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한 Nov 22. 2020

도플갱어를 발견한다면
나의 선택은?

드니 빌뢰브가 던지는 '선택'에 대한 질문

인간이 기로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선택뿐이다. 거기에 포기는 없냐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드니 빌뢰브의 <에너미>는 포기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선택은 필연적이며 실수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벌어진 일을 벌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만큼 책임지는 것. 이것이 드니 빌뢰브의 <에너미>가 갖추고 있는 태도의 원리다.     


드니 빌뢰브의 <에너미>는 원작에 충실한 영화다. 마지막 결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에너미>는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에 기대어 탄생했다. 단지 <도플갱어>의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와 안토니오 클라로다가 <에너미>에서 앤서니 클레어와 아담 벨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주인공은 역사 선생이다. 우연히 빌려본 비디오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배우를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를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과 목소리, 키와 체형, 심지어 배에 난 상처까지 똑같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욕망과 결핍마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들의 욕망과 결핍은 서로의 뿌리를 뒤흔들고 파괴한다.     


<에너미>는 자신은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도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음을 깨닫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는 영화에서 다소 상징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화는 구체적인 표상을 강조하며 질문을 던지는 대신, 사람의 선악과 관계없이 발생하는 삶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선택 앞에서 저지르는 실수의 가벼움과 책임지는 것의 막중함을 카메라를 통해 보여준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의도’의 유무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양비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배설통 삼아 숨은 욕구를 해결하고 이후의 일은 나몰라라 회피하는 것은 자칭 ‘솔직한 사람’들의 마지막 수단이다. 온갖 사건과 사고는 그들에게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선택 이전의 세계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누구도 책임을 회피할 순 없다. 그것은 사람의 성별, 나이, 신장, 몸무게에 따라 차별 책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갑을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이 사회에는 타인을 우산삼아 자신의 책임이나 죄책감을 덜어내는 경우가 벌어진다. 나에게도 벌어진다. 그렇다면 막상 위기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은 무엇일까. 아마도 <에너미>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을 것이다.      


아담 벨이 자신의 수업에서 헤겔과 막스의 이론을 언급하는 장면은 사라마구의 원작에 바치는 영감의 헌사다. 영화는 원작소설의 마지막 지점을 제외하고 큰 줄기를 그대로 가져왔다. 소설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읊조리면서 이 글을 마무리해보자.       


“제일 불안한 건, 그자가 나를 닮았다는 사실, 내 복사판이었다는 사실이 아냐. 정말로 불안한 건 오 년 전에 그자와 내가 똑같은 모습이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까지 똑같았단 말이지. 게다가 오 년이 지난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그자가 여전히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더 불안해.”          

작가의 이전글 기억하고, 뒤틀어 만들리라. 웨스 크레이븐을 기억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