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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Aug 16. 2018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

나는 아직 삼십 대 초반인데!

우리의 계획은 심플했다. 올해에 아이를 가지고, 내년 초에 낳는 것. 수업을 들을 때마다 3년은 주 양육자가 키우는 게 좋다는 소리를 귀에 닳도록 들어서, 아이를 가지면 올해까지만 회사에 다니고 퇴사할 생각이었다. 퇴사를 하면 수입이 줄어드니 아버님 용돈을 줄여야 하고, 아버님 용돈을 그냥 줄이자니 입맛이 씁씁해서 아버님이 받으실 수 있는 혜택을 찾아보고 아버님 동네의 주민센터에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주민센터의 노인복지 담당자였다.


- 저, xxx님 며느님 되시나요?

- 네! (아버님 또 무슨 사고를 치신걸까...)

- 저, 아버님 혹시 치매 검사 한 번 받아보셨나요?


우리 아버님은 성격이 워낙 괴팍하시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호호 웃으며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이상 증상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씩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주민센터에 와서 소리를 지르시고, 너네가 내 것을 훔쳐갔다고 또 화를 내셨다고 한다. 한 번은 너무 더운 날이라 음료수를 드렸더니 입에 머금고 가만히 계셨다고 한다. 그러다 뱉으시고, 또 한참 뒤에 음료수를 드셨다고 했다. 담당자의 말로는, 치매 증상 중 음식을 삼키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처럼 보인다고 하셨다.


순간적으로 재빠르게 머릿 속에서 비디오 테잎을 돌려보았다. 아, 정말 치매 증상들이 있었다. 내 마음 속에 아버님은 항상 괴팍하고 걍팍한 노인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 증상들을 이상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뿐이지. 사실은 오래 전부터 증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안 그래도 아버님은 2개월 전에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다 계약을 해놓으셨다가, 이사 며칠 전에 갑자기 안 하겠다고 하셔서 위약금을 잔뜩 물었던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백만원을 들여 방역과 청소를 해드렸는데... 며칠 전에 연락이 와서, 또 이사를 가야겠다고 하시는 거였다.


아버님의 이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아, 이 결혼은 하는 게 아니었다고. 젠장, 젠장!! 나는 진짜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아버님한테 전화를 걸어서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냐고 화를 낼 뻔했다. 정말 남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남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만나지 않았겠지. 그래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왜 결혼을 한 걸까. 세상만사 다 부질없는데...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이런 골치아픈 송사에 엮일 일이 없었는데... 내 팔자 내가 꼰다더니...


그런데 아버님이 아프셔서 그러셨던 거였구나! 라고 이해가 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리고 동생과 하하호호 술을 마시며 즐겁게 보냈다. 현타는 다음 날부터 찾아왔다. 남들은 남편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놀러다니는데 나는.. 치매 시아버지를 보살펴야 한다고?


나는 갑자기 모든 게 억울해졌다. 그 전까지의 화와 짜증은 그래도 견딜만 했다. 조금 힘들면 치킨을 먹고, 많이 힘들면 소갈비를 먹으면 해결되는 수준이었는데 이건 뭐 어떤 것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공연히 남편을 앉혀 두고 도대체 왜 나랑 결혼해서 내가 이런 상황을 겪게 만들었냐고 펑펑 울었다. 남편은 미안해했지만 아버님의 남은 가족은 오빠밖에 없기 때문에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한 2~3일 간은 거의 패닉에 빠져서 지냈다. 우리는 얼굴만 보면 싸우고 또 화해했다. 남편은 내게 미안해했고 나는 그런 남편이 안쓰러웠지만 내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혼을 할까, 이혼을 하는 게 어떨까.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온 표정으로 상담실에 앉았다. 선생님은 일단 우리를 위로해 주신 다음,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 보여주셨다. 지금 아버님은 경기도 외곽에 살고 계시고,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고 하는 상황인데 우리에게 더 먼 곳으로 가는 것은 지금 상황에 맞지 않다. 힘들더라도 집 근처로 모셔와서 남편이 틈틈히 케어하는 게 어떻겠냐.


나는 당연히 오빠도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오빠는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이 한결 편할 것 같다고 했다. 항상 너무 싫다고 말해도 아버지는 아버지구나. 그래도 아버님이 우리 집 근처로 오시는 건 너무 싫었다. 지금도 만날 때면 하시고 싶은 것도 많고 드시고 싶은 것도 많은 데다가 꼭 아버님이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소리를 지르시는데, 그걸 감당하고 살다가는 내 머리가 다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하지만 미안하다는 어투로 그것은 좀 어렵다는 것을 계속 어필하니,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님을 근처로 모셔와서 모든 수발은 남편이 다 하게 해라, 네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아들이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것을 막지는 말아라. 


그 말에 KO 당하고... 집 근처로 오시되 우리 집 반경 10Km는 떨어진 곳으로 모셔달라고 오빠에게 얘기했다.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라면서 마음을 달랬다. 물론 그렇게 될 수 없으리란 것을 안다. 오빠가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게 되겠지. 어떤 일은 내 일이 되기도 하겠지.


다시 시간을 돌려서 몇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이 결혼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해 버렸으므로 나는 이 삶에 적응해보려고 한다. 일단 산산조각난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래도 좋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나는 사회복지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으니까, 관련 정책들을 실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오빠와 아버님이 같이 여러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오빠 마음 속에 있는 아버님에 대한 응어리들도 풀리게 되겠지. 둘 다 건강하고 젊은 시기에 이런 일들을 미리 해결하고 나면, 말년은 좀 편하겠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캄캄하게만 보이는 이 길이 짧고, 어둡지많은 않은 삶의 한 페이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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