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어느 화요일 오후였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럼 내일 방송은 어떻게 하지?’였고, 그 다음 생각은 ‘헐, 나 사이코패스인가?’였다. 혈육을 잃었다는 슬픔보다 공들여 준비한 방송 아이템이 못 나갈 거라는 걱정이 더 컸다. 스스로도 참 당황스러웠다. 일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엄마께 먼저 양해를 구했다.
“나, 내일 오전 방송까지 하고 장례식장 가도 될까?”
곧 회사에도 내 소식을 알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애도와 위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감정 이상으로 가라앉는 기분, 이라고 하면 표현이 되려나. 계속 애도와 위로가 이어지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저 그렇게 많이 슬프지 않은데요?’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하여 나는 잠자코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유야무야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 날,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침내 혼자가 된 나는 드디어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외할아버지는 한평생 농사꾼이셨다. 이 말은, 어스름하게 해가 뜨면 밭이나 논에 나갔다가, 어두운 저녁에 돌아와 주무시는 일을 매일 했다는 뜻이었다. 명절이라고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식사 시간엔 항상 외할아버지 방에 따로 작은 상이 들어갔다 나왔다. 다른 가족들이 거실에서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 작은 방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설날에도 추석에도, 만나기가 참 어려웠던 분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기억 속에선 희미한 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분의 죽음이 가까이 와 닿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다보니, 그의 마지막을 애도하러 가는 이 길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고민이 됐다. 어찌됐든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서 ‘슬픈 척’, ‘안타까운 척’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연기하는 것 자체가 망자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슬프지 않다면 슬프지 않은 대로, 외할아버의 일생과 죽음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내드릴 수 있지 않나. 나에게는 정말로, 그 ‘의미’가 절실했다.
실마리는 우연히 본 페이스북에서 찾았다. ‘슬픔이 없는 어떤 애도’라는, MBC 김민식 피디의 글이었는데,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는 만화책에 대해 쓰여있었다.
‘사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지만, 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으니, 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책 ‘기분이 없는 기분’ p.26)
그렇죠. 망자를 보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이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 글 ‘슬픔이 없는 어떤 애도’ 중> 출처 https://free2world.tistory.com/2081
살아남은 이에 대한 배려.. 그건 내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달려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됐다. 또 엄마와 그녀의 자매들을 위해 내 시간과 노동을 온전히 써야 할 명분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아버지를 잃은, 나의 엄마’를 위해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다.
“사망신고를 하기 전에, 통신비나 은행 적금 같은 걸 정리하셔야 해요.....” 상조 직원의 안내가 아니더라도 나는, 장례식 전후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는 데 새삼 놀라고 있었다. 이미 엄마와 이모들은 어제와 그제, 밤 늦게까지 손님들을 맞이한 터였다.
그 뿐인가. 새벽 6시부터 할아버지의 관을 모시고 집 터를 돌아, 화장터에 들른 참이었는데 이후엔 다 같이 밥을 먹고, 서울 근처의 장지에 유골을 모셔두는 일정이 남아있었다. 슬퍼하기도 부족할 시간일텐데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던 것이다. '이런 복잡한 일정들은 남은 자들의 슬픈 감정을 최대한 줄여주기 위한 건 아닐까? 실제로 호상이라고 불리는 장례식장에서는 일부러 화투도 치고, 술도 마시면서 왁자지껄 떠드는 게 예의니까.' 나는 겨우, 그렇게라도 이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엄마한테도 정말 그렇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엄마, 슬퍼?” 화장터에서 유골 항아리를 기다리며 엄마에게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 엄마는 답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지금은 모르지. 근데 문득 문득 생각은 나겠지.” 큰 이모가 덧붙였다. 그 말을 하는 엄마와 이모의 표정은 옅게 미소가 깔려있었다. 비로소 나는 마음의 짐을 벗고 함께 조금 웃어보일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상복을 갈아입었고, 각자 차를 타고 웃으며 헤어졌다. 저녁께 쯤 엄마로부터 카톡이 왔다. ‘외할아버지 잘 모셔드리고, 집에 잘 도착했다. 함께 해줘서 고마워. 딸’
줄곧 의연하게 장례를 치러냈던 우리 어머니는 – 이후에 몇 번 무너졌다. 그 때 나는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대충 도망가기도 했다. 가끔은 기분전환 용돈이라며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대충 때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그런 어설픈 서포트를 귀여워하며 조금씩 잘, 버텼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손자들을 위해 매번 닭 한 마리를 잡고, 주머니 깊은 곳에서 꺼낸 듯 꼬깃한 용돈을 쥐여주던 손이 있었다. 우리가 서울 집으로 돌아갈 때, 한참을 밖에 서성이던 그림자의 손이었다.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흐릿하지만 분명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흐릿함’은 그분의 애정 표현 방식이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을 잘 못해낸 것과 별개로 그분은, 수줍지만 분명하게, 사랑을 남기고 가셨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면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아린다.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어머니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