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도 말 할줄 알아요?"
충격이었다. 통합학급 국어 담당 교사로, 우리 학생 2명을 담당하고 있던, 거의 학기 시작한지 3개월이되는 시점인데.. 우리 학생 중 한명이 말을 할줄 아냐고, 나름 놀라는 투로, 툭 하고 물어보신다.
'아니... 참.. 말 한마디 안시켜 보신건가..'
좀 너무하다 싶었다. 진도나가느라, 다른 말썽쟁이들 사이에서 투닥투닥하느라 특수학급 학생을 잘 못챙길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말을 할 수 있냐 마냐도 모르시다니.. 우리 애는 그럼 3개월동안 국어시간에 어떤 존재였지?
그 학생이 좀 유별나긴했다. 나도 처음 그 학생을 만났을 때 내가 질문을 해도 씩 웃으며, 입을 쭉 내밀고 뭐라뭐라 중얼하는 듯 대답하고 그냥 쓱 하고 지나갔으니 나도 말을 잘 못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몇일.. 부모님과 상담 후 집에서는 말을 곧 잘 하고, 의사표현, 감정표현 다 잘 하는 것을 알곤 진지하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후, 나에겐 대답도 잘하고, 갑자기와서 자기 얘기하도 하고 가며 나름 나와 소통을 하며 지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선, 그 친구와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태도를 그 친구가 느끼게끔 해야했다. '너랑 장난하려는게 아니라 진짜 물어보고, 궁금해서 얘기하는 거야' 라는 마음을 그 친구가 알게끔 해야했다. 그 전까지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말할 때 씩 웃고, 중얼거리며 가는 행동은 나름대로 장난이고, 그 반응을 즐겼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친구의 그런 반응에도 다시 진지하게 소통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 반에서 도우미 친구나 가깝게 지내온 친구들 말곤 그 친구가 말을 잘하는지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잘 아는 분이 없었다. 대화가 어렵거나, 조음기관에 문제가 있거나, 소통하는데 어려운 심리적 문제가 있거나, 대화가 불가능한 인지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그 친구와 소통을 하는 친구나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그 친구가 중2때 내가 처음 봤으니.. 적어도 7,8년은 학교에서 일반적인 대화의 소통이 아닌, 서로 이야기하는 상호작용 없이 지내왔을 것이다. 단순히 일방적인 질문과 지시,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주는 소통이 아닌,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로 정해진 것에 따라가기만 하며 학교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누군가와 쌍방의 소통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구어뿐만 아니라, 모든 수단의 의사소통을 통틀어) 어쩌면 상대를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과 다름없다.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나는 너를 인생의 주체자로 살아가는 인격체로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인식하며 그 친구를 대하는 교사나 학생은 없었겠지만, 짧지 않은 7년의 시간동안 진정한 소통을 하려고 노력한 교사나 학생이 없진 않았겠지만, 대부분의 학교생활에서 그 친구의 주체성은 지워진채 학교생활을 해왔을지 모른다.
'하긴 남 말할 때가 아니다..'
학생들과 지내면서 하루 일과 중 내가 한명 한명의 학생과 눈을 맞추며 감정과 감정을 맞닿아 소통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오늘, 아니 한주를 그 학생이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으로 지내왔는지 궁금하긴 한 걸까? 한 학생, 그 학생의 존재를 나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걸까? 교사의 교육적 행위는 그냥 기능적으로만 작동하는 걸까? 교육이란 한명의 존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내가 말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랐던 그 학생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소통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학생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관심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관심. 그 관심이 소통으로 이어지면 그 학생의 존재의 의미는 점점 밀도 높게 다가온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온 문구처럼
교실에서 만나는 한명 한명의 익명의 그 학생들이, 그 존재가 우리에게 매일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