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기분 좋은 거리감이 필요해!"
이천십팔년 팔월 일일 수요일
우리는 혼자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여행도 가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야무지게 보내는 커플이다. 각자의 색깔과 속도에 맞게 시간을 보내는 건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커플이라고 굳이 모든 일을 '함께' 할 필요는 없으니까.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어야 함께 했을 때 그 에너지는 배가 된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은 쉬운데 사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보고 싶은 데 바쁘다며 연락 한 번 제대로 안 해주면 ‘너만 바쁘냐!’ 하며 시비를 걸게 된다. 바쁘고 싶어서 바쁜 것도 아닌데 ‘왜 그 정도도 이해해 주지 못하지?’ 하면 결국 갈등이 생기고 만다. 하지만 '많이 바쁘구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 '연락 기다렸지, 미안. 저녁에 잠깐 만날까?' 하며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다툴일이 거의 없고 꽁냥꽁냥 사이좋게 지내는 노련함? 이 생긴다. 우리처럼 :)
S593과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며 충전하는 스타일, MBTI로 따지면 E(외향형)보다는 I(내향형)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여러 명을 두루 만나는 것보다 한 두 사람을 깊게 만나는 걸 선호한다. 그렇게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면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다음에 쓸 에너지를 저장해야 한다. 그렇게 솔로 타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인데, 정작 이번 여행 중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다.
여행 지역 중 절반은 S593이 이미 다녀온 적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무의식적으로 S593에게 의지하게 됐다. '와봤던 곳이니 잘 이끌어 주겠지? 오빠만 믿으면 되니 걱정이 없네!' 하며 여행의 주도권을 넘기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선택의 결정권을 S593에게 맡긴 채 졸졸 따라다녔다. 게다가 모든 일을 '함께' 하려 욕심을 부렸다. 같은 공간 안에 있다 보니 무엇이든 둘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S593은 여행의 여정을 함께 선택하고 결정하기 원했다. 누군가 주도권을 쥐고 이끄는 여행이 아니라, 같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가는 여행이길 바랐다. 나 또한 당연히 그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가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생각과는 반대로 흐르고 말았다. 이걸 시작으로 우리는 하나씩 나와 다른 상대의 모습을 마주하게 됐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괜찮겠지, 했지만 그 사이 오해가 쌓여 갈등이 생겼다. 작은 일에도 서로에게 짜증을 냈고, 내 생각과 다른 상대방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결론은 하나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여행을 하다 보면 사소한 오해나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부부도 아닌 커플끼리 24시간을 내내 붙어있다 보니,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고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기도 한다. 몰랐던 상대방의 습관이 눈에 들어오고 그게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기에 혼자만의 시간만 한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였지만, 여행의 바쁜 일정에 치여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그리 바쁘지도 않았다. 그저 '현재' 각자의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지 못했고, '내일' 우리를 생각하기에 급급했을 뿐. 결국 여행 중반에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지친 S593이 숙소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집 밖으로 나왔다. 스쿠터를 타고 도로를 달렸고, 카페에 가서 친구와 통화하며 펑펑 울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었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재미난 영상만 찾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지금까지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하나씩 되새겨 봤다. S593은 내가 독립적이고 당찬 여성인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 꿈만 크고 현실은 찌질한, 완료가 아닌 진행형인 사람일 뿐이었다. 내 안에 의존적이고 연약한 부분이 S593에게 노출됐고, 그것이 이번 여행에 독이 됐다며 자책했다. 상대방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 혼자 꾹꾹 눌러 담았고 그렇게 마음에 병이 생겼다.
6개월의 여행 동안, 솔로 타임의 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일은 수시로 발생했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스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말처럼 쉽진 않았다. 가끔은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했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아는 만큼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의 파도를 타다 보니, 상대방과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몇 번을 펑펑 울고 나니 깨달았다. 우리는 '함께'이기 전에 '각자' 로서 행복해야 한다는, 뻔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영역을 존중해야 하고, 그 선을 함부로 넘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고, 충분한 대화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쉽진 않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니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연인은 아주 가까운 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 소유하려 들거나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관계를 끌고 나가서는 안된다. 아무리 오랜 시간 함께 했다 하더라도,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생각도 마음도 완벽하게 같을 수 없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물론 그것도 상식선에서 가능한 이야기지만). 칼릴 지브란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그 말에 백 프로 동의하는 바다. 우리에겐 기분 좋은 거리감이 필요하다. 그 거리만큼 서로를 바라보고 그리워하면 상대방이 소중해지고 애틋함이 생긴다. 내가 나다워질 때 가장 아름답듯이, 상대방이 진정 빛나고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끼리도 다른 점 투성이인데, 연인이라고 오죽하겠는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 상대방의 모습을 바꾸거나 고치려 하지 말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구나, 하고 새로운 발견에 집중하자.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때,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짐을 잊지 말자. 다정하고 따뜻하고 끈끈하고 오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혼자서도 잘하자! 모든 커플이 공감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여행했고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 이게 우리 커플이 깨가 쏟아지는 연애 비결이다. 오홍홍홍
by J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