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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Jun 21. 2024

아이의 음성(音聲)

새벽#47일차 이사야 46:1-13

(이사야 46:1-13)
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7.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8.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12.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 신적인 존재에게 간절히 빌며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비는 행위는 비단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우리 조상들의 토속신앙에서도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비나이다. 비나이다."라고 하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다.


기도하고 비는 행위는 연약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다 초월적인 존재에게 그것의 성취를 부탁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초월적인 존재의 입장에서 과연 인간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하면 측은지심에 도와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일이 바쁘고 갈 길이 멀다면, 충분히 외면할 수도 있다. 물론 요청하는 긴박한 사유나 상황에 따라 경중(輕重)을 따져가며 판단해야겠지만, 모든 요청에 100% 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일면식이 있는 사람의 부름이라면 조금더 적극적으로 다가갈지 모르겠다.


좀 더 극단적으로, 길을 가다가 어떤 개미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하면 어떨까? 일단 나는 그 개미가 보내는 시그널을 알아차리기도 힘들 것이다. 근데 수천마리의 개미가 모여서 나에게 어떤 식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면 눈에 들어올 수는 있겠으나, 그런 식의 의사소통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차저차하여 알아챘다고 하여도 내가 그 개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아마도 없다.


Give&Take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만큼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 주는 만큼 받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내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써가며 어떤 일을 해주는 것은 최소한 납득이라도 되어야 한다. 물론 봉사활동이나 자선활동 같은 부류가 있지만 이것 역시 물질적인 가치의 교환이 없을 뿐, 그 목적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개미의 간절한 몸짓에 가던 길을 멈추고 팔을 걷어붙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세상에 Give&Take 가 균형있게 성립하지 않는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부모는 받은 만큼 자식에게 주는 사람이 아니다. 자식에게 하나도 받지 않았음에도 오직 사랑과 헌신으로 아기를 돌보고 먹이고 키워낸다. 물론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며 보답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전제로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는 없다.


오늘 말씀 속에 바로 그 정답이 있다. 온갖 우상들은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거니와 살아있다고 해도 우리를 구원할 능력도 없고, 능력이 있다고 해도 명분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이자 우리를 구원할 이유는 바로 그가 우리를 '지으신 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었은 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내가 힘겨워 할 땐 모른체 할 수 없고 내가 기도할 땐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내 부모이고 나를 지으신 이다. 내 자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와 아내가 어떻게 해왔는지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하고 계실지가 너무나 선명하다. 저녁식탁에서 내 아이의 음성과 표정의 미묘한 변화조차 나의 마음을 요동하게 한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나는 늘 아이의 음성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아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도와주며, 아이가 울면 달려간다.


나의 하나님도 바로 나에게 이런 분이실 것이기에, 나의 음성을 듣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매일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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