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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꼴유랑단 Oct 11. 2017

실패, 가성비 그리고 YOLO

"대나무 상자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이천십칠년 시월 십일 화요일


25바트 짜리 대나무 상자가 날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나무 상자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한참 동안 피곤했다. 가격 때문이냐고? 그럴 리가. 25바트면 한국 돈으로 850원, 태국 편의점 음료수 가격이 그 정도 한다. 아니면 대나무 상자에 구멍이 뚫렸거나 제법 큰 하자가 있어서 그런 거냐고? 아쉽게도 태국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대부분 퀄리티가 훌륭한 편이라 그런 일은 거의 없다. 그럼 도대체 왜 피곤해진 걸까?


처음엔 대나무 상자 여러 개를 사서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담으려고 했다. 하지만, 상자 하나를 사서 직접 재보니 쿠키 한두 개 넣으면 꽉 차버리는 협소함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한 것. 결국, 25바트짜리 대나무 상자는 딱히 쓸 데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그 '무용지물'이 나를 고민의 늪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나를 흔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필요 없는 거 왜 샀냐?"


나는 소비가 즐겁지 않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옷을 사거나 가방, 신발을 살 때 흔히 느낀다는 즐거움도 솔직히 잘 모른다. 이십 대 중후반까지도 엄마가 사주는 옷과 신발에 나의 패션을 의존했을 만큼 쇼핑에 딱히 흥미가 없었다. 지금도 내 옷을 산다고 하면 그저 생각만으로도 심신이 피곤해진다. 넉넉지 않은 경제적 여건 속에서 살아온 탓에 소비도 '선택과 집중'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얼핏 짐작할 뿐이다. 해외여행 중에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예리하고 단호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수입 없이 주야장천 소비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주 적은 돈 하나에도 예민해지는 건 당연하고, 만에 하나 손해 보는 소비를 했다거나 사기라도 당하는 날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찾아온다. 


돌아보면,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나의 소비 패턴은 늘 한결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나무 상자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너무나 당연했고, 난 그것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다.


편의점 프로모션은 태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편의점에 가면 최소 5분 이상을 고민하는 편이다. '가성비' 때문이다. 원래 내가 사려고 했던 제품과 1+1, 2+1 등등 수많은 프로모션 제품들을 비교하고 또 비교한다.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고 내가 사려고 했던 제품도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런데도 나는 그 조건 안에서 완벽한 가성비를 이루어 내기 위해 고민한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알고 보니 나는 실패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실 잘 몰랐다. 추운 겨울을 뚫고 촛불 시민이 일구어낸 승리를 바라보며 '실패에 익숙한 세대'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걸 개인화시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실패에 익숙한 세대에 태어났지만 적어도 나는 실패한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군대에서마저 원하는 보직 지원에서 탈락하고, 졸업 후 취업 시장에서는 적게는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실패하는 우리 세대 아니던가. 실패의 경험으로만 따지면 그 어느 세대보다 실패를 잘 이겨내고 승승장구할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실패의 횟수'와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대학교수의 말이 아닌, '아프면 환자'라는 연예인의 말이 더 깊이 와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패해도 괜찮고 싶었다. 성공과 실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불가피한 선택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억지로 정신 승리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 승리할 필요조차도 없을 만큼 아무렇지 않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탐닉하기 시작한 이유 역시 실패해도 괜찮은 내가 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실패가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은 나는 오늘도 편의점 프로모션 제품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물건을 살 수 있는 재래시장이 좋다


YOLO, 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인생 어찌어찌 잘살아 보자는, 꽤 매력적인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이 말 속에도 '가성비', '선택과 집중'이라는 개념이 잔뜩 포함된 것 같다. 인생이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살 수 있는 거라면? 편의점에서 5분이나 고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충분한 돈이 있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두려움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두려움은 때때로 나를 비겁하게 만들기 때문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우리 커플의 여행을 보며 YOLO를 이야기한다. 한 번뿐인 인생 멋지게 사는 것 같아서 참 부럽다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걸 보니 참 좋다고 말이다. 페이스북 페이지나 인스타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 랜선을 타고 펼쳐지는 우리의 여행은 '멋진 여행지', '맛있는 음식', '스펙타클한 사건'이 전부니까 부정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진정한 YOLO를 논하려면 '한 번뿐인 인생, ㅇㅇㅇ할 거야!' 같은 뒷말이 더 중요한 법인데, 요즘 유행하는 YOLO는 '한 번뿐인 인생'을 얼마나 '극단적으로 내던지는지' 표현하는 '과감함'이 더 중요해 보인다. 여행 인플루언서라 불리는 일부 세계여행자들이 'ㅇㅇ 트래킹 완주, ㅇㅇ대륙 종주, ㅇㅇㅇ킬로 히치하이킹' 등의 자극적인 경력들을 스펙삼아 내세우는 이유 역시 YOLO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YOLO 뒤에 이어질 말을 이야기하기에는 여행이 복잡해지고 깊어지고 힘들어지니까. YOLO라는 단어와 '복잡', '깊이', '힘듦'이라는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커플도 여행 중 벌어진 자극적인 사건, 비현실적인 여행지들의 풍경들만 모아서 책으로 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여행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인생의 '가성비'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여행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여행 자체가 뭔가 YOLO스럽기는 한데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전제'는 같지만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해외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자신에게 물어본다. 한 번뿐인 인생, 너는 어떻게 살고 싶냐고. 25바트 주고 대나무 상자를 사지 않았더라면, 너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두 질문은 엄연히 다른 질문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같은 질문으로 읽힌다.


850원짜리 대나무 상자를 앞에 두고 'YOLO'니 '실패'니 '가성비'니 생각하는 내가 참 우습지만, 이 또한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니 문득 행복해졌다. 여행 중에 마주하는 고민은, 다시 돌아갈 곳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며 익숙한 곳에서 떠나야만 드는 고민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떠나오길 참 잘했다 싶다.


그리고, '함께' 떠나오길 참 잘했다 싶다. 대나무 상자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나중에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말해주는 J179가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대나무 상자는 25바트 현금으로 눈앞에 놓여있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내 인생 최고의 조언자다.


멋지긴 한데, 생각대로 될 확률 쫌만 더 올려주세요


결국 대나무 상자는 환불이나 교환하지 않고 잘 간직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 이 대나무 상자를 볼 때마다 질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사는 거(To Buy) 한 번쯤은 실패해도 되잖아?"

  "사는 거(To Live) 한 번쯤은 실패해도 되잖아?"


실패가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실패 옆으로 난 길을 찾아 걸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나를 위한 실패를 넘어, 세상과 이웃을 위해 실패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아직은 멀어 보이지만 

유턴하지 않고 꾸준히 그 길을 걷는 사람이고 싶다.



by S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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