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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Jan 09. 2021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1917>

<1917>에 대한 코멘터리

어찌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선의를 위해 힘쓰지만 개인이나 소수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는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 말이다. 아마 이는 <샤먼 킹>의 독자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동일할 것이다. 다케이 히로유키의 <샤먼 킹>에는 영매들이 각자의 영혼과 힘을 합쳐 영매의 왕좌를 차지하는 ‘샤먼 파이트’가 등장한다. <드래곤 볼>의 천하제일 무도대회로 이해하면 쉽다. 샤먼 파이트의 유력한 승자 ‘하오’를 꺾기 위해 주인공들은 각자 수련하며 힘을 기른다. 멋있는 기술과 개개인의 각성이 이루어지며 “이만하면 하오를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싶지만 마지막 권에 다다랐을 때 주인공들과 독자들은 깨닫는다. 이 하오라는 인물은 고대로부터 선택받은 자이며 주인공들 모두의 영력을 합쳐도 하오에게는 티끌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당시의 결말은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인공이 그렇게 노력했으면 하오를 쓰러뜨리고 왕좌를 차지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해당 만화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소년만화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좌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노력해도 안된다’는 무기력한 좌절이 아닌, 개인이나 소수가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어떤 흐름이나 운명, 세대 따위에 대한 좌절이다. 나는 이제야 그 만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그에 따라 서글픔을 머금을 줄 아는 이성과 감성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1917> 포스터


<1917>은 바로 그 어찌할 수 없는 공허함에 대한 이야기다. 샘 멘데스 감독은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알프레드 멘데스에게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억을 들었다고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아버지와 같은 자녀가 아닌 저와 같은 손자들에게만 들려주셨죠. 그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 따위는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샘 멘데스가 술회했다. 당시 겨울이면 안개가 180cm까지 것에 비해 키가 16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 알프레드 멘데스는 전령 역할을 수행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평소 너무 자주 손을 씻자 샘 멘데스가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지금도 참호에서 묻은 진흙을 씻어버리려고 하시는 거란다"라고 대답했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지금껏 다양하고 수많은 전쟁영화를 보아왔다. 고증과 사실, 그리고 창작과 극적 허구성이라는 부분을 지나 그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전쟁의 잔혹함이었다. 지나친 잔혹성이나 모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재현된 그 영화들에는 선의가 있었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인간의 잔인함을 ‘조직’하는 상황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당장 전쟁이 나면 가상의 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끼리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어 헤어지거나 잠식되어 어떤 상황을 초래하는지. 과거에는 비록 인간이 어리석고 사상과 탐욕에 눈이 멀어 피를 피로 씻는 전쟁을 벌였으나 비로소 우리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영상을 만드니 이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굳은 선의 말이다.


당장 기억나는 전쟁영화들이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해변 상륙작전을 다룬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라이언이라는 이름의 적자를 구하러 가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일본 제국주의와 진주만 폭격을 다룬 <진주만>, <미드 웨이> 같은 영화들, 이데올로기 탓에 형제가 갈라지고 군인이 시민을 학살했던 기록이 담긴 <태극기 휘날리며>, 혹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산골짜기에서 국군과 인민군, 연합군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이해하는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우화적인 영화까지. 우리는 동시대에 계획되지 않은 뚜렷한 비전들이 창작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일관되게 공유되어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17>의 블레이크(좌)와 스코필드(우)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은 그의 할아버지 알프레드 멘데스가 들려줬던 이야기와 실제 1차 세계대전의 기록에 근거해 제작되었다. 제한된 시간 속 불가능한 미션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1917>과 같은 영화가 그렇다. 단 8시간 안에 적진을 건너 최전선으로 건너가야 하는 여정을 단 두 시간으로 압축시켰다. 난 여기에 마라톤의 유래가 인용되었다 생각한다. 기원전 490년 그리스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전투를 벌였던 도시 마라톤에서 아테네는 승리를 거둔다. 그리스 병사 필리피데스가 그 승전 소식을 본토로 전달 하기 위해 아테네까지 약 40km를 쉬지 않고 뛰어가 "이겼다!"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다는 그 전설 말이다. 영화 <1917> 역시 그 전설만큼이나 거대한 흐름을 자랑한다.


<1917> 역시 한 명의 병사가 소식을 전달하려 뛰어가는 영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두 시간 안에 상황이 종료될 것이 빤한 영환데 우리는 그 속에서 주인공들이 특정한 위험을 어떻게 타개할지를 기대하며 스릴을 느끼게 된다. 이는 감독의 치밀한 스토리와 관객의 가쁜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자 한 카메라맨의 노력이 탄생시킨 서스펜스 덕이다. 그 서스펜스를 즐기고 나면 우리는 전쟁과 이어지는 학살의 재현을 경고하는 감독의 목적을 마주할 수 있다.     


나무 밑에서 잠을 취하던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눈을 뜨면서 1917년 4월 6일이 시작된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불려 간 곳에는 제복을 멋지게 갖춰 입은 에런 무어 장군이 작전 판을 보고 있다. 장군은 현재 독일군이 철수 중이고 에스쿠드 외각에 함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최전선 데번셔 2 연대에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달할 것을 명령한다. 블레이크가 선택된 이유는 데번셔 2 연대에 블레이크의 친 형이 있기 때문이지만, 함께 온 스코필드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스코필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왜 지금이지? 독일군에게 발각될 위험이 낮은 밤에 이동하면 안 될까? 블레이크는 완강히 거부한다. 우리에겐 8시간밖에 남아있지 않고, 우리가 전령으로 가지 않는다면 수천 명이 함정에 빠지고 말아. 우리 형을 포함해서 말이야.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군장과 소총, 조명탄을 챙겨 참호와 땅 밑, 땅 위를 거쳐야 하는 죽음의 사선으로 향한다.     


참호 밖에는 포탄 투하의 흔적과 시체들이 즐비하다. 전선의 진정한 돌입 구인 찢어진 철조망을 지날 때 스코필드는 손이 찢어진다. 죽음의 무대에 발을 들인 자, 대가를 치르리라. 참호를 파고 마주하던 독일군 진지에 정말로 적이 후퇴했음을 확인한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땅 밑인 지하 갱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신은 이들에게 편안한 여정을 선물하지 않는다. 독일군이 설치해둔 부비트랩에 갱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스코필드를 블레이크가 부축해 탈출한다. 수통의 물로 얼굴을 씻고 시야를 확보한 스코필드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블레이크에게 묻는다. 왜 하필 나야? 손이 찢어지고 갱도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은 스코필드지만, 그의 물음은 이 전쟁에 징집된 모든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럼 돌아갈래? 블레이크의 물음에 무너져 있는 갱도의 출구를 본 스코필드는 대답한다. 얼른 가기나 해. 이 둘이 전령으로 출발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전쟁은 누구 하나도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도록 계획되었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둘의 여정도 멈출 수가 없다.      


선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폭파되어 허름해진 농가에 도착한다. 스코필드가 우유를 수통 안에 넣고 블레이크가 주변을 정찰하며 한숨 돌리는 사이 독일 전투기가 불시착한다. 독일 파일럿이 불타는 전투기 안에서 괴로워하고 이 둘은 파일럿을 구출한다. 하지만 운명론적 관점에서, 철조망에 손이 찢어졌던 스코필드가 방탄 모자에 물을 뜨러 간 사이 멀쩡했던 블레이크는 독일군에 살해당한다. 친 형을 향한 애정이 임무수행의 중요한 당위였던 블레이크의 의지는 비록 몸은 식어가되 스코필드의 품 안에서 이어진다. 또 다른 운명이 스코필드에게 덧씌워진 것이다.     


길 위에 쓰러진 나무 앞에서 스코필드에게 약간의 휴식이 주어진다. 그동안 수없이 걷고 뛰어왔으니 아군 다른 부대의 사병 트럭에 실려 가는 것을 휴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약간의 소강상태에서 나이 어린 병사들이 한 마디 건넨다. 뭣도 모르고 끌려가는 버스에 잘 타셨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대화는 딱 그 나이에 나눌 만큼 충분히 철없는 대화지만, 이 대화가 전쟁 중 짤막한 ‘휴식’이라는 상황에 잘 맞아떨어지면서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지금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하게 한다. 그러던 중 제동이 걸린다. 트럭의 뒷바퀴가 진흙탕에 빠지면서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누구보다 빠르게 스코필드가 내려 상황을 확인하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 전쟁에서 유일하게 스코필드만이 독일군과의 전쟁이 아닌 시간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명의 병사와 등으로 세 번, 모든 병사와 앞으로 두 번 트럭을 밀었을 때 마침내 트럭이 제동에서 벗어난다. 스코필드의 여정에는 아직 끝이 허락되지 않았다.      


영화 속 스코필드는 참전 전 가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 전투와 임무에서 보이는 모습에는 단순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전에 받았던 훈장을 단순히 ‘목이 말라서’ 프랑스 군 장교의 와인 한 병과 교환했다는 말조차 그가 반드시 생존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그는 결코 지치지 않는다. 그가 가장이었던 장면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장면이 있다. 스코필드는 독일군의 공격에 잠시 기절했다가 어느 다락 장애 숨어 들어간다. 그곳에서 독일 여성과 아기를 만난다. 언뜻 보면 불필요한 이 장면에 감독은 꽤나 많은 영화적 시간을 할애한다. 스코필드는 마치 자신의 아이를 마주한 듯 보인다. 그래서 아이에게 목장에서 담았던 우유를 모두 주고, 군장을 털어먹을 것을 여인에게 건네준다. 늦은 밤이 지나 새벽의 해가 뜰 때 스코필드는 여인의 만류를 뒤로하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1917>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스토리텔링이다. 이 스토리텔링에는 화려한 CG나 시기적절한 편집이 배제되어 있다. 대신 캐릭터들이 행동이 스토리의 당위를 뒷받침하며 뛰어가고 그 뒷모습을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좇아간다.      

전장을 역주행하는 스코필드


이 부분이 가장 빛나는 성취를 이루는 부분은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참호 속을 역주행하는 부분이다. ‘간다’에는 직선과 순행의 의미가 있다. 모두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최전선으로 향하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가지’ 않고 ‘거슬러 간다’. 블레이크가 죽은 이후에도 스코필드는 거슬러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가 자의적으로 거슬러가지 않는 경우는 강물 흐름에 몸을 맡겨 흘러가는 상황뿐이다. 강 위에 쓰러진 나무 앞에서 스코필드의 여정은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데번셔 연대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 부대는 후속 부대일 뿐, 명령서를 전달해야 할 매켄지 중령은 최전선에 있고 돌격명령이 내려지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스코필드는 마지막 역주행을 시작한다.     


<1917>은 전쟁을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샘 멘데스는 <아메리카 뷰티>부터 이어진 그의 오래된 장점을 살려 <1917>을 통해 전쟁을 ‘형상화’했다. 미국 영화의 가족주의적이고 전형적인 태도, 이를테면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예상되는 결말로 관객을 유도하지 않았다. 미국 자본을 등에 입은 영국인 감독으로서 샘 멘데스가 취하는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여타 전쟁영화와 다른 이유는 그 때문이다. 감독은 스토리를 짜고, 배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전력 질주하게 한 뒤, 카메라가 그 뒤를 쫓는다. 단순해 보이지만 롱테이크 기법으로 전체적인 과정을 부드럽게 연결한 목적은 상황에 대한 관여가 아닌 전시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평지에서 일어나 참호를 거슬러 땅 밑과 땅 위, 강을 통해 데번셔 연대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참호 끝자락의 매켄지 중령을 향해 달려간다. 공격명령은 시작되고 있고 포탄이 떨어지고 있다. 좁은 참호에는 죽은 자와 살았지만 겁먹은 자가 즐비하다. 그래서 스코필드는 선택한다. 평지 위를 달려가기로. 이 장면은 <1917>의 모든 장면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데번셔 2 연대의 공격명령과 동시에 스코필드는 150m를 전력 질주하기 시작한다. 돌진하는 병사들의 사이를 스코필드가 횡으로 전력 질주하는데 병사들과 부딪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스코필드의 모습은 배역이 아닌 배우의 몸을 걱정하게끔 만든다. 결국 매켄지 중령에게 도착해 에런 무어 장군의 명령서를 전달하고 전쟁 명령을 중단시키는 데 성공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의 여정을 기억한다. 스코필드가 친구의 유언을 이어받아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행복한 결말 말이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흐뭇하게 이 광경을 바라보며 좋은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 “그 전언을 읽는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해줘. 아직 전투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오늘은 끝날 거란 희망이 있었다. 희망은 위험한 거지. 다음 주면 다른 명령이 내려올 거다. ‘일출과 함께 공격하라’. 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거지”라는 스미스 장교와 매켄지 중령의 조언과 한탄 말이다. 독일군의 함정을 간파해 수천 명을 살릴 수 있었으면서도 이들은 왜 침울할까. 왜 좌절하고 있을까.     


나는 스코필드의 여정을 응원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전쟁의 전황은 무언가 거대한 유기체의 움직임이다. 어쩌면 나는 스코필드가 전달하는 공격 중지 명령이 유기체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을 거라고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스코필드의 노력은 부대의 희생을 한순간 멈추는 역할을 했을 뿐 전쟁이 초래한 어마어마한 희생을 막지는 못했다. 물론 이는 스코필드의 잘못이 아니다. 스미스 장교와 매켄지 중령은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하루빨리 전쟁을 ‘중단’하기보다‘종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석된다.     

전언을 전달하고 나무에 기댄 스코필드


블레이크의 친형을 만나 동생의 부고를 전한 스코필드의 여정은 처음 깨어났던 장소와 비슷한 평지와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며 끝난다. 나는 카메라 밖을 상상해보기로 했다. 과연 스코필드가 피로에 찌들어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을지언정 다른 곳에서의 전쟁 역시 멈추었을까. 전쟁은 그다음 해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굳이 기록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선의가 그에 맞는 결과를 이끌어낼 때가 있다. 하지만 개인이나 소수가 아닌 대다수 전체의 동의가 없다면 그 선의가 어둠에 묻히는 경우가 있다. 이 전쟁은 후자였다. 영화 내내 목숨을 걸고 거슬러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슬러 갔던 스코필드를 응원했지만 그가 결코 거슬러 ‘중단’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것이 내가 <1917>을 보며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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