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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썬 Feb 09. 2022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도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_어쩌다 덕업일치] 16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뵐 수 있을까요?”

“그래, 올 것이 왔구나.”

출판계에 발을 들인 후 처음 이 말을 한 건 서른이 되던 해였다. 언제, 뭐라고 이야기할지 백번 고민하고 뱉은 말인데 상사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나 보다.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마무리할게요.”

라고 말하면, 상사는 대부분

“그만두려는 이유가 뭐야?”

라고 물어보거나

“그동안 힘들었지?”

하고 그제야 내 마음을 보듬어준다. 그 후

“그러지 말고 잠깐 휴가 다녀오는 건 어때? 한 달 푹 쉬고 다시 와!”

라든지

“다시 생각해보자~ 이제 연봉 좀 올려주려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해?”

라고 설득한다. 전직 후 첫 회사였기에 힘든 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사직서를 내고도 회사가 걱정돼 몇 개월을 더 다닌 이유였다. 회사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걸 배운 시간이었지만. 


그런데 이번에 사직서를 냈을 때는 이런 뻔한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팀장님, 저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그대를 잡고 싶어. 하지만, 안 잡는 게 그대를 위한 거니까 더 좋은 곳으로 가서 건강했으면 좋겠어! 고생 많았어, 정말.”

이라며 진심을 담아 응원해주었다. 퇴사하겠다는 말을 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는가. 마음이 무거울 거라는 걸 알고 배려해주는 팀장님이 무척 고마웠다. 

최종 결재 임원에게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후 면담까지 마치니 정말 끝이구나 싶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임원은 내 자리까지 찾아와서 내게 말했다.

“대표님 방으로 가 보세요.”

“네? 저요? 지금요?”

평소 회사 대표와 이야기할 일은 전혀 없었으므로 의아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일을 아주 잘한다고 들었는데 왜 그만두려고 하는 거죠? 힘든 게 있나요?”

대표가 미소를 띠며 내게 물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힘든 부분은 어제 다 말씀드렸고, 지금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 쉬려고 합니다.”

“그럼 한 달 정도 쉬다가 다시 와요.”

“네?? …… 대표님,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직서를 제출했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대표의 제안에 적잖이 놀랐다. 지극히 보수적인 회사였다. 이런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통 이런 대화가 몇 번 오가면 상황이 종료되지 않나. 의례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만 들으면 끝이겠네.’ 

“한 달이 짧으면 원하는 기간을 이야기해요.”

“네에?”

내 생각이 틀렸다. 거절하면 계속 다른 제안을 했다. 어떤 제안을 해도 거절할 수밖에 없으니  나는 점점 곤란해졌다. 대답을 얼버무리던 그때, 대표에게 결재를 받으려던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 이제 나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후우-’ 하고 마른 숨을 뱉었다. 그런데 안도하기에는 일렀나 보다. 대표는 그 직원 앞에서 내 사직서를 찢었다. 천천히. 갈기갈기.

“ㅇㅅㅇ! 헉!”

옆에서 보던 직원도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이걸로 내 뜻을 전했으니 알 거로 생각해요. 휴가를 이야기해둘 테니 쉴 때 말해요.”

이거 지금 꿈인가? 대표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걸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지금 편집자의 꿈을 이루었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라. 만약 내가 이직에 실패했다면? 아침마다 너무 괴로웠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쉬고 싶었어. 병원도 다녀야 하고. 그저 퇴사 시기를 조금 당겼을 뿐이야. 내가 지금 원하는 건 휴가가 아니야. 퇴사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동료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이 회사에 3년 3개월 동안 다니면서 대표와의 독대는 처음이었다. 대표는 면접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영업팀을 제외하고는 직원들 이름도 잘 몰랐다. 직원에게 크게 덴 적이 있는지 정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퇴사하는 직원의 사직서를 찢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출판사였지만 편집팀은 홀대받는 분위기였다. 팀원들은 많이 힘들어했다. 그래서 편집팀의 사기를 돋우려고 나를 대표로 불러 다독여준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여주기였을지라도 나는 그 면담 이후로 그동안 쌓였던 악감정이 녹아내렸다. 인정과 칭찬, 보상이 약한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내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위로받았다. 그동안 힘들었고, 감격했고, 기뻤던 장면이 그 짧은 찰나에 스쳤다.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직원으로 남았다.


퇴사 의지는 바뀌지 않아 다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인수인계까지 철저하게 마무리하고 퇴사했다. 바람 잘 날 없던 회사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시원할 줄만 알았던 퇴근길이 공허해 눈물이 났다. 




며칠 전 지금 근무하는 회사에서 4년 동안 일했던 직원이 퇴사했다. 임원들을 포함하여 모두 많이 놀라며 아쉬워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회의 직후 장난 섞인 직원의 농담에 임원이 화들짝 놀라며 말한다.

“올해는 그 누구도 저한테 드릴 말씀 하지 마세요!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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