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보다 96년생 여자들의 자살률이 더 높다는 기사를 보았다
나는 설리의 죽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잉을 하면서 보아온 그녀는 유연하지만 단단했다. 노브라 논란에서는 으레 예상했다는 듯이 초연했고, 나이가 한참 많은 배우 이성민, 김의성씨를 성민씨, 의성씨라고 불러서 팬 갤러리가 자중을 촉구할 때도 게시물을 내리거나 장문의 사과문을 게재하지 않고, '오구오구 그랬쪄'라고 달래며 자신을 둘러싼 소용돌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는 그때 유연한 그녀의 태도에 자못 놀랐었다.
많은 연예인들이 영화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했다가 황급히 게시물을 내리거나, 'GIRLS DON'T NEED PRINCE'라는 문구가 적힌 물건을 사용했다가 얼른 내렸다는 기사를 종종 보아왔다. '작은 의견'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녀들에게 가해진 테러에 가까운 항의가 얼마나 거셌는지 짐작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그들과 다른 설리의 태도에 더욱 눈길이 갔다.
언론에서나 일각에서는 악플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에 몇년 동안 지속된 악플과 논란에도 꿋꿋하게, 혹은 더 대담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혀왔던 그간의 행동으로 봤을 때 악플은 직접적인 촉매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악플이야, 열애설이 터지고 공개 연애를 이어가던 그때에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최고 자지'라는 뜻의 예명을 쓰며 거친 가사를 쏟아내던 사람과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소녀의 연애는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그녀에게 지속적인 '입강간' 테러를 입혔다. '입강간'은 여느 남성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노브라로 대중 앞에 선 그녀에게 비난을 가한 건 가부장제 체제에 편입돼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자살이란 건, 그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 예측할 수 있는 징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어제까지 날씨가 너무 좋다며, 기분이 너무 좋다며 밝고 아름다운 모습의 사진을 올리던 그녀가 갑자기 죽음을 택했다는 데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앞에 남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가수 때부터 눈여겨 봐온 건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에 의한 강제적인 공개 연애 이후에 눈에 띄는 행보를 이어가던 그녀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만 박수를 칠 뿐,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녀 뒤에 숨어있었다.
노브라로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됐을 때, 여성들은 응원하는 사람들과 비난하는 사람들로 대상이 갈렸다. 하지만 응원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사실 한국처럼 차별금지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소신있는 목소리를 내는 게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사회는 그런 소신있는, 온몸으로 집중 포화를 맞아가면서 저항한 사람들에 의해 바뀌는 것이지만 그들이 치뤄야할 대가는 어느 사회보다 가혹하다.
사회 주류 기류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을 때, 한국 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나 비난하고 반대하는 대다수가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그 소수를 응원하고 연대하는 드러난 목소리가 있는 반면, 한국은 오로지 혼자서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길을 계속 상처를 입어가면서 가야한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사회개혁가나 혁명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설리가 보여준 모습은 그 어느 정치인이나 진보지식인보다도 혁명가다웠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녀는 혁명가로 불려야 한다고 본다.
처음에는 페미니스트라면 설리를 공개적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그녀의 행보에 동참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그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면 그녀의 소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더욱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들로 이어졌다. 그녀가 바라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 자신처럼 더 소신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 많아지길 바라지 않았을까. 공개적이지는 않더라도, 사회의 억압된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녀를 보면서 나도 자극을 받아서 노브라로 살아볼까 고민을 했었다.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촌스러운 모습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탱크탑에 노브라는 못입지만, 나중에는 그냥 어느날 무심하게 노브라로 모임에 나가봐야 겠다고도 생각했었다. 나같은 띠동갑 여성에게도 그녀가 자극을 준 것이다.
그렇게 종종 죄책감과 왜 죽었을까, 왜 죽어야만 했을까 문득 문득 생각하던 와중에, 82년생보다 96년생 여자들이 더 죽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설리가 느꼈을 절망감과 무력감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https://www.insight.co.kr/news/247954
기사는 1956년생보다 1970년생이, 1970년생보다는 1982년생, 그리고 1982년생보다는 1996년생 여자들이, 더 자살률이 높다는 내용이지만, 기사 제목은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82년생 여자들보다 96년생 여자들의 자살률이 더 높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목소리를 내는 세대는 아마도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80년대생 여자들일 것이다. 기사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요즘 80년대 생 여자들이 일과 가사, 양육에 치여서 가장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은 96년생 여자들이 더 많이 죽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야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이제 갓 성인이 된 96년생 여자들이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는 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82년생은 악다구니일지언정 힘들다고, 힘들다고 사회를 향해서 목소리를 내는데, 어째서 96년생 아이들의 목소리는 82년생 여자들에게까지도 가닿지 않고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96년생일까. 96년생들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1996년은 외환위기 바로 전 해이다.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에 우리 사회의 체질과 성격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 외환위기 이전을 살던 사람들은 종종 좋았던 때를 추억할 거리라도 있지,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때부터 이어져 온 깊은 무력감과 절망감에 어쩌면 한번도 희망이라는 걸 꿈꾸지 못했던 건 아닐까.
무력한 10대를 보낸 아이들이 20대가 돼 사회에 갓 발을 디뎠을 때, 그 지옥같고 전쟁같은 사회의 민낯에 질려버린 건 아닐까. 그 아이들이 알고 있는 세상이란 무력함 또는 인정사정없는, 인간미가 사라진 광기의 사회 두개의 모습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풍족한 사회에서 자라서 의지가 약하고 철이 없다며 쉽게 비난하던 어른이라는 인간들이 뒤에서나 앞에서나 아무렇지 않게 부정을 저지르는 모습이 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환멸을 주었을까.
90년대생들은 사실 마케팅에서는 매우 핫한 존재이다. 소비의 주체가 되면서 유행을 이끌고 있어서 마케터들에게는 이들의 니즈를 알아내는 게 관건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90년생,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는 보고서와 글을 쏟아내면서 이 신인류를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쓰게 할지 골몰하고 있지만, 정작 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90년대생'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위에 인용한 기사의 마지막 구절에서 "한국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살률이 급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현재 젊은 여성들이 노년이 됐을 때 자살률이 더욱 높아질 우려가 있다"며 "이와 관련해 사회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끝맺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더욱 섬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