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그림

디르크 바우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

by Erin Chon


마음 속엔 눈물을 담아 두는 작은 주머니가 있다. 울 일이야 너무 많지만 어찌 일일이 다 울면서 살 수 있을까.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먼 산 바라보며 참았다가 주머니에 담고,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눈물도 밥한술과 함께 꿀꺽 삼켰다가 주머니에 담고, 남들 볼까 하품하는 척 눈물 한방울만 살짝 내놓고 나머지도 또 주머니에 담는다. 작은 주머니는 오줌보처럼 차올라 여간 성가신게 아닌 상태가 되어도 얼마나 꼭 묶어 놨는지 저절로 터지지도 못한다. 한번쯤은 비워내야 하는데… 일상의 삶은 그럴 기회마저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눈물보가 너무 가득차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그림이 있다. 디르크 바우츠의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보면서 울라고 작정하고 그린 그림이다. 마리아는 얼마나 울었는지 이미 두 눈은 충혈되어 있고 방금 흘러 내린 눈물 방울은 만지면 손 끝이 젖어들 것만 같다. 마리아의 슬픔은 부재에서 온다. 그녀가 그토록 찾는 것은 충만함으로 가득찼던 예수의 존재인데 그 예수는 더이상 없다. 예수의 ‘없음’은 그녀가 가진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15세기 삶에 지친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벽에 걸어 놓고 기도했다. 예수의 초상화가 아닌, 예수를 잃고 슬픔에 가득찬 마리아의 초상화 앞에서 기도를 한 까닭은 무엇일까? '부재하는 것'을 끊임 없이 상기하는 것보다는, '부재함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더 위로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부재하는 건 예수 뿐만이 아닐것이다. 쉼, 희망, 사랑, 물질… 내게 ‘없음'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 한껏 부풀어 오른 울음주머니를 터트리며 목놓아 울 수 있는 건, 나처럼 ‘없음’의 고통 속에 울고 있는 또 한명의 누군가 앞에서 일 것이다.


그림이 할 수 있는 건 함께 울어 주는 것이다. 그림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어떠한 ‘부재’도 회복시켜주지 못한다. 그림은 그저, 와서 실컷 울라고 기다려 주고, 눈물이 마를 때 까지 숨죽이고 그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오늘,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마치 알고 지냈던 것 같은 어떤 분의 부고를 접했다. 유족들이 아주 오랫동안 겪어야 할 부재의 고통은 어떻게 위로 받을까...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 15절)


Dieric Bouts (c.1420-1475), Mater Dolorosa (Sorrowing Virgin), oil on panel, 38.7 × 30.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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