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님이 내 페북 친구라는 걸 알았던 그 날
일기 쓰지 않는 일상
음악을 듣지 않는 일상
소설을 읽지 않는 일상
멜로 영화를 보지 않는 일상
(분노와 전투의지 외에는) 동요하는 감정이 찾아들지 않는 일상
감각이 둔해지는 일상
출근과 퇴근만이 반복되는 일상
꿈 없이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닌가,
내가 진짜 그게 하고 싶기는 한건가,
하고 의심하며 자꾸 게을러 지는 일상
차장님, 그거 아세요?
차장님하고 저, 둘이서 맥주 한잔 밥 한 끼 한적 없는 거.
그런데도 제가 차장님 이렇게 여전히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건 잘 아시죠? :)
근데 이번에도 또 보경이랑 지영이랑 넷이서 같이 맥주 한잔 하고 아셨죠?
저 보경이 지영이 같이 여리여리한 공주 타입 애들하고 안 맞는 거 잘 아시면서.
안 친하다고요. 그냥 일하면서 잘 지내는 건데.
그런데도, 제가 알겠다고 오케이 한 거예요. 진짜 오랜만에 차장님 하고 술 한잔 하고 싶어서요.
차장님 오시고 그 첫 주간이나 첫 달 정도 기억나요. 차장님이 우리 점포로 발령받고, 스타킹/양말/스카프 브랜드 과장님하고 대리님들이 바로 오셨잖아요. 신입사원 때부터 서로들 친한 사이라고.
철기 과장님하고 보다 더 친해 보여서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좀 샘났어요.
난 철기 과장님 가서 속상해 죽겠는데, 철기 과장님 가고 브랜드 대리님 과장님들이 소니처럼 쏜살같이 달려와서 차장님 하고 친하다고 막 서로 '형이~' 이러면서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난 좀 얄밉기도 하고, 그래도 협력사하고 사이좋은 파트장이 와서 든든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우리가 그때 아구찜인가 먹었나, 연포탕인가 먹었나 그랬는데 중간에 누가 뭐라고 물었거든요?
질문은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제 대답이 자주 기억나요.
저는 그 대답을 하고 매우 뿌듯했죠. 절개를 지킨 충신처럼.
그러나 식사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죠.
"아닌데요, 저는 철기 새낀데요?"
대답에 따라 유추해보건대, 누군가 브랜드 과장님 대리님 중에서 이제 문주임 곽차장님한테 잘해라, 곽차장님 잘 모셔라, 뭐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근데 이미 3년 차여서 신입사원도 아니고 머리도 큰 제가 철기 과장님에 대한 무한한 충심으로 새로 온 나의 파트장 앞에서 저렇게 말했잖아요.
지금 생각해도 진짜 참 학생 티를 못 벗은 아이 같은 마음이었네요.
철기 과장님에 대한 내 충심 또한 오랜 기간 보상과 대답 없이 이어오고 있는 게 문득 생각나네요.
왜 내가 사랑하는 사수들은 내 사랑에 대한 회신을 이렇게 해주지 않는 걸까.
두 분 다 참 무심하네요.
차장님 근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이 다 차장님 무서워해요.
곽차장님하고 일하던 시절 나는 정말 좋았어,라고 말하면 또래 동기들 선후배들 다 눈 동그래져서
뭐? 진짜야? 야,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이렇게 말했어요. 진짜 우리 잡화 쪽 애들 차장님 다 무서워하고 어려워해요.
근데 내가 엄청 좋아하죠.
난 차장님 하고 일하던 시간, 좋았거든요.
물론 저도 무서웠죠. 1층에서 근무 서고 있는데 전화 울려서 보면 발신자에 '곽땡땡 차장님' 뜨면 저도 순간 쫄아서 주변을 살피고 받았다니까요.
차장님이 빡세긴 빡셌죠, 종일 서 있다가 잠깐 어디 앉아서 쉴 틈 안 줬다니까요. 좀 쉴라고 하면 전화 딱 오고.
또 직원들 근태 관리하라고 아침 일찍 와서 근태 체크하고 그랬잖아요, 저 19년 동안 한 번도 반장 못해봤는데, 아 그때 진짜 내가 반장인가 뭔가,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 근태 체크도 하고 말이야 했는데, 그게 다 결국에는 도움이 되었죠.
관리자로서 저는 차장님의 그런 타이트한 부분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차장님을 '팔면서', '아, 이게 차장님이 시킨 거라서'. '아, 저도 하고 싶지 않지만 저도 차장님이 무서워서' 등의 멘트를 치면서 이리저리 모든 일을 지름길로 쉽게 간 것도 많죠.
'상사를 잘 파는 것'도 일을 잘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얻은 시간이었죠.
그렇지만 차장님은 너무 빨리 떠났어요.
4-5개월 만에 차장님이 다른 지점으로 가버렸잖아요.
난 더 많은 신뢰와 존경과 애정을 드리고자 마음을 쌓고 있었는데, 곧 철기새끼 말고 차장님 새끼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너무 빨리 떠나버렸어요.
그 이후로 긴 고난의 주간이 시작되었고요.
고난의 주간이면 늘 생각했죠.
이렇게 돌다 돌다 곧 철기 과장님을, 차장님을, 국표대리님을 다시 만날 거라고 그러니까 올 한 해만 버티면 된다고.
저는 늘 세 사람만 생각했어요.
우리는 늘 2-3년 텀으로 지점을 돌고 돌다 다시 만나기도 하잖아요. 그게 10년에 한 번 돌아 다시 만나는 것인 줄 그때는 몰랐으니까, 기다리면 곧 다시 같이 일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늘 버티고 버텼어요.
마음이 많이 약해지는 날에는 가끔 전화를 드렸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차장님께는 일 년에 한 번 드렸고요,
철기 차장님한테는 일 년에 두 번 드렸어요.
국표 대리님한테는 잘 안 했고요.
점 생활을 하면서 물론 많은 부분들이 다 어려웠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제가 조금 더 힘들었던 게 있다면
첫째는 외모이고, 두 번째는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일단 점순이 친구들이 대체로 참 날씬했어요. 애들이 어떻게 다 그렇게 여리여리하게 사십팔 킬로에서 오십삼 킬로 정도만 나가게 생겼냐고요. 종아리도 막 내 팔뚝만 해가지고.
저 다리랑 저 팔로 어떻게 매대를 나를 수 있냐고요. 그니까 애들이 지 매대를 지가 안 접고 다른 직원들만 시키죠! 내 매대는 내가 접고 펴야죠!
다른 친구들이 여리여리하게 커리어우먼 원피스를 입을 때에 저는 주로 바지를 입었는데, 그게 좀 달라 보였나 봐요. 라떼는 말이야, 팀장님들 중에 몇몇 분께서 자주 제 의상 지적을 하셨죠,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녀, 이런 말들이 전해질 때면 마음이 좀 아팠어요. 가끔 어떤 분은 '살 좀 빼, 너 허벅지가 나보다 더 굵다'라는 말을 제 얼굴을 보고 하하 웃으시며 하기도 하셨는데, 아, 11년 전에는 거기다 정색을 하기는 어려웠어요.
이제는 정색이라면 뭐 숨 쉬는 것 같이 쉽게 하지만요.
아이, 물론 저도 원피스를 입고 싶었지만, 저는 그때 술이랑 떡볶이랑 진선이가 너무 좋았어요.
진선이랑 오후 9시 10시에 퇴근하고 막걸리에 소주에 와인에 먹고 알딸딸해져 막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그 시간이 좋았거든요. 경란 매니저님 하고 노가리에 생맥주 세 잔씩 먹으면서 오늘 하루를 복기하는 것도 진짜 재밌었단 말이에요.
전 그걸 포기하면서 날씬해질 수는 없었어요.
경제적인 부분이야 말해 뭐해요, 난 사고 싶지도 않은 명품백을 위아래층 애들이 열심히 매고 다녔잖아요. 아, 저는 2백만 원짜리 가방은 도저히 못 사겠던데 애들은 월급 모았다 사고, 연초에 성과급 받으면 사고 막 이러더라고요. 또 옷도 그래요. 전 자라나 H&M 시즌오프 할 때 한바탕 사서 그거 입으면 신나는데, 아니 옷만 새로 입고 가면 '무슨 브랜드냐' 하고 묻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거예요. 귀걸이도 난 피어싱이면 족한데, 피어싱 뭐냐고 얼른 여기 와서 귀걸이 사가라고. 자켓에 블라우스에 하이힐까지 전 진짜 비싼 거 싫었는데, 사람들이 하도 물어보니까 억지로 사고 돈 아까워하던 게 있었어요.
전 그 돈이면 경란 매니저님 하고 진선이하고 맛있는 안주에 술 더 자주 먹고 싶었는데.
그땐 그런 게 좀 힘들었어요. 어려서 더 그랬겠죠. 그때가 스물여섯에 스물여덟까지이니까요.
지금은 그런 거 아예 신경 안 쓰고 살아요. 남들 보기에 어떨까, 이런 생각 잘 안 하고 살아요. 엉덩이랑 허벅지 좀 덜 뚱뚱해 보이게 하는 맘에 드는 원피스랑 와이드 팬츠 입으면 그날은 '기분이 조크든요'. 대체로 좋아요.
전 아직도 술이랑 떡볶이가 좋아서, 여전히 살은 못 빼고 살아요.
차장님, 지난 4월에 차장님한테 문득 전화가 왔었어요.
여보세요, 하고 받은 전화에 차장님 첫마디가 이랬어요.
'야~ 너 괜찮냐~?'
저 진짜 깜짝 놀랐단 말이죠.
저 안 괜찮았거든요. 전날 저녁 저는 엉엉 울었어요.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다가, 와인을 한잔 마시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글을 쓰다가. 그날 많이 울었어요.
요즘 회사 별로였거든요. 위로 아래로 잘 안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아참, 마침 영화 <남과 여>를 보기도 했죠. 전도연이랑 공유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그 영화가 어떤 내용이냐면요.
전도연은 약간 정신적으로 아픈 아들을 키우는 편집숍 매니저이고, 남편은 정신과의사인가 그래요. 공유는 건축설계사인데, 부인이 조울증이 심각하고요. 그래서 공유 딸이 늘 엄마의 조울증이 두려워 긴장하고 있어요. 전도연과 공유가 각각 자기 애들을 데리고 핀란드의 키즈 캠프 같은걸 가는 거예요. 가서 우연히 만나고요.
처지가 비슷한 것도 있고, 일상을 벗어난 곳이니 일탈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겠죠. 그리고 중요한 건 각자의 일상이 너무 지치고 외롭잖아요. 인생에 내가 없잖아요. 아이를 살펴야 하고, 아픈 부인을 살펴야 하고, 무심한 남편이 있고요.
영화 속 그 일상이 콱 제 숨을 막히게 했어요.
그리고 지금의 내 일상과는 뭐가 다른 걸까, 하고 순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매일이 똑같더라고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복닥거리는 생활. 넉다운된 몸을 끌고 와서, 아침에 먹은 설거지를, 일주일간 쌓인 세탁기를 돌리고, 금요일 저녁이면 맥주 한잔에 영화를 보며 '이게 바로 소확행이다'를 운운하는 삶.
지금 내가 괜찮은 건가?
차장님이랑 같이 일하던 그때에 차장님은 추호도 모르셨겠지만 전 그때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글이 쓰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거든요. 이 회사생활 3년만 딱 하고 얼른 그림 그리러 가자, 글 쓰러 가자, 인선아. 하고 다독이며 살았거든요.
저는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조금만 쓰고, 이렇게 드물게 그리면서 뭐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걸까.
전 이렇게 자주 현타를 맞아요. 한 달에 두 번 정도 여전히 맞아요.
근데 그런 하루를 보낸 다음날 차장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다고요.
'야~ 너 괜찮냐~?'
저는 놀랐어요. 그거 있잖아요.
나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안부 물으면 갑자기 좀 무턱대고 솔직해지고 싶은 거.
저는 순간 차장님 앞에서 좀 솔직해졌죠
'안 괜찮아요, 요즘 좀 안 좋아요, 힘들어요'
근데 차장님이 또 말했다고요.
'그래, 너 이상한 것 같아서~'
'네? 저 이상한 거 차장님 어떻게 아셨어요?'
'몰라, 너 페이스북 글 이상한 거 올라왔길래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저는 차장님이 제 페이스북 친구일 거라고는 지난 11년 동안 평생 생각을 못했다고요.
우린 언제부터 페북 친구였던 거예요?
제가 지난 11년간 술 먹으면 주절거리던 제 일기를 그동안 다 보셨다고요? 아, 순간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아, 이럴 수가. 아, 쪽팔려.
하는 생각이 후딱 들었죠.
저는 좀 창피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재택 끝나면 맥주 한잔 하자' 하고 우리는 전화를 끊었지만, 언제부터 차장님이 내 페북 친구였던 걸까에 대해 좀 오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페북에는 회식이 끝나고 술 취한 정신으로 적은 철기 과장님을 그리워하는 세레나데도 진짜 많은데, 차장님 그거 보시며 서운하지는 않으셨을까, 하는 오지랖까지 펼쳐지더라고요.
그래도 철기 과장님은 나랑 페북 친구 아닌데, 차장님이 페북 친구여서 좀 좋은 기분도 뒤늦게 들었어요.
근데 문득 오늘은 갑자기
철기 과장님 아니고 차장님이 생각났어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페이스북에 안 올릴 건데.
차장님은 제 편지를 못 보겠네요.
지난 11년의 회사생활 속에서 철기 과장님하고 1년 반, 차장님하고 5개월, 지금 회사에서 만난 홍팀장님하고 3년.
저는 11년의 회사생활 중에서 5년을 좋은 사수하고 지냈어요.
돌아보니, 입사 때부터 '너 인복 있나 보다' 소리 들을만한 회사생활인 것 같네요.
덕분에 늘 자신감 있게 든든하게 일했어요.
체중도 외모도 경제적인 열등감도 다 극복해가며 정말 좋은 사수들 만나서 신나게 지낸 것 같아요.
남들은 판타지라는 웹툰 '미생'의 오상식 과장님과 김동식 대리님이
제 회사생활 초반에 있어주어서 저 정말 세상모르는 철부지같이 겁 없이 잘 지내왔어요.
글과 그림이 그리고 싶어 절절매던 예술가 지망생, 벌써 11년 차 회사원이에요.
이제 회사원 다 되었어요.
그러니까 차장님도 이제 애들한테 덜 무섭게 하시고, 리스펙 많이 받으면서 지내세요!
인상 쓰지 마시고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그럼 코로나 지나가면, 맥주 한잔 하러 뵈어요.
둘 아니고 여리여리 공주 같은 보경이랑 지영이랑 넷이어도 기쁘고 신나게 찾아뵐게요!
- 인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