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게인 출연자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떠오른 한 단어, '디딤돌'
오랫만에 브랜드가 아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코로나로 몸도 마음도 무겁게 잠겨가던 2020년 가을, 우연히 귀에 걸리는 슬로건을 듣게 됩니다. "나를 다시 부르다" 라구요. 프로그램의 제목은 싱어게인, 부제는 '무명가수전' 이었습니다.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나를 '부른다' 라는 것이 노래 부르다(sing)의 의미와 불러내다 (call)의 중의적인 의미로 다가왔으니까요. 매회 싱어게인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크게 흥미로울 글은 아니겠군요. 그래도 남기고 싶은 생각이라 남겨봅니다.
프로그램 초반에는 과거 너무도 유명했던 가수들이 '무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33호' 등의 숫자로 불린다는 컨셉의 새로움, 혹은 도발적인 기획에 끌렸습니다. 무명이 아닌데 무명이라고? 가수들에게 가장 큰 자존심인 '이름'까지 빼앗고 숫자로 불리게 하다니. 그러면서도 그 유명(famous)했던 사람들이 무명(unnamed)의 무대에 나오도록 했다면, 그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를 해당 PD가 굉장히 진정성있게 가수들에게 설득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이상한 프로그램입니다. 분명 경쟁이 있고, 붙고 떨어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보는 내내 힐링이 됩니다. 저의 지인 중 한 분은 싱어게인에서 '인생을 배운다'고 합니다. 응? 경연 프로그램에서 인생을 배운다구? 그게 무슨 의미일까. 곰곰히 되짚어 보게 되더군요. 페이스북의 많은 분들이 올려주신 경연자들의 매회 퍼포먼스, 좋았던 점들을 다시 나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30호가 '틀에 갇히지 않는 가수다', 더벅 펌 헤어 시골 소년 같았던 63호가 알고보니 서울예대 '천재 뮤지션'이었다 등 가수 개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가수 중 한 명은 47호 가수, 요아리씨였습니다. 첫 무대에서 현빈, 하지원 주연의 '시크릿가든'의 OST '나타나'를 불안불안하게 부르는 그녀를 보며, "아, 듣기 불편하다. 그만했으면" 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무대 공포증을 앓아왔다고 합니다. 심사위원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1라운드에서 47호는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음색은 독특하다" 라는 기회를 본 주니어 심사위원들의 의견으로 2라운드에 올라갑니다. 2라운드의 컨셉은 '협업 무대'. 그녀는 그 누구도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포용력을 가진 55호 가수 (스카이캐슬 OST, "위올라이"를 부른 가수, 하진)와 콜라보 무대에 오릅니다. 준비하는 내내 55호는 47호에게 말합니다. "할 수 있어. 너이기에 나는 아무 걱정 없어." 라고. 무대에 서서 떨리는 눈빛을 보내는 47호에게 55호는 또 말해줍니다. "마음껏 해."라고. 2라운드 무대의 47호는 1라운드의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이문세님의 '어떤 하루'를 몽환적이면서도 본인의 색깔에 맞게 편곡해 콜라보 무대를 선보인 47호와 55호의 무대를 본 심사위원들은 "북유럽의 오로라를 보는 것 같다", "무대가 사라지고 밤하늘이 보인다", "음악을 전시로 표현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라는 극찬을 남깁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그녀 스스로만의 노력이었을까. 그녀 안에 잠재된 능력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음색이라는 보석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준 것은 55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5호와의 콜라보 무대 이후 47호는 '자신을 믿고' 무대를 펼쳐갑니다.
그렇다면 55호가 47호에게 해준 것은 무엇일까. 음악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스스로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확신을 주었다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55호는 음색이 독특한 47호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해 줍니다. "위올하이"로 함께 참여한 두 사람의 무대를 떡국에 비유하자면, 47호는 "색을 뽐내는 고명" 역할을, 55호는 "깊은 맛의 국물" 역할을 했다고 해야할까요. 55호 역시 본인 나름의 색깔이 있는 가수입니다만 47호와의 무대에서는 본인이 해야 할 디딤돌 역할을 명확히 알고 기꺼이 국물이 되어줍니다. 55호와 '신뢰의 교감',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 47호는 거침없이 자신의 본래 음악 세계를 펼쳐가며 Top 6에 안착하기에 이릅니다.
또 한 명의 참가자도 눈에 띕니다. 수많은 오디션에서 '잘한다'라는 평가를 받아온 23호 최예근은 솔로 무대에서는 "더 잘하고, 더 끼있게, 더 편곡도 멋지게"라는 방향으로 노래를 불렀다면, 남성 듀오 32호 친구들과 함께 부른 "그대에게 (원곡, 넥스트)" 콜라보 무대에서는 "내가 하는 음악의 길이란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던져 심사위원 민호와 규현을 울립니다. 그녀의 기지와 편곡 능력이 빛을 발한 무대이지만 32호 친구들과의 협업을 통해 자신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노래를 불렀기에 이전 무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동과 눈물이 나올 수 있었던 무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에게 32호 듀오는 또다른 '디딤돌'이 되어 준 것이지요. 그렇게 최예근 가수는 Top10에 안착했습니다.
살면서 나는 디딤돌인가, 아니면 그 돌을 딛고 올라가는 사람인가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디딤돌일수도, 혹은 언제나 디딤돌을 딛고 오르는 사람일 수도 없겠지요. 나는 누군가에게 디딤돌이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디딤돌을 딛고 오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그리고 고마운 디딤돌들을 마주치고, 그들을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불현듯, 대다수의 친구들에게 '선배님', 또는 '언니'로 불리게 된 지금의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좋은 디딤돌이 되자고.
55호 가수 하진님은 아름다운 디딤돌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