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삼킨 알약처럼 너를 넘긴다

'무해한 글쓰기' 수업 중 완성한 단편 소설

by 미지의 세계
7월 한 달 간 동네 근처 독립서점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뭔가 엄청난 스킬을 배웠던 건 아닙니다. 다만 일주일에 한 번 함께 글을 읽고, 그와 비슷한 글을 써보면서 여러 글을 완성했습니다. 글쓰기 수업 모임은 제게 마중물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글을 쓸 수있도록 생각하게 만들고, 영감을 주는. 앞으로도 경험을 잘 다듬은 글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다짐은 완벽한 법이죠. 아무튼.

아래는 글쓰기 수업 중 완성한 단편 소설 중 하나입니다. 여름에 쓰기 시작해 종종 다듬었더니, 가을의 입구에서 공개를 하는군요. 즐겁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잘못 삼킨 알약처럼 너를 넘긴다>


또, 였다. 다시 현정이 생각이 불쑥 나서 잠시 발을 멈췄다. 가벼운 미풍에 낙엽 하나가 또르르 굴러간 게 이유였다. 흔히 사춘기 즈음을 ‘구르는 낙엽에도 배꼽 잡는 나이’라고 하던가. 어린 시절 친구인 현정이, 그리고 나에게 그 표현은 비유가 아닌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5,6학년 즈음부터였으니까 대략 4년쯤 됐나. 현정이와 나,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아 30분 정도의 등굣길을 매일 같이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말 그대로 쉼 없이 웃으며 걸었다. 대단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노란색 모닝 차가 지나가면 “황금모닝!” 하며 마주보고 웃고, 우연히 같은 말을 하면 “찌찌뽕!”하며 웃었다. 뽕찌찌나, 무지개반사 따위의 레퍼토리는 말 안해도 알았다. 아마 진짜 낙엽이 구르는 모습에 웃어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때문에 학교 근처 사거리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현정이는 키가 참 컸다. 그런데 웃을 때는 허리를 너무 깊게 숙이는 바람에 훨씬 작은 나와 거의 비슷해지곤 했다. 우연히 우리를 본 한 선생님은 우리 키 차이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 적도 있다. “거꾸리와 장다리 같구나.” 하고.


“그게 무슨 말일까?” “대략 무슨 도깨비인 것 같은데? 동그랗고 작은 요괴와 키가 멀쭘히 큰 요괴가 아닐까?” 우리는 그 뜻에 대해 몇 날 며칠 동안 토론하며 또 웃었다. 그 뒤로 거꾸리와 장다리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웃음이 말랐을 때, 다시 웃음을 충전하는 주문. “너 그거 기억나냐. 그때 쌤이 우리보고 거꾸리와 장다리라고 했잖아.” 내가 말을 내뱉으면 현정이는 박장대소하는 방식으로 답했다. 지겨운 순간이 별로 없을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평소 우리가 쾌활한 성격이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현정이는 누군가가 부르면 조그맣게 ‘네’ 하고 답하는 아이였다. 당시 유행하던 일자 앞머리와 옆머리를 정리하고, 입을 가리며 눈으로만 웃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현정이가 웃는 줄도 몰랐을 정도이니까. 키에 걸맞게 현정이의 손은 무척 컸다. 반면에 현정이의 얼굴은 남들보다 훨씬 작았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을 때, 현정이의 얼굴은 거의 대부분 가려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현정이의 진짜 모습을 절대 몰랐다. 현정이가 웃을 때 입모양이 하트가 되거나, ‘으하하하’하고 웃는다는 것들을. 나만 아는 것들을.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었다. 좋아하는 가수도 같았고, 다니는 학원도 같아 아는 사람도 거의 같았다. 현정이가 성적표를 좀 더 나은 결과물로 조작할 때 가장 자연스러운 글씨체를 추천해준 건 나였다. 반대로 현정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남자아이와 덜 좋아하는 남자아이, 그리고 당시 내가 덜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아이였다. 우린 서로의 지질한 모습부터 근사한 모습까지 알아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를 믿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까 지나치게 겁내하는 나의 모습을, 무슨 일이든 잘 참아내는 현정이의 모습을 서로만이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덕분에 서로의 무지에서 나온 사사로운 무례함과 실수를 덮고 나아갈 수 있었다. 싸움이 있었을텐데도, 좋았던 기억이 더 많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완벽했던 우리가 언제부터 드문 드문 연락하게 됐는지, 그러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영영 연락하지 않게 됐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가끔이라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든 어느 겨울 날에 이르게 된다. 잘 못 삼킨 알약처럼, 두고 두고 목에 걸리는 그 날.



그 날은, 현정이의 생일 3일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 때 즈음 나는 현정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이벤트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 둘과 모두 친하고, 특히 나와 좀 더 친했던 서우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우리, ‘투명인간 놀이’를 하면 어때?”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는 내게, 서우는 말했다. “왜, 몰래카메라처럼, 현정이를 몇 일간 못 본체 하다가 생일날 짜잔, 축하해주자. 그럼 엄청 놀라지 않을까?”


그 일이 혹시나 현정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안 됐던 건 아니었다. 만약 걱정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을 테니까. 하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고 꼭 그래야겠냐고 말을 했던가. 안했던가. 그것까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찌됐든 서우의 추진력을 막기엔 너무 나약한 목소리를 가졌던 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서우의 목소리를 막는 순간 나 역시 투명인간 놀이의 대상이 될까 염려했던 것 같다. 또래 사회에서 격리될지 모른다는, 전형적인 사춘기의 고민. 또는 당시 현정이와의 사사로운 다툼이 갑자기 생각났던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우리는 함께 자란 나무가 커서 서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듯,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던 즈음이었다.


결국 우린 현정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일을 진행했다. 며칠 동안 현정이의 말을 피하고, 눈을 피했다.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결국 나 역시 웃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가장 곤욕스러운 순간은 현정이와 나의 하굣길이었다. 아무 눈치도 안 보고 박장대소 했던 우리는 서로의 눈치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걸었다. 며칠 뒤 현정이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니” 자판기를 누르듯 답변이 바로 튀어나왔다. 며칠 전부터 준비했던 답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다. “그럼... 혹시 서우가 무슨 말 안해?” 현정이가 재차 물었다. 현정이가 뭔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 어깨는 더 움츠러들었다.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땅을 걷어차며 답했던 것 같다. “글쎄”


살얼음판 같던 투명인간 놀이는, 현정이가 본인의 생일 날 우리 모두를 불러 모으면서 끝났다. 현정이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한참 창밖을 보다가 문득 말을 던졌다. “너네, 왜 그래?” 조금만 건드려도 깨질 것 같은 대화들. 마침 그날은 겨울이 처음 시작되는 시기였다. 차디찬 바람을 맞고 있는 우리. 그리고 우리를 감싼 불안과 미안함, 초조함, 긴장감. 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현정이가 우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이벤트였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순간 현정이는 원망과 안심하는 얼굴이 섞였다. “아, 뭐야~ 난 정말 깜짝 놀랐어. 정말 놀랐어.”


하지만 그 순간 가만히 있던 서우가 말했다. “난 놀이 아니였어. 나는 네가 싫어.” 순간 다시 찬 바람이 우리 사이를 휘감았다. 나는 무척 놀랐다.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서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저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현정이의 표정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다만 목소리로 유추해보건데 현정이는 다시 얼어버린 표정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왜?”

“그냥”


이유 없이 미워하고 있다는 친구의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묵인하고 용인했던 것처럼 보이는 친한 친구. 그 둘을 놓고 현정이의 발끝은 한참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휙, 돌아섰다. 내가 거기서 어떻게 해야했을까. 확실한 건 나는 그 발끝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한참, 이를 부딪히고 서있었다는 거다.


그게 그 겨울의 거의 유일한 기억이다. 그 뒤로 우리가 어떻게 화해를 했는지, 화해는 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그 뒤로는, 다시는 현정이의 박장대소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후에 현정이와 나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엇비슷한 수준의 서로 다른 대학을 갔다. 수능이 끝나고 한번 밥을 먹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서로 겉도는 대화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현정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지, 짜증나게 하는 사람은 없는지. 그런 흔한 대화가 얼마나 하기 어려운 거였는지 그런 기억만 좀 있다. 이쯤 되면 내가 대학생이 되어 현정이와 한 번 더 만난 게 맞는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아무 말이 없던 그 겨울의 현정이. 잠깐 미세하게 떨리던 발 끝과 휙 돌아 나가던 그 모습. 그 날 이후로 나는 현정이 앞에서 고개를 든 적이 없고, 그렇게 계속 현정이의 발 끝만을 보고 있다.



현정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나더라도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를 잃고 난 뒤에 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좀 더 아끼게 됐다고. 그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우기도 한다고. 늦었지만.


길을 걷다가도, 교복 입은 학생들만 봐도, 하늘이나 나무만 봐도 네가 생각난다고.


나는 괜히 침을 꿀떡 삼키고,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낙엽을 바삭 밟는다. 오늘은 이대로 끝이지만 또, 문득 현정이가 목에 턱 걸리는 날이면 나는 다시 그 겨울로 돌아갈 것임을 안다. 현정이, 네 발끝만 보고 있던 그 추운 어느 날로.


결국 미안하다, 로 끝나는 독백을 다시 되뇌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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