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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별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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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꼴유랑단 Nov 30. 2017

드디어 왔다, 그 날!

여행 중 생리, 다들 어떻게 하셨어요?


이천십칠년 시월 이십일일 토요일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 아침을 맞는다. 날씨도 상쾌하고 기분 좋은 월요일. 즐겁게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두근두근 설레기까지 하다. 간단한 샐러드로 아침을 먹으며 짝꿍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앗! 느낌이 좋지 않다. 설마 하는 마음에 호다닥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뜨악, 안 돼! 이럴 순 없어! 넌 오늘 오는 날이 아니잖아! 이렇게 나는 여행 중 다섯 번째 생리를 맞았다.


포토샵으로도 가릴 수 없는 생리 첫날, 초췌함의 끝


모든 여자의 숙명.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생리는 5년 10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친구다.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생리를 사람에 빗대 만든 짧은 영상이 있는데,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내용이다. 불쑥 나타나 일상을 마구 휘저어 놓고는 다음 달에 또 올게! 하며 사라지는 얌체 같은 녀석.



https://youtu.be/0-HeBX-XtZI


많은 여성 장기여행자가 여행 중 생리를 어떻게 맞는지 궁금하다. 탐폰을 사용해 불편을 최소화하는 분들이 있다는데, 부작용과 더불어 질 속에 무언가를 넣는게 영 탐탁치 않아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생리컵도 무척 편리하다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너무 아파 포기하고 말았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생리가 찾아왔다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여행자도 있었는데(부럽다ㅠ), 어찌 됐든 대부분은 약간 귀찮고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까. 일 년에 열두 번, 언제 올지 모르는 생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는 사람은 알거다. 그것도 여행 중 낯선 나라에서.

나는 변비, 가슴 통증, 예민함과 폭식 등등 PMS가 매우 심하고 그때그때 증상이 다르다. 주기는 길고 불규칙하며 매번 생리통으로 고생한다. 약을 먹으면 두통이 생기거나 양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겨 쉽게 먹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반차를 쓰고 조기 퇴근하거나 퇴근 후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누워있고, 주말이면 온종일 누워 통증과 씨름한다. 그랬기에 남자친구인 S593과의 장기여행이 조금 걱정됐다. 너무 고생시키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S593이 나를 위해 처음으로 생리대 구입에 도전했다


첫 생리는 인도에서 찾아왔다. 여행의 설렘으로 생리대도 준비하지 않은 나는(하하하..) 현지 생리대와 팬티 라이너를 구매했다. 어떤 블로거가 인도 생리대에서 구더기를 발견했다는 글을 봤던 터라 살짝 망설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다행히 조금의 불편함 없이 아주 잘 사용했다).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물 찜질팩은 다행히 약국에서 구할 수 있었다. 고무 냄새가 한가득 나는 새빨간 이 녀석은 고맙게도 여행 내내 내 아랫배를 따뜻하게 해주며 제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인도 다질링에서는 생리와 장꼬임이 같이 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정신이 혼미했고 쓰러질 것만 같은 어지러움을 이겨내야 했다. 너무 아파 배를 움켜잡으며 울었고 대굴대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밥 먹을 힘도 없어 죽을상을 하고 식탁 앞에 앉아있었고, 먹고 싶지 않았지만 매일 아침 우리에게 정성이 담긴 음식을 제공해주신 주인아주머니를 생각해 한 숟갈씩 입에 넣었다.

인도 레에서의 PMS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심각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과 평온한 일상이 계속됐지만 늦어지는 주기와 무거워지는 아랫배로 스트레스와 예민함이 절정에 다다랐다. 별일 아닌데도 어린아이처럼 짜증이 났고, 그런 내 모습에 S593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나조차도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자괴감과 속상함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태국 빠이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통증이 적었고 PMS로 그를 괴롭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꾸준한 요가로 땀 흘리며 운동한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으리라. 게다가 태국 생리대를 사용한 게 이전보다 생리통을 줄여준 것 같다(어디까지나 기분 탓이지만, 한국 생리대보다는 나은 듯. 한국에 가자마자 면 생리대를 주문하리라!). 아무튼, 무사히 생리를 맞이한 덕분에 삼시세끼를 챙겨 먹고 책까지 읽는 여유를 누렸다. 멀쩡해 보이는 내 모습에 S593도 놀랐고 나 또한 “생리 첫날 이렇게 잘 챙겨 먹고 쌩쌩한 건 처음이에요!” 하며 감격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너무 기분이 좋았는지 평소에 잘 먹지 않는 과자며 밀가루 음식을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그 결과, 치앙마이에서 만난 네 번째 생리는 나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줬다. 따뜻한 물 찜질팩을 배 위에 올려놓고 끙끙 앓으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거의 혼절 수준이었다. 잠깐 깨어나면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아픈지, 그동안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고 몸을 아프게 한 자신을 원망했다.

마지막 생리는 일주일 일찍,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항상 이렇다. 컨디션에 따라 빨리 왔다 늦게 왔다, 아팠다가 참을만했다가.



이토록 변덕스러운 생리를 받아들이는 내 몸뚱이는 무척 예민하다. 그 덕에 남들이 편하게 먹는 음식이나 가벼운 생활습관들이 나에게는 큰 적이다. 다리를 꼬지 않고 항상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허리와 고관절 통증이 없다. 밀가루 음식은 나에게 변비를 데려오기 때문에 거의 먹지 않고, 소화기관은 매우 게으른 탓에 꼭꼭 천천히 씹어 먹어야 한다. 야식은 절대 금물이고, 하루 한 번 유산균 섭취는 필수나 다름없다.

이렇게 예민한 내가 긴긴 여행을 떠나와 이토록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옆에 든든한 동행이 있기 때문이다. 변덕스럽고 힘든 시간임에도 옆에서 묵묵히 챙겨준 S593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끙끙 앓으며 침대 위를 뒹굴 때마다 잘 버티고 있다며 응원해주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밥이 입으로 안 들어갈 때는 맛있는 호박죽을 끓여 조금이라도 먹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마냥 좋은 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PMS로 예민함이 극에 달했을 때는 심하게 다투기도 했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 그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최대한 배려하고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했다. 본인은 알 수 없는 고통임에도 공감해주고 이해해 준 그가 있어 여행 중 생리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내 여행 이야기는 항상 기승전짝꿍인 것 같다, 오홍홍홍


물론 S593이 처음부터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남자인 그에게 PMS와 생리는 미지의 영역이자 공감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그럼에도 S593은 나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찜질팩에 뜨거운 물을 담아 배 위에 얹고,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사고, 오늘 컨디션은 어떠냐며 물어보는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일. 게다가 우리는 생리예정일에 따라 여행 스케줄을 조정하며 움직였다. 생리가 찾아오면 2-3일은 안정적으로 쉬어야 했기 때문에 무리한 이동을 피했다. 아이고, 어쩜 이리 귀찮고 신경 쓸 일이 많은지! 초반에 걱정했던 대로 약간 고생시킨 감이 없지 않지만, 여러 방면에서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돈독함이 생겼다고나 할까? ‘얼마나 아플까?’ 걱정하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준 S593처럼 많은 남성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짝꿍을 더욱더 아끼고 사랑하길 바란다.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생리와의 여행은 무사히 끝났다. 단기여행을 가는 분들은 피임약으로 시기를 조절하던데, 장기여행 중엔 그런 방법이 쉽지 않기에 여행 중 겪은 생리와의 동침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또한, 짝꿍과의 환상적인 호흡이 아프고 힘든 시기를 버티는 큰 힘이 되었음도 자랑!하고(오홍홍홍). 분명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생리와 만나는 그녀들도 많으리라.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힘들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여성에게 경의를 표한다. 또한, 공감할 순 없지만 이해하려 노력하는 수많은 남성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혹시 아직 생리의 고통과 불편함을 잘 모르신다면 아래 영상 참고!

https://youtu.be/dhWrnYIv6Yc


by J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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