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할머니
외로움을 피하려다 죄책감을 안게 된 이야기
요즘은 혼자 집에 있을 때의 조용함이 싫다. 솔직히 무섭다고 해야하나. 부엌에서 괜히 달그락 소리가 나면 몸이 굳고, 밖에 누가 지나가는 것 같으면 문이 잘 잠겼는지 눈으로라도 한번 더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꼭 뉴스로 접하는 흉흉한 소식들을 의식한 건 아닌데, 그래도 가끔씩 침묵이 무섭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서 주로 하는 건 시끄러움을 채워넣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난 직후나 퇴근 직후에는 음악을 틀거나 라디오를 켠다. 또 밥을 먹을 때부터 자기 전까지는 유튜브를 본다. 특히 시각과 청각을 모두 활용해야 하는 유튜브는 좋은 '동거인'이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침에도 유 씨(!)와 함께 할 때가 많다. 사람이 아니고 유튜브.
하지만 사랑은 변한다고 했던가. 시끌벅적한 게임방송을 보고, 유명 연예인 성대모사하는 사람들의 영상도 보고, 남 화장하는 것을 지나, 역시 남의 집 강아지와 아이가 귀여운 것도 보다보니 - 과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졌다. 다시 나에게 맞는 컨텐츠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최근에 아주 힐링되는 채널을 만나 정착했다. 바로 Korea grandma, 박막례 할머니 채널이다.
# 박막례 할머니 때문에 웃고 울고
'편' (할머니가 팬들을 부르는 애칭)의 입장에서 막례 할머니는 그냥 존재 자체가 힐링인 사람이지만, 박막례 할머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더냐 한다면 강력 추천해주고 싶은 콘텐츠가 있다. 첫번째는 시장에서 사온 천원짜리 립스틱 리뷰. 겉에 보이는 색깔은 초록색, 주황색, 빨간색인데 발라보면 모두 분홍색이 나오는 립스틱이 소재다.(이때 박막례 할머니의 반응, '...뭐여'는 진짜 킬링포인트다.) 좋은 점은 가격이 천 원인거고, 안 좋은 점은 수없이 많아서 결국 "사지 마"로 끝나는 역대급 리뷰. 그녀의 솔직함에 영상 볼 때마다 매번 배가 찢어져라 웃는다.
영상 자체는 밝지만 왠지 눈물나는 컨텐츠도 있다. 50대 아들, 딸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영상이 대표적이다. '어렸을 때 못 갖고놀아봐서 갖고 놀 줄도 모르냐', '또 밤새서 가지고 놀겠구만' 하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왠지 애잔하다. '엄마, 나 이거말고 옷 입히고 그런 인형 가지고 싶었는데?' 장난치는 딸에게 '놀기 싫으면 마'라며 소리치지만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것도 마음이 아리다. 영상에서 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나는 그 콘텐츠를 볼 때 마다 매번 눈물이 난다.
# 우리 할머니, 영자씨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을 보고있자면 당연히 우리 할머니 생각도 난다. 우리 할머니는 일꾼도 있었던, 부잣집 큰 딸로 태어났다. 당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있는지도 몰랐을 유치원도 다녔고, 집안 어른들이 하도 업고 다녀서 땅에 발을 디딘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20대 초반까지도 할머니는 사랑만 받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들이만 나가면 동네 젊은 사람들이 전부 나와 구경을 했다. 세련된 옷을 매일 같이 바꿔입고 가니까,'오늘은 영자가 뭐 입고 나왔나 보자' 했다는 거다. 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그 시기에 우리 할머니는 정말 빛났을 거다. 그 이야기를 할 때의 할머니 눈빛처럼.
그런데 그런 그녀의 삶은 할아버지와의 결혼 이후 무채색으로 변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하고 식구 많은 집의 장남인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주 무뚝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날밤 "나는 가족들이 중요하고, 가족을 위해 살거니 그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나가라"고 했다는 할아버지. 그 뒤로 남편의 무관심 속에 대가족의 뒷치닥꺼리를 다 해야했다는 할머니의 한풀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다. 내 일생을 책으로 쓴다면 소설 한 권은 나올꺼야, 하는 말과 함께.
# 미안해 할머니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렇게 달달 외울 정도로 그런 이야기를 들어놓고도, 또 할머니가 넌지시 '내 이야기를 나중에 네가 글로 남겨줄래'라고까지 하는 걸 들어놓고도- 한번도 그 일을 한 적이 없다. 아니, 이야기를 듣는 건 고사하고 시도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에는 내가 너무 개인적인 사람인데다, 할머니댁에 놀러가는 것도 어려워할 정도로 애교없는 손녀딸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괜히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고는 있지만 (아마 할머니는 '왜 요새 얘가 부쩍 전화를 자주할까' 궁금해 할 수도 있다.) 자꾸 솟아나는 미안함은 없앨 길이 없다.
미안해, 할머니.
나는 박막례 할머니 손녀딸처럼 할머니의 인생을 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남 몰래 수 십번 써내려간 불효자의 편지를 또 하나 써서 마음 한 켠에 두고 다시 유튜브를 켠다. 뭐, 불효자의 편지를 수십, 수백통 썼다 한들 난 내일도, 모레도 박막례 할머니를 보며 혼자 울고, 웃다가 우리 할머니 생각을 하겠지. 그러다보면 왠지 문득 박막례 할머니가 내게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염병하네. 연락이나 자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