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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별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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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꼴유랑단 Jan 13. 2018

여행이 끝나고 난 뒤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이천십팔년 일월 십이일 금요일


2017년 11월 1일, 164일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73일이 흐른 오늘, 일상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는 원대한 꿈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먹고 사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속으로 체념하듯 말했다.


'그래, 여행은 끝났어.'


낯선 숙소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는 배고플 때 끼니를 챙겨 먹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던 시간은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분명히 끝났다. 더는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지친 몸을 누이기 위해 숙박비를 낼 필요도 없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아 헤맬 일 역시 없다.


유명한 여행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나도 그들처럼 멋진 여행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그때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나도 곧 멋진 여행을 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짐작할 뿐이다.

그래. 그때의 나는 분명히 행복했다. 책 속의 그들이 그랬듯이 나도 멋진 사람들과 함께, 멋진 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낼 테니까. 그러려고 이 먼 곳까지 여행을 온 거니까.


충분히 멋졌고 더 멋질 수 있었던 여행은 어느새 끝이 났다. 마침내 끝났다고 생각하니 문득 우울해졌다. 지겨운 일상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 이곳은 내게 너무도 익숙하니까. 긴 휴가를 끝내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 직장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늘 그렇듯이 우울함은 금세 억울함으로 바뀐다. 왜 나는 여행이 끝날 때마다 이리도 힘든 걸까. 대체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좀 알아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4년만에 다시 만난 다질링 옥수수아지매


그랬다. 나는 여행이, 나를 데려다줄 비행기가, 낯선 그곳에서 반겨줄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를 180도 바꿔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행이라는 시스템 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줄 알았다. 라식 수술한 것처럼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가 짠!하고 생길 줄 알았다. 다시 돌아갈 일상 속에서 날마다 여행자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살 줄 알았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 마냥 허황된 희망을 좇고 있었다.


그 어느 여행보다 특별한 여행이어서 더 그랬다. 사건 사고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고, 멋진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서 더욱 특별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내 삶을 바꾸지 못했다. 그들은 나에게 황홀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지만, 그건 다시 돌아갈 일상과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 술자리에서 꺼낼 만한 무용담 정도랄까.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는 73일을 지나 서서히 잊히는 중이다.


어디를 여행하든 그곳에는 일상을 사는 이들이 있다


아니, 잠깐. 가만 보자. 그런데 대체 여행이 뭐라고 내 삶을 흔들고 뒤바꾸도록 내버려 둔 걸까. 여행보다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대체 왜 그리도 무모하고 불공정한 거래를 허락한 걸까.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기대가 아니었을까. 여행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면 결국 여행도 삶도 돈 많고 시간 많은 이들이 더 잘할 수밖에 없는, 온라인 게임과 다름없는 건데. 내가 떠났던 수많은 여행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여행은 나를 바꿀 수 없고, 여행을 떠난다 한들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누군가에겐 특별하지만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인생이라는 한 문장 속에서 여행은 어떤 역할일까. 숱한 여행을 지나 어렴풋이 알게 된 건, 여행은 인생의 수식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여행이 내 인생의 동사이자 목적어였고, 심지어는 주어였던 지난 시절이 지금은 되려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여행을 위해 산다. 열심히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땅을 밟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이도 있다. 삶 전체를 여행이라 여기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사람도 있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을 수단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다들 각자의 해답을 찾기 위해 떠나고 떠나 오기를 반복한다.



J179와 내가 이번 여행을 '여행'이 아닌 '유랑'이라 부르기로 한 건, 인생에서 여행이 주는 의미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행은 '유랑'과 '정착' 사이 어디쯤 있는 어중간한 상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무르는 것과 떠도는 것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연습이랄까. 


정착을 바라는 본능을 거슬러
광야에서의 유랑을 위한 연습으로써의 여행

인제야 비로소 여행의 끝을 인정할 수 있었다. 여행은 분명히 끝났다. 여행은 아무 때나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언제든지 끝낼 수 있으니까, 여행은 과정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늘 머무르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로 산다. 영원히 머무는 것도 없고 영원히 떠나는 것도 없듯이, 나는 떠나오는 동시에 떠나가고 머무는 동시에 떠나는 준비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유랑하며 사는 게 남은 인생 작은 꿈이 되었다.



'그래, 여행은 끝났어.'


"하지만, 유랑은 끝나지 않았어."



by S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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