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보존 법칙

역할로 기억되는 사람들

by 미지의 세계

마트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계산하는 분이 농담을 던졌다.


"꼭 캔 하나만 사가더라고.. 여러 개 사가면 할인되는데. 알죠?"


장을 볼 때마다 캔맥주를 꼭 하나씩 사가니 하는 말씀이었다. 많이 사서 쟁여두면 과음하게 되더라고 웃으며 말하니, 그분도 동의했다.


"그렇긴 하죠. 많이 사가면... 맨날 이거 하나만 사가서 궁금했어요. 잘 가요~"


친절한 계산원. 그의 이름도, 역사도 모르지만 익숙한 분이다. 비단 얼굴이 낯익다는 얘기만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이런 계산원을 만나왔던 것 같다. 손님의 구매 목록을 궁금해하고, 가끔 시시콜콜하게 할인 품목을 알려주는 사람. 지역과 연령이 바뀌어도 이런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게 신기했다. 비슷한 특성이 있는 사람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일명 빈자리 보존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어릴 때도, 동네가 바뀌었을 때도. 얼굴만 달랐을 뿐, 하는 말과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무적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엄청 친절한 문방구 사장님, 능글맞게 가격 흥정을 하는 시장 과일가게 사장님, 뭔가 늘 화가 나있는 당구장 사장님- 자영업자에만 한정된 얘기도 아니다. 개량 한복만 입고 다니는 한문 선생님, 단소를 사랑의 매로 들고 다니던 학년 부장 선생님, 유독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 지역으로 확장해 보면 어떤가. 도시에는 지하철 옆자리에서 꼭 말 거는 어르신이, 시골에는 차도든 인도든 무심하게 걷는 어르신이 있다.


게임에서 개발자가 NPC(Non player Character, 게이머가 조작하지 않는 보조 캐릭터)를 세워두듯, 어느 전지전능한 존재가 매번 자리를 채워 넣는 건 아닐까. 물론 이런 영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냥 환경과 상황에 사람들은 적응하며 사니, 방식이 비슷하게 이어지는 것일 테다. 아니면 크면서 봐 온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가끔은 이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도 만난다. 너무 낯설어서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어떤 옷가게 사장님은, 시종일관 수줍게 서 있다가 내게 다가와서 "이 옷은 안 어울리고, 이쪽 옷이 더 나을 것 같아요." 하며 더 저렴한 옷을 추천한 적도 있다. 보통 장사하는 분들은 경제적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맞는데, 그분에게 받은 인상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어울릴 옷을 골라주고 싶어요.'였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그분이 추천하는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언제고 손이 가는 스테디셀러로 옷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물론 반대 사례도 있다. 콕 짚어 말할 순 없지만 누구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될 것 같은 자리의 사람들이 의외로 무심하게 비도덕적이었던 순간이 있다. 대체 장사할 마음이 있는지 궁금한, 어느 가게의 불친절한 직원을 마주할 때도 있고.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오히려 머릿속에 각인된다. 보통은 다들 무심하게, 주어진 기대에 맞춰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나도 무심하게 해내는 역할들이 있다. '다정한 듯 종종 짜증 내는 엄마', '수영을 열심히 하는 싹싹한 젊은이', '웃으면서 말 걸어주는 동네 이모'다. 아마 곧 있으면 '과학관에서 정보를 안내하는 직원'의 역할도 추가될 거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에게는 익숙하고 뻔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배치돼 기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나는 나를 아니까,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서로 다르단 걸 안다. 하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이들의 눈에는 나도 뻔하고 똑같은, 기능적인 사람일 것이다.



관점을 3인칭과 1인칭을 오가며 생각해 보니, 왜 그렇게 비슷한 결의 캐릭터들을 전 생에 걸쳐 만나게 되는지도 알 것만 같다. 내가 나 인 채로 존재하는 건 오직 스스로와, 일부 친한 지인들 사이에서나 있는 일이다. 평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과 교류할 때 필요에 의한, 기능적인 교류만 하기 때문에 그 단편적인 특성이 더 부각된다. 호랑이 선생님이 집에서 다정하든 말든, 원래 조용하든 말든 소란스러운 학교에선 엄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모양으로만 배치되는 게 안 좋은 일일까 생각도 해본다.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스스로만 유일함을 알면 됐지, 굳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가 유일하다고 홍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다. 무엇보다 유일성을 증명하는 일은 여러모로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심리적 거리가 먼 이들까지 챙기려다 지친 사람들이 '나 챙기기도 바쁘다', '내 사람 챙기기도 버겁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어쩌면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익숙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인을 향한 가장 성실한 사회적 행동일 수도 있겠다.



말은 쉽게 하지만 사실 늘 이렇게 정리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기능적으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감각에 괜히 서운해지기도 한다. 나를 오래 알지도 않으면서, 너무 쉽게 나를 분류하는 시선 앞에서 설명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생각한다. 그 설명을 꼭 해야만 할 사람은 누구인가를 말이다. 모두에게 의미 있기보다 주요한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게 여러모로 나은 모습이라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어차피 인생은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보내는 시간이다.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타인들과, 조금은 특색 있는 친밀한 이들, 그리고 완전 유일한 나 자신. 평생 만나는 '똑같아 보이는 결'의 사람들 사이에 선다. 유일하게 다채로운 나를 자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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