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몰스킨
나의 첫 몰스킨은 2015년 스타벅스 겨울 증정품이다.
이전에는 비싸서 못 샀다.
비싼 펜은 이해가 갔는데, 비싼 노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노트에 글을 쓰며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메인 노트로 몰스킨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몰스킨은 잉크가 잘 번지고, 뒷면의 비침도 심하다.
질적으로 최상급의 제품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디자인과 품질의 변화가 없는 몰스킨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일까?
시중의 문구 소개 도서에는 몰스킨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는 그중 다카바타케 마사유키의 궁극의 문구 속 리뷰를 가장 좋아한다.
그에 의하면 몰스킨은 노트보단 ‘도서’에 가깝다.
180도로 펼쳐지고, (하드 커버의 경우) 두꺼운 가죽 사이에 기록이 보관된다.
쉽게 훼손되지 않고, 다른 책과 위화감이 없다.
첫 장을 시작으로 온갖 메모, 글, 그림이 담긴다.
취소선을 좍좍 그은 마음에 들지 않은 글부터, 형광펜으로 표시한 마음에 드는 문장까지 전부 나의 책이 된다. 사용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기록부터 보관까지 노트가 온 힘을 쏟는다.
몰스킨의 숨겨진 매력은 맨 앞장에 있는 리워드 페이지이다.
보통은 분실 시 찾아주는 이를 위한 금액이다. 그렇지만 주인에게도 의미 있다.
나의 기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서 다음 노트는 더 비싼 노트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2015년의 일기장에는 7만 원을, 올해 5월부터 7월까지 사용했던 노트에는 10만원을 적었다.
지금 쓰고 있는 노트와 올해를 함께한 플래너에는 얼마를 적게 될까?
무척 기대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몰스킨의 가장 큰 매력은 글을 쓰는 것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수증을 붙이고, 마스킹 테이프로 페이지 인덱스를 표시하는 등 나의 흔적이 남는다. 그것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즉, 몰스킨은 그것에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감정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보통의 노트는 단순히 기록을 보관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쉽게 찢어버리고, 중간을 뛰어넘고, 다른 노트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몰스킨은 기록을 차곡차곡 ‘쌓는 것’에 가치가 있다.
때문에 한 장도 찢을 수 없고,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나는 몰스킨을 2/3 가량 쓰면 남은 페이지를 가늠하며 초조해한다.
글을 쓰다가 노트가 끝나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몇 장 남지 않았을 때에는 이걸 쓸까 말까 고민한다.
특히 연간 계획이나 새로운 프로젝트의 계획을 스케치할 때에는 찝찝함을 느낀다.
다 쓴 노트와 새 노트를 같이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몇 장을 찢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중간에 새 몰스킨으로 바꿀 경우 이전 노트의 내용을 깔끔하게 재 정리해서 새 노트에 옮겨 쓴다.
그런데 지저분하고 난잡하게 쓴 날 것의 계획이 더 근사하고 선명하게 읽히는 것을 왜일까?
17년은 Panoramic weekly calendar를 스케줄러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없으면 안 된다.
가로형으로 쓰는 이 노트는 소프트 커버로 되어있다.
런던 옥스퍼드 스트릿 113 몰스킨 샵. 14.95 파운드 짜리 이 노트를 01월 10일에 샀다.
그때부터 이 노트와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다.
쓰고 지우고 체크하고 별표 치는 모든 것이 기록이 된다.
내가 나의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나간 페이지를 보며 잊었던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다.
나는 손바닥보다 약간 큰 이 노트에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
끝으로, 몰스킨과 교감해 본 이들에게 이것은 노트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당장 나부터 이 노트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잘 아는 남자 친구는 출장 선물로 18년도 위클리 플래너를 선물했다.
정확히 18년 1월 1일부터 사용할 수 있다.
이 다이어리를 미리 사용하는 방법은 월간 달력에 기념일을 표시하는 것뿐이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설렌다.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몰스킨이 기다려진다.
당연히, 이 글 또한 몰스킨에서 브런치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