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이천십팔년 일월 십이일 금요일
2017년 11월 1일, 164일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73일이 흐른 오늘, 일상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는 원대한 꿈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먹고 사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속으로 체념하듯 말했다.
'그래, 여행은 끝났어.'
낯선 숙소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는 배고플 때 끼니를 챙겨 먹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던 시간은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분명히 끝났다. 더는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지친 몸을 누이기 위해 숙박비를 낼 필요도 없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아 헤맬 일 역시 없다.
유명한 여행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나도 그들처럼 멋진 여행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그때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나도 곧 멋진 여행을 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짐작할 뿐이다.
그래. 그때의 나는 분명히 행복했다. 책 속의 그들이 그랬듯이 나도 멋진 사람들과 함께, 멋진 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낼 테니까. 그러려고 이 먼 곳까지 여행을 온 거니까.
충분히 멋졌고 더 멋질 수 있었던 여행은 어느새 끝이 났다. 마침내 끝났다고 생각하니 문득 우울해졌다. 지겨운 일상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 이곳은 내게 너무도 익숙하니까. 긴 휴가를 끝내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 직장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늘 그렇듯이 우울함은 금세 억울함으로 바뀐다. 왜 나는 여행이 끝날 때마다 이리도 힘든 걸까. 대체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좀 알아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여행이, 나를 데려다줄 비행기가, 낯선 그곳에서 반겨줄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를 180도 바꿔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행이라는 시스템 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줄 알았다. 라식 수술한 것처럼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가 짠!하고 생길 줄 알았다. 다시 돌아갈 일상 속에서 날마다 여행자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살 줄 알았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 마냥 허황된 희망을 좇고 있었다.
그 어느 여행보다 특별한 여행이어서 더 그랬다. 사건 사고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고, 멋진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서 더욱 특별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내 삶을 바꾸지 못했다. 그들은 나에게 황홀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지만, 그건 다시 돌아갈 일상과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 술자리에서 꺼낼 만한 무용담 정도랄까.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는 73일을 지나 서서히 잊히는 중이다.
아니, 잠깐. 가만 보자. 그런데 대체 여행이 뭐라고 내 삶을 흔들고 뒤바꾸도록 내버려 둔 걸까. 여행보다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대체 왜 그리도 무모하고 불공정한 거래를 허락한 걸까.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기대가 아니었을까. 여행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면 결국 여행도 삶도 돈 많고 시간 많은 이들이 더 잘할 수밖에 없는, 온라인 게임과 다름없는 건데. 내가 떠났던 수많은 여행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여행은 나를 바꿀 수 없고, 여행을 떠난다 한들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인생이라는 한 문장 속에서 여행은 어떤 역할일까. 숱한 여행을 지나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여행은 인생의 수식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여행이 내 인생의 동사이자 목적어였고, 심지어는 주어였던 지난 시절이 지금은 되려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여행을 위해 산다. 열심히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땅을 밟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이도 있다. 삶 전체를 여행이라 여기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사람도 있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을 수단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다들 각자의 해답을 찾기 위해 떠나고 떠나 오기를 반복한다.
J179와 내가 이번 여행을 '여행'이 아닌 '유랑'이라 부르기로 한 건, 인생에서 여행이 주는 의미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행은 '유랑'과 '정착' 사이 어디쯤 있는 어중간한 상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무르는 것과 떠도는 것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연습이랄까.
정착을 바라는 본능을 거슬러
광야에서의 유랑을 위한 연습으로써의 여행
인제야 비로소 여행의 끝을 인정할 수 있었다. 여행은 분명히 끝났다. 여행은 아무 때나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언제든지 끝낼 수 있으니까, 여행은 과정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늘 머무르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로 산다. 영원히 머무는 것도 없고 영원히 떠나는 것도 없듯이, 나는 떠나오는 동시에 떠나가고 머무는 동시에 떠나는 준비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유랑하며 사는 게 남은 인생 작은 꿈이 되었다.
'그래, 여행은 끝났어.'
"하지만, 유랑은 끝나지 않았어."
by S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