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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덕 Dec 17. 2023

실버벨(단편)


silver bells, silver bells
it`s Christmas time in the city~~

실버베엘~~ 실버베엘~~
크리스마스의 종소리이~~~



크리스마스이브의 밤거리.

거리 가득 캐럴이 울려 퍼지고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곳곳에서 빨간 산타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는 이들을 행해 한껏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고 거리를 지나는 이들은 추위에 하얀 입김을 호호 내불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로 화답한다.

광장에 세워진 커다란 대형 트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온갖 장식과 전구들로 촘촘히 수놓아져 색색이 예쁘게 반짝거리고 멀리 첨탑의 커다란 십자가는 까만 밤에도 은총이 길을 잃지 않고 찾아올 수 있게 빨갛게 빛나고 있다.

어느새 검은 밤하늘에 새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진다.

오전 내 잔뜩 낮아져 있던 구름이 밤이 되며 기어코 눈으로 변한 것이다.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하늘로 향하게 만들었고 눈송이 하나하나에 마치 예수님의 사랑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 그것에 닿는 모든 이가 기쁨과 만족에 충만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감사와 사랑의 기도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엘비스가 부르는 느릿하고 차분한 실버벨의 노래는 거리 가득 퍼져서 세상을 사랑과 성스러움으로 가득 채워나갔다.

이 거리를 멀리서 바라본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걸 감히 의심치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약속처럼 다시 살아나셔서 거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기쁨, 그리고 감사를 불어넣었다.

그의 사랑과 은총은 분명 지금, 이곳, 이 순간에 있었다.

 




쨍그랑~~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캐럴의 노랫소리 어딘가에서 갑자기 무언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쁨으로 소란스러운 거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처럼 그 소리는 분명 들려왔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의 흥겨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리가 난 곳은 건물과 건물사이의 좁은 골목이었다. 기쁨의 빛이 모든 거리를 가득 채웠지만 그 좁은 골목의 안쪽만은 채우지 못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의 좁은 틈새라 빛이 들어가지 못해서기도 하지만 어떤 빛이든 그림자를 가지는 게 숙명이듯 그 골목은 크리스마스의 숙명이기도 하였다.

그곳엔 은총의 눈송이마저도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아니 떨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골목으로 빨려 들어간 눈송이는 곧 시커먼 어둠과 동화되어 눅눅하고 차가운 잿빛 얼음덩이로 변해버렸다.

거기에 한 사람이 있었다. 골목의 어두움에 거의 가려져 희미했지만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건물 벽에 등을 기댄 채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를 골목 입구로 아주 조금 스며든 빛이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비친 그 존재는 마치 사물과도 같았고 풍경과도 같았기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과 추위에 엉겨 붙은 그의 머리는 헝클어지고 기름져 아무렇게나 말라붙어 있었고 씻지 않은지 며칠이나 되었을지 짐작도 못할 만큼의 얼굴은 더러운 잿빛을 띠었다. 닿고 닳아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옷들을 겹겹이 껴입은 채 주저앉아 있는 그의 입술에선 무언지 모를 액체가 턱을 따라 흐른 채 허옇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깨어진 병이 하나 있었는데 소리의 원인은 그것이었다.

지저분한 그의 머리 위로 잿빛의 얼음송이가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며 그를 짓누르며 더럽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불쾌하게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게 만들었다. 그는 반쯤 감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골목 사이의 거리를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웃기고 있네......ㅅ.. 발"


기쁨으로 가득 찬 거리를 바라보며 그는 욕지기를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선 거리로 나가 한바탕 큰소리로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힘도 의지도 이미 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실버벨의 노래는 그에게 더없이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잔인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반쯤 감긴 눈을 거리에 고정한 채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도 한때는 저 거리 속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기쁨에 가득 차 있었고 사는 게 즐거웠으며 하는 일마다 순조로웠다. 그러다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그 위기를 끝내 넘기지 못한 채 상황과 시간과 운명의 흐름에 따라 이 순간까지 오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가해진 운명은 너무도 가혹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된 것이 부당했다. 그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생명의 불이 꺼져감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킥킥킥킥.. 큭.. 큭.....'


크리스마스에 죽음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묘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명과도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웃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입술 언저리를 맴돌다 다시 목구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의식이 점점 몸을 떠나고 있었다. 그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으로 온통 과거를 상기했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때 좀 더 잘했더라면.... 다시 한번 돌아간다면....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온통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크리스마스의 카운트 다운이 들려왔다. 이제 곧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성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고 자신의 의식은 완전히 떠날 것이다.

눈앞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때였다. 흐려진 자신의 눈앞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미 다른 세상으로 반쯤 떠나버린 정신이었건만 다가오는 사람이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존재는 거리 가득 지나는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두 손을 주머니에 가볍게 찔러 넣은 채 조용하고도 성큼스럽게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온 존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곤 인사를 건넸다.


"안녕? 또 만났네"

'날 데리러 온 건가?'


그는 말을 꺼내려했지만 이미 말할 기운마저 모두 사라져 버렸기에 생각만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존재는 그가 하려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뭐, 그런 셈이지 크크. 시간이 되었잖나"

'저승사자 치고는 평범하게 보이는군'

"응? 저승사자? 아이고 이거 이거 날 기억 못 하는군. 이봐 난 그렇게 우아한 게 아니라고"

'그래? 쳇. 네가 누구든 이제 무슨 상관있다고. 데려가려면 얼른 데려가, 이 빌어먹을 망할 세상을 나도 빨리 떠나고 싶으니깐'

"크크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너무 보채진 마시게나"

후회와 울분과 저주로 머리가 가득 찬 그는 존재의 말을 한 귀로 흘러들으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내가, 내가... 도대체 잘못한 게 뭐라고... 이 빌어먹을... 망할... 저 악마 같은 노랫소리... 아.. 다시 돌아간다면...'

존재는 그의 생각을 들으며 놀랍고도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

"뭐? 다시? 크크 다시 돌아간다면 어쩌겠다는 건데?"

'다시 돌아간다면 맹세코 지금같이 끝나지 않을 거야.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보군. 그것 참 이상하군. 보통은 지금 정도의 상태면 내가 기억나야 할 건데...? 확실히 축복의 날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군 크크"



10!! 9!! 8!! 7!! 6!! 5!!


어느새 크리스마스의 새벽을 기다리는 카운트 다운의 함성이 크게 터져 나왔고 주저앉은 그를 바라보던 존재가 갑자기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순간 세상이 고요해지며 날리던 눈송이들이 그대로 공중에 멎었다. 시간이 멎은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기억을 좀 살려줘야겠군"

존재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그의 헝클어진 머리에 갖다 대었고 그 순간 꺼져가던 그의 머릿속이 갑자기 밝아지며 순간 모든 기억이 살아났다.

그는 이제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존재. 그저 존재였다.

인간은 절대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아닌, 그러나 악마도 아닌 그런 존재였다. 전능하고 초월적이며 장난을 즐기는 존재.

그리고 그 존재를 이미 세 번이나 만났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것도 이곳, 이 자리, 이 순간에서.

그리고 또 기억해 냈다. 자신은 이미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과거로 돌아가 삶을 다시 살았다는 걸. 그것도 세 번이나.


"어때? 이제 좀 기억이 나나?"

"그래... 이제 다 생각이나.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지난 세 번의 삶 동안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선택을 되돌려 다시 했지. 그러나 결과는 보다시피 그대로지. 어때?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나?"


존재의 말에 그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존재의 말대로 그는 분명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였고 그 결과 이전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운명인 것일까? 이렇게 거리에서 차갑게 세상을 저주하며 죽어가는 게?

아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번엔 정말 다를 것이다. 한 번 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결말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다시 돌아가고 싶어. 염치없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꼭 나를 다시 돌려보내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야."

"크크 염치.. 인간은 원래 염치라는 게 없이 태어난 존재야. 아직 그걸 모르는군. 아무튼.... 다시 돌아간다라..."

존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좋아. 다시 과거로 보내주지. 자네가 원하는 바로 그곳 그 시점으로. 그리고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결정을 하게 해 주지. 그렇게 한다면 이번엔 정말 지금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겠나?"

"그.. 그래 물론이지. 그때 선택만 달리 했더라면 절대 이런 꼴로 여기에 있지 않을 거야."

"흠... 좋아. 썩 믿음은 안 가지만 뭐 그렇게 하지. 혹시 또 모르지. 자네가 운명을 바꿀지도. 자, 그럼 돌아가볼까?"

그의 대답을 들은 존재가 다시 손을 들어 손뼉을 치려는 찰나 그가 다시 물었다.


"자.. 잠깐.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행동을 저지받은 존재는 살짝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지?"

"왜 이렇게 나를 여러 번이나 다시 살려주는 거지?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을 텐데?"

"오 호기심! 호기심은 염치완 다르게 인간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거지. 좋은 질문이야. 자네를 왜 살려주느냐 이 말이지?"

존재는 사뭇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며 대답에 뜸을 들였다.


"흠... 대답해주지. 그런데 자네는 이 대답을 기억하진 못할 거네"

존재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자네를 살려주는 건 뭐랄까... 아! 그래 그렇지. 그거와 비슷하겠군. 왜 있잖나. 재미있는 영화 말일세. 보고 또 보고 몇 번을 봐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지 않는가. 그거랑 비슷해. 모든 걸 알아도 또 봐도 재밌는 영화. 자네를 다시 살려주는 건 그와 비슷한 거네."

"그럼.... 혹시.. 다시 돌아간 삶에서도 지금과 결과가 같다면 그때도 당신이 와서 다시 나를 살려줄 수 있는 건가?

"음. 그거야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할지 안 할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 몇 번을 봐도 재밌는 영화도 언젠간 질리니깐.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겠지? 그럼 이제 다시 돌아가볼까?"

"앗.. 아니 잠깐 하나만 더 대답해 줘."

"뭐지? 이번이 정말 마지막 질문이야. 다시 질문한다면 이대로 너의 생을 끝내버릴 테니까."

갑자기 싸늘하게 변한 존재의 눈빛에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호.. 혹시.. 내가 죽음을.. 피.. 피해 갈 수도 있을까?"

"크하하하하하하"

그의 질문을 예상치 못했는지 존재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세상에. 욕심. 그래 욕심! 욕심이 인간의 가장 기본 덕목인걸 종종 깜빡한다니깐... 크크. 그래그래 대답해 주지. 죽음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네. 이 나라고 해도 말이야. 존재하는 모든 건 언젠간 다 죽게 되어있어. 나도 때가 되면 죽게 되어있지. 자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겠지? 어차피 자네는 기억도 못할 거지만. 아무튼 이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네. 부디 이번 삶은 제대로 살아서 여기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짝!!


존재는 허공을 향해 다시 박수를 쳤고 멈추었던 눈송이는 다시 거리로 떨어졌다.




Merry Christmas~~~!!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희망의 종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워나갔다.


실버벨~~ 실버벨~~
크리스마스의 종소리이~~~~
Ring a ring~~ Ring a ring~~
hear them ring~~ hear them ring~~~
Soon it will be Christmas day~~~


그는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실버벨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잃었다.

존재가 있던 자리는 어느새 눈으로 덮여가고 그 위로 기쁨에 젖은 수없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가 있던 골목엔 소복이 눈이 쌓여갔고 누구도 그곳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거리는 이전과 다름 없었고, 엘비스의 그윽한 목소리만이 크리스마스의 새벽 내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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