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초 이야기(32)
하루하루 늘어나는 풍선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괜히 설레요.
어제까지만 해도 초록빛으로 말랑하던 풍선들이 오늘은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했어요. 꽃을 보는 기쁨도 크지만, 그 꽃이 열매로 이어지는 건 또 다른 감동이에요. 분명 작디작은 씨앗이었는데...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만큼이나, 이 작은 풍선들을 지켜보는 오늘 하루의 일과가 꽤 근사하게 느껴져요.
오늘은 베란다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바람 아저씨와 햇살 언니가 번갈아 들렀어요. 보통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눈인사만 주고받을 때가 많은데, 이런 날은 직접 악수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특히 오늘은 악수하다 몸이 휘청이는 걸 보니 몸이 더 가벼워진 게 분명해요. 게다가 이번엔 바람 아저씨와 악수할 때마다 살짝 바스러지는 소리도 났어요. 이거… 뭔가 변화의 징조예요. 다른 어딘가로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예감이 불쑥 찾아왔어요. 햇살 언니는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나를 꼭 안아주었어요.
생각해 보면, 요즘 내 안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불안’이 사라졌다는 점이에요.
싹이 틀 때도, 줄기가 쑥쑥 클 때도,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할 때도, 심지어 응애가 온몸을 간질일 때도 난 몹시 불안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리만치 그런 마음이 잦아들었어요. 오히려 어떤 뜨거움이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뜨거움이 내 불안까지 녹이고 있는 걸까요.
“오, 여기는 완전히 다 익었네!” 심오가 소리쳤어요.
익었다고요? 내가 무슨 감인가요, 익게. 익는다… 익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골 마당 끝자락에 있던 키가 아주 컸던 감나무, 그리고 그 끝에 외로이 매달려 있던 감이 떠올랐어요. 다른 감들이 하나둘 주인집 아줌마 바구니에 담겨 집 안으로 들어가도, 그 애는 끝끝내 가지를 놓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새파란 하늘 아래 선명한 주황빛은 붉은 단풍보다 아름답고, 별보다 반짝였죠.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어요.
혼자라서 외롭지 않냐는 말에 주변에 친구가 없다고 꼭 외로운 건 아니라고 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몸속에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근사하다나요. 어쨌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특히 ‘익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했던 말이 기억나요.
“익는다는 건 단지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 아니야. 그건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빛이 드는 거지.
겉껍질이 조금씩 말랑해질 때, 그 빛으로 밖으로 나가면 나만의 색과 향을 갖게 되는 거야.
그럼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거고.”
그게 참 고되면서도 멋진 일이라는 걸 그 애는 수도 없이 강조했어요. 같은 나무여도 익어가는 속도는 제각각이고, 어떤 감은 새들에게 쪼여 상처를 입고, 어떤 감은 바람에 흔들리다가 준비가 덜 된 채 덜컥 떨어지기도 한다고 했어요. 물론 성격이 급해서 스스로 떨어지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말이지,” 그 애는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제 몸을 가만히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어요.
“제대로 익는 건 내 힘만으론 안 돼. 하늘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야 해. 아저씨는 모든 걸 알고 있거든. 바람의 숨이 얼마나 필요한지, 밤하늘의 침묵이 얼마나 중요한지, 비가 얼마나 자주 내려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조용히 녹아들어야 비로소 익는 거지. 그런데… 잘 익는 것만으로는 안 돼. 그대로 매달려 있으면 결국 썩거든. 때를 알아야 해. 그리고 스스로 놓을 줄도 알아야 해. 내 때는 아직 안 왔을 뿐이야. 나도 곧...”
요즘은 그 애가 던졌던 질문이 자주 떠올라요.
잘 익는 것도 중요하지만, 썩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고요. 나도 이제 거의 다 익은 것 같은데, 혹시 곧 썩게 되는 건 아닐까요? 썩음이 익음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요? 물론 끝이 다르겠지만, 만일 내가 썩게 되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나는 사람들처럼 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흙과 함께한 한평생이었는데, 죽어서까지 함께하라뇨! 나는 작은 이야기라도 좋으니 그 속에 묻히고 싶어요. 나를 영원히 기억하도록 말이죠.
“그럼 이건 이제 따볼까?”
‘… 나를 따겠다고? 나를 따서… 뭘 하려고?’
“그래, 하나 따보자.”
심오는 해맑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어요.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심오는 말없이 내 손끝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비장한 결심이 선 얼굴로 내 손을 조심스레 만졌어요.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렸어요. 혹시 아플까 봐, 괜히 주사 맞기 전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렸어요.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할 거면 빨리… 빨리 좀 해!’
“오호! 풍선이다!” 심오는 풍선을 손에 들고 외쳤어요.
‘…어, 벌써 끝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