신뿐만 아니라 내게도 안부를 전하는 소설. 누군가 낯선 내게 안부를 물어준 빛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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